아낌없이 주는 나무 생각하는 숲 1
셸 실버스타인 지음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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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몇 권의 동화는 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고착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평상시에 거의 잊혀진 채 방치되고 있지만, 기억나더라도 희미한 몇 개의 이미지일 뿐이지만, 또한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가 내게는 그런 동화 중 하나다. 이타성(利他性)이란 말을 알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 나는 이 동화를 읽고 감동받았고, 막연하게 나무의 소중함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의미'를 생각했던 것 같다. 다 자란 지금, 문득 쉘 실버스타인이 떠올랐고, 읽게 되었다. 왜였을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나무로 대표되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한편, 타인과의 관계를 이타성이라는 큰 줄기를 잡아 그려내고 있는데, 동화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철학적인 깊이와 간결함의 매력을 동시에 전달한다. 몇 마디씩 들어 있는 글은 수사(修辭)를 버린 시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그림은 간결한 터치로서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이 동화를 읽었던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20여 년 전인 것 같은데 새로이 읽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여전히 좋고, 또한 새롭다. 하나 고백하자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가 아닌 '인간'을 새삼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 타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 밑동만 남은 나무에라도 앉아 쉬고 싶어하는 인간... 인간이 가진 끊임없는 욕망의 모습은 곧 삶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것을 '나무'로 상징되는 이타성을 가진 존재를 통해, 찬찬히 생각게 한다.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만족을 모르므로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으므로 더더욱 강하게 욕망한다... 인간이 이타성을 통해 그 욕망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한 가지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아이 때문에...' '아내 때문에...'라고. 하지만, 이타성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로 한다면 그러한 근거들은 거의가 무의미하다. 그것은 곧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마음속 깊이 전달해주는 물음은 책의 두께나 형식을 뛰어넘는다. 나는 얼마나 이타성을 가진 존재인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하는 물음 말이다.

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러한 문제 제기보다는 어떤 권유를 느끼게 한다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즉, 타인(他者)과의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서, 더 나아가 살아가는 의미로서 이타성을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동화 작가 쉘 실버스타인은 그동안 <아낌없이 주는 나무>(1964) 외에도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다락방에 불빛을>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으나, 애석하게도 지난 1999년 타계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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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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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한 여인이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별 생각 없이 그 책을 갖다 주고 새로이 책을 빌리지만, 그 책에도 역시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책을 변상하거나 심지어는 고소당하기도 하는 불법행위였다. 하지만 그녀는 누가 왜 불법행위를 했을까 하는 것보다는 그 밑줄이 그어져 있는 일 자체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지시에 따라 책을 빌리고 읽어나간다. 궁금증이 커져가고 드디어는 자신과 그가 '게임'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없는' 그를 위해 가운을 사다 놓고, 그를 매일 상상하고, 급기야 실제의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서게 되지만, 그는 찾을 수 없다….

가볍고 활기차게 직조되어 있는 <밑줄 긋는 남자>는 책과 책 읽기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단순히 의미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탄생하는 곳인 '텍스트'와 그것의 수용자인 독자가 만나는 장소를 '밑줄'로 상정해놓은 것이다. 그 상정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그것은 의미가 삶을 움직이는 힘이며, 소통이 사람이 꿈꾸는 본질적인 의미임을 깨우쳐준다.

이 발랄하고 재치 있는 소설은, 하지만 그 전개 방식이 지나치게 가볍게 처리되어 있으며, 그 결말이 예측되는 등 몇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밑줄'로 상징된 '소통'에의 문제 제기는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상상해보라.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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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코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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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희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하루하루가 희망이라는 퍼즐을 맞춰가는 한 장 한 장의 조각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희망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믿어왔던 희망이 어느 날 갑자기 상처로 돌변하는 경험이 심장에 그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과 절망, 무위와 권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같은 심장으로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리라.

무라카미 류의 장편소설 <교코>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첫째, 작품의 무대는 미국이며 주인공이 애타게 찾는 인물이 한때 일본 주둔 GI였던 호세라는 히스패닉계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둘째, 다양한 시점을 통해 주인공인 교코에 대해 생각게 한다는 점이다.

<69> 등에서 반미 감정을 무분별한 청춘의 혈기에 결합시켰던 류가 공간적 배경이 미국인 소설을 썼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주인공의 삶에 대한 깨달음 혹은 성인으로의 진입을 도와준 인물로 히스패닉계 미국인을 설정했다는 것은(그것도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류의 의식 속에 모종의 변화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것은 보편적인 표현 양식인 '춤'에 대한 잦은 묘사, 그리고 바로 그 '춤'을 아주 잘 추는 주인공 교코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고 보여진다. 즉, 보편적인 형식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겠다는 의지 같은 게 읽혀진다는 뜻이다.

