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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1월 말 아멜리 노통(Amelie Nothomb)의 소설이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읽지 않았다(못했다). 제목이 주는 매력은 여러 번 책을 만지작거리게 했으나, 왠지 사랑의 환멸을 다루었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가끔은 사랑의 환멸을 다룬 소설을, 또 가끔은 그렇지 않은 소설을 거의 비슷한 욕구로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번에 파리에 갔다가 노통의 새 소설이 프낙(FNAC)에서 팔리는 걸 보고 <사랑의 파괴>를 떠올렸던 걸 보면, 읽지 않았으되 마음속엔 늘 읽으려고 했던 '관심'이 있었나 보다.
1993년 발표된 <사랑의 파괴(Le Sabotage Amoreux)>는 사랑의 공존하기 힘든 본질적 속성인 소유와 소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주인공의 유년기인 1970년대 초반이 나오고 공간적 배경으로 개방 이전의 중국이 설정되어 있고, 어린 여주인공인 '나'와 또다른 여자아이와의 '사랑'(?)의 체험이 주가 되고 있음에도, 전쟁놀이로 은유되는 중국과 유럽, 또는 서구인의 사상과 동양의 그것이 교묘하게 대립된다는 점이 이 소설을 특징짓는다.
거기에, 여주인공을 거들떠도 안 보는 여자아이와의 줄다리기를 통해 사랑의 본질적 속성인 소유와 소통이라는 양립이 쉽지 않은 주제를 불거지게 하기 위해 전쟁놀이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곡예에 가까운 아슬아슬함을 자아낸다.
묘사는 치밀하고 집요하지만, 사건을 다루는 솜씨에선 여성적인 모호함을 유지하는 등 이상한 열기가 소설을 채우고 있다. 아마도...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를 통해 자아 찾기를 고집스레 추구하는 어린 여주인공의 집착이 그 열기의 진원지인 것 같다.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성년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이 그렇게 닮고 싶어했던, 갖고 싶어했던 여자아이의 소식을 통해 아직도 변함없이 예전의 도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중얼거리는 말은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고맙고 고마운 엘레나, 그 신화를 줄곧 지키고 있다니.
-182쪽
나는 이 소설을 받치고 있는 일반적인 논리를 이해한다. 더불어 어린 시절 나 역시 비슷한 동기를 가졌던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동기를 제공했던 경험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로서 받아들이거나 해석하지는 않았었다. 이 소설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집착의 완성을 통해 이르는 무심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