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에 바탕한 에세이를 읽는 일은 드문 일이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엄격한 개념어들부터 시작해서 의식과 삶에 대한 진실한 탐구와 엄격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간되는 책도 그렇게 많지 않고, 혹시 있다 해도 논리학, 언어학, 동양학 등 철학의 각 분야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표지를 들추다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철학은 딱딱하다'라는 선입견을 버릴 수 있는 노력을 조금만 가질 수 있다면, 철학은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지식이자 도구임을 알게 된다. (철학에 대한 예찬을 하려는 생각도, 자격도 없으므로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정우의 산문집은 철학에 바탕한 에세이이다. 즉, 감성에 호소하는 글이 아닌, '의식'을 일깨우고, '생각'을 벼리도록 돕는 글을 담았다는 얘기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흐름을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짚어보는 글이 있는가 하면, 소칼의 <지적 사기>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을 꼬집는 분석적이고 '힘들인' 글도 있다. 전체적인 통일감보다는 개별성이 강한데, 한 권의 책을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닌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읽는 데 혼란스러움은 없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의 성격을 많이 살렸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에 노출된 '지도리'는 경첩을 뜻하는 우리말이라 한다. 사람과 사람, 의식과 의식의 가교 역할을 자신의 글이 해주길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읽혀진다.

현대 사유가 드러낸 결정적인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담론적 행위에 있어 주체와 대상의 투명한 만남, 아무 매개 없는 일대일 대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제3의 매질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구조'라 부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에피스테메', '형이상학적 표면', '아비투스', '객관적 선험'이라 부르든,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이 선험적 장을 경유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엄밀히 말해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특정하게 분절하게 만드는 어떤 무의식적인 틀, 보이지 않는 장인 것이다.
-65쪽

인용이 조금 길긴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장'에 대한 인식(정현종 시인이 쓴 시 <섬>이 문득 떠오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이야말로 철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자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며 '지도리'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강단 철학, '서갑숙 신드롬' 등 다양한 화제를 다루며 저자가 역설하는 철학의 생활화는 귀기울일 만한 내용이 많다. 문장이 가끔씩 정리가 덜 된 듯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엄격함을 유지하려 했다면 이런 '에세이'는 없었을 것이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작은'(이 책은 192쪽밖에 되지 않는다) 책을 통해 철학과 삶이 만나는 '지도리'를 발견해보심이 어떨지.

사족 : 이 책의 3장에 실린 <과학/기술과 시>라는 글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70매 내외의 짧다면 짧은 글인데, 이 글은 시(詩)에 관한 정의를 다룬 아주 좋은 글이다. 간결한 글이 도달하는 '아름다움'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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