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에서 만나는 현대 미술의 거장들
강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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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술 입문서들이 부쩍 늘어났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천천히 그림 읽기>, <그림만 보고 알 수 없는 액자 밖 화가 이야기> 등등이다. 그림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늘었다는 이야기인데,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의 책들이 여러 작품들을 '망라'하여 '백과사전'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은 이중섭, 박수근 등의 한국 작가와 반 고흐, 고갱, 로댕 등 소수에 그치고 있는데, 심도보다는 '입문서'를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와 출판 기획자의 컨셉이 마주하는 자리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소호에서 만나는 현대 미술의 거장들>은 입문서이긴 하되, 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잘 알려진 거장들을 다룬 여타의 책들과는 다르다. 에곤 실레, 마티스, 피카소 등 그래도 잘 알려진 편인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루이스 브르주아, 안젤름 키퍼, 빌 비올라 같은 대중에겐 다소 생소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주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거기에다 뉴욕 현지에서 직접 전시를 관람한 저자의 인상기가 덧붙여지고 있어 생생한 '만남'을 돕는다.

근래 늘어난 입문서의 폐해 중 하나로 인상기에 과도하게 저자 자신을 몰입시키는 경향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정보와 감상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작품에 대한 주관적이고 심도 있는 분석 대신 평자들의 공인된 평가를 옮겨 적고, 대상이 된 작가의 대표작 몇 점의 주제를 해설하고 작품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식이다. 특히 작가의 사적인 삶과 작품과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은데, 대중들의 현대 작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 미술의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재현에 대한 억압이 사라졌다는 데 있을 것이다. 추상의 단계를 넘어서 도달한 다양한 소재의 활용이나 파격을 넘어선 표현의 수위는 이미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문 지 오래다. 19세기 말은 물론이고 20세기 초엽과도 단절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현대 미술은 '먼 길'을 걸어온 셈이다. 동시대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반영하며 그 끝에서 미래를 그려 보여주는 현대 작가들.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만, 현대 미술의 진정한 광맥을 발견하기에는 이 책이 그리 적절한 지도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의미는 현대 미술의 경향과 작가들을 일별하는 데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책도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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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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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바탕한 에세이를 읽는 일은 드문 일이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엄격한 개념어들부터 시작해서 의식과 삶에 대한 진실한 탐구와 엄격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간되는 책도 그렇게 많지 않고, 혹시 있다 해도 논리학, 언어학, 동양학 등 철학의 각 분야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표지를 들추다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철학은 딱딱하다'라는 선입견을 버릴 수 있는 노력을 조금만 가질 수 있다면, 철학은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지식이자 도구임을 알게 된다. (철학에 대한 예찬을 하려는 생각도, 자격도 없으므로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정우의 산문집은 철학에 바탕한 에세이이다. 즉, 감성에 호소하는 글이 아닌, '의식'을 일깨우고, '생각'을 벼리도록 돕는 글을 담았다는 얘기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흐름을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짚어보는 글이 있는가 하면, 소칼의 <지적 사기>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을 꼬집는 분석적이고 '힘들인' 글도 있다. 전체적인 통일감보다는 개별성이 강한데, 한 권의 책을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닌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읽는 데 혼란스러움은 없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의 성격을 많이 살렸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에 노출된 '지도리'는 경첩을 뜻하는 우리말이라 한다. 사람과 사람, 의식과 의식의 가교 역할을 자신의 글이 해주길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읽혀진다.