한 사람에게 작고 하잘것없을 수도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커다랗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삶 전체를 가리키는 어둠 속 등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관이라고 불리든 성격이라고 불리든 신념이라고 불리든 상관없으리라. <교코>를 읽으면서 그것에 대해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했다. 책을 내려놓은 지금은 무심히 시간이 흐르는 걸 내버려둔 채 쓸쓸해지기도 하고 처연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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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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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Stupeur et Tremblements)>은 그 구조나 의미가 아주 간결하고 명확한 소설이다. 아마도 저자의 퍼소나가 분명한 여주인공 '아멜리'가 일본인 회사에 취직하여 7개월 여의 기간 동안 겪는 일본인과 일본 기업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서구인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본인, 일본 기업만의 성격에 대한 사실적이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사건과 성찰이 아주 날렵하고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구어체를 연상시키는 지문, 여성 특유의 감각과 사고를 재치있게 보여주는 인물 묘사 등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소설로는 드물게(?) '재미'를 느끼게 된다. 덧붙여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속성을 꼭 집어 이끌어내는 데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제목이 되기도 한 '두려움과 떨림'에 대한 부분이 그러한데,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아멜리가 자신의 상관인 후부키 모리에게 시달리다 못해 드디어는 그녀 앞에서 비굴함을 가장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나오는 지문이다.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儀典)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 그래서 나는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 처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150쪽

위에 든 인용 외에도 이 소설엔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다. 먼저 읽었던 <사랑의 파괴>가 사실과 내면을 교묘히 교직해내며 여성의 섬세함과 사랑의 속성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었다면, <두려움과 떨림>은 사실주의 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여전히 여성 특유의 심리 묘사나 섬세한 서술이 잇따르긴 하지만, 좀더 힘이 있고, 파국으로 몰고 가는 구성상의 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멜리 노통.
그녀의 소설은 프랑스에서 벌써 여섯 권쯤 출간되었나 보다. 한국에는 세 권밖에 번역되지 않았고, 이제 두 권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참 흥미롭게 소설을 쓰는 작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알 것만 같다. 프랑스의 독자들이 왜 그녀가 소설을 낼 때마다 열광하고,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은 1999년 왜 <두려움과 떨림>에 돌아갔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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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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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 말 아멜리 노통(Amelie Nothomb)의 소설이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읽지 않았다(못했다). 제목이 주는 매력은 여러 번 책을 만지작거리게 했으나, 왠지 사랑의 환멸을 다루었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가끔은 사랑의 환멸을 다룬 소설을, 또 가끔은 그렇지 않은 소설을 거의 비슷한 욕구로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번에 파리에 갔다가 노통의 새 소설이 프낙(FNAC)에서 팔리는 걸 보고 <사랑의 파괴>를 떠올렸던 걸 보면, 읽지 않았으되 마음속엔 늘 읽으려고 했던 '관심'이 있었나 보다.

1993년 발표된 <사랑의 파괴(Le Sabotage Amoreux)>는 사랑의 공존하기 힘든 본질적 속성인 소유와 소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주인공의 유년기인 1970년대 초반이 나오고 공간적 배경으로 개방 이전의 중국이 설정되어 있고, 어린 여주인공인 '나'와 또다른 여자아이와의 '사랑'(?)의 체험이 주가 되고 있음에도, 전쟁놀이로 은유되는 중국과 유럽, 또는 서구인의 사상과 동양의 그것이 교묘하게 대립된다는 점이 이 소설을 특징짓는다.

거기에, 여주인공을 거들떠도 안 보는 여자아이와의 줄다리기를 통해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소유와 소통이라는 양립이 쉽지 않은 주제를 불거지게 하기 위해 전쟁놀이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곡예에 가까운 아슬아슬함을 자아낸다.

묘사는 치밀하고 집요하지만, 사건을 다루는 솜씨에선 여성적인 모호함을 유지하는 등 이상한 열기가 소설을 채우고 있다. 아마도...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를 통해 자아 찾기를 고집스레 추구하는 어린 여주인공의 집착이 그 열기의 진원지인 것 같다.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성년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이 그렇게 닮고 싶어했던, 갖고 싶어했던 여자아이의 소식을 통해 아직도 변함없이 예전의 도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중얼거리는 말은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고맙고 고마운 엘레나, 그 신화를 줄곧 지키고 있다니.
-182쪽

나는 이 소설을 받치고 있는 일반적인 논리를 이해한다. 더불어 어린 시절 나 역시 비슷한 동기를 가졌던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동기를 제공했던 경험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로서 받아들이거나 해석하지는 않았었다. 이 소설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집착의 완성을 통해 이르는 무심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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