현대 사유가 드러낸 결정적인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담론적 행위에 있어 주체와 대상의 투명한 만남, 아무 매개 없는 일대일 대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제3의 매질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구조'라 부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피스테메', '형이상학적 표면', '아비투스', '객관적 선험'이라 부르든,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이 선험적 장을 경유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엄밀히 말해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특정하게 분절하게 만드는 어떤 무의식적인 틀, 보이지 않는 장인 것이다.
-65쪽

인용이 조금 길긴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장'에 대한 인식(정현종 시인이 쓴 시 <섬>이 문득 떠오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이야말로 철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자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며 '지도리'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강단 철학, '서갑숙 신드롬' 등 다양한 화제를 다루며 저자가 역설하는 철학의 생활화는 귀기울일 만한 내용이 많다. 문장이 가끔씩 정리가 덜 된 듯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엄격함을 유지하려 했다면 이런 '에세이'는 없었을 것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작은'(이 책은 192쪽밖에 되지 않는다) 책을 통해 철학과 삶이 만나는 '지도리'를 발견해보심이 어떨지.

사족 : 이 책의 3장에 실린 <과학/기술과 시>라는 글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70매 내외의 짧다면 짧은 글인데, 이 글은 시(詩)에 관한 정의를 다룬 아주 좋은 글이다. 간결한 글이 도달하는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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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 지음, 강운구 사진 / 창비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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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방> <가까운 골짜기> 등으로 80년대 중후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가 강석경. 이후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등의 작품들을 통해 세월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며, 작가는 여름풀처럼 살아 있는 감수성으로 불안한 실존을 부둥켜안아왔다. 작가의 작품에 늘 내장되어 있는 순수한 정열에의 욕망(혹은 순수한 정열 그 자체)은 소설의 심장 역할을 하며 늘 독자의 눈과 귀를 긴장시켰으며, 척박한 문화 풍토와 저급한 상업주의를 함께 나무라는, 작가 특유의 소설관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인도 기행> 이후 10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이다. 전체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고의 사진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운구가 경주 왕릉의 사계절을 빼어나게 담아내고 있다. 수평적으로 <인도 기행>과 닮은 점을 찾자면 <능으로 가는 길> 역시 일상적인 삶과 거리를 가지고 있는 탈(脫)현실적 시공간을 그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작가의 소설작품들이 현실과의 불화를 주제로 삼아 종로 밤거리로, 인도로, 티벳으로 떠다니는 주인공들을 그려온 점을 생각하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인도 기행>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우선 <인도 기행>에서 불안한 실존을 붙잡아줄 수 있는 절대 존재, 혹은 절대 가치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모습이 앞섰다면, <능으로 가는 길>에서는 그러한 염원 대신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긍정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긴 작가의 변화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 불과 한 해 전에 내놓았던 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에서도 작가는 부침을 거듭하는 실존의 부딪침을 격정적이면서도 서늘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능으로 가는 길>은 개인의 사적 고백이 위주가 아니다. 경주를 상징하고, 더 넓게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왕릉들을 사료(史料)에 바탕한 현대적인 분석과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일이 이 산문집이 가진 본디 성격이다. '문명' '집착' '슬픔' '고독' 등의 테마를 가지고 옛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생각게 하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 특유의 고독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왕릉의 안과 밖을 맴돈다.

생각해보면 <능으로 가는 길>을 읽으며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일보다 그러한 작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고독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깔을 달리하며 환희와 권세를 자랑하는 왕릉도, 문화유적의 상징인 경주도 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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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 칼비노 선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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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이탈리아 문학 하면 움베르토 에코나 체사레 파베세가 떠오르는데, 이제 거기에 이탈로 칼비노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17세기 말 경 터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탄을 맞아 절반은 선(善), 나머지 절반은 악(惡)으로 분리된 자작이 주인공이다. 고향 마을 사람들이 두 쪽 난 자작의 악행은 물론 지나친 선행 때문에 골치를 앓다가, 자작이 순수한 처녀와의 사랑을 통해 온전한 인간이 된 후 올바르게 마을을 통치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그 첫쨋권인 <반쪼가리 자작(Il Visconte Dimezzato)>은 일종의 환상소설이자 알레고리 소설이다. 알레고리 기법은 정치적인 소재를 다룰 때처럼 풍자하고자 하는 대상을 비틀어 보이는 데 그 주안점을 둔다. <반쪼가리 자작>에서 풍자되는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면, 특히 선이다. 악행을 저지르지만 그 속엔 따스한 내면이 있으리라고 상상되는, 바로 인간의 '내면' 말이다. 더불어 그 내면에 대한 믿음 또한 풍자되고 있다. 물론 단순한 풍자는 아니다. 환상소설로서 가지고 있는 풀롯상의 비약이나 묘사의 비사실성으로 인해 그 풍자는 거의 우화의 단계를 지나 설화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준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갈등, 주제를 다루면서도 한편에선 빠져나가는 서술 등이 그 세계를 이룬다.

지적 재미를 원하는 독자에게 어울릴 만한 소설이며, 한편으론 아주 쉬운 소설이라는 생각 또한 드는데, 뭔가 아쉬움이 계속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그것은 아마도... 이렇게 단순화된 플롯과 비사실적 묘사 속에 깃들인 진실이 얼마나 현실적인 울림을 주는가 하는 거의 편협에 가까운 의구심 때문이리라.

앞으로 칼비노의 소설을 더 읽게 된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아쉬움은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그것이 어느 쪽이든 그의 소설이 가진 특이함이랄까, 매력이랄까 하는 특징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란 생각 역시 든다.

원작은 1952년에 발표되었다. 번역이란 다리를 건너오기까지 꽤 오래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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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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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여준 작품세계가 현재의 삶을 누구보다 현대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예술이 가져야 할 본질에 대한 성찰 또한 빼어나게 해내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느림> 등으로 이어진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와 무분별한 개인주의에 대한 견제를 그 주제로서 가지고 있다. 특히 조국 체코의 삶과 프랑스의 그것을 대비하며, 역사적인 문맥을 가지면서도, 지극히 내면적인 울림을 가득 전해주며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연 백미(白眉)다.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었던 때의 그 놀라움과 떨림을 다른 어떤 책에 비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가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 <향수(L'Ignorance)>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그 출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게다가 제목이 '향수'라니! <향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이상스레 맞물리는 소설이다. 쿤데라가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우선, 조국 체코를 떠나 프랑스에 살고 있는 쿤데라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체코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덧붙여, 그러한 존재성이 부여한 '떠도는 자'의 이미지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처럼 소설 전체를 휘감고 있다. 쿤데라는 향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향수병. 고향병. 영어의 '홈식니스homesickness'나 독일어의 '하임베heimweh' 또는 네덜란드어의 '하임베heimwee'는 모두 고향에 대한 향수로 생긴 병을 뜻한다. (...)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 이렇듯 어원상으로 볼 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11∼12쪽.

이 소설을 축약하고 있는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부분은 또한 향수가 태어나고 자라고 숨쉬는 내면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보지만, 과거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맡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직면해서는 절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중얼거리는 주인공의 내면 말이다. 향수병에 걸려 있지만, 사실 돌아갈 곳은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그를 누가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인가.

쿤데라가 말하는 향수는 <오뒤세이아>의 율리시즈를 이야기하며, 그가 페넬로페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 머물렀던 칼립소의 품을 기억해보라고 주문할 때 그 함의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무한' 대신 '종말'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자체가 향수병을 근원적으로 품고 있다는 진술에 다름아니다. 서사(敍事)에 대한 집착을 버린 대신 에피소드 식으로 교직된 <향수>는, 들뜬 첫사랑의 이야기, 떠도는 가운데 거칠어져가는 삶의 쓸쓸함, 도처에서 마주치는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그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 내부는 읽는 이에게 향수를 환기하고, 향수를 느끼게 하고, 향수를 살게 한다.

자주자주 이 소설을 들추면서, 우리가 유배된 이 땅, 이 세계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떠나 있으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 그것이 또한 인간의 운명임을 곱씹게 된다. 멀리서 울려오는 소리는 곧 내 속에서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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