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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 지음, 강운구 사진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숲 속의 방> <가까운 골짜기> 등으로 80년대 중후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가 강석경. 이후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등의 작품들을 통해 세월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며, 작가는 여름풀처럼 살아 있는 감수성으로 불안한 실존을 부둥켜안아왔다. 작가의 작품에 늘 내장되어 있는 순수한 정열에의 욕망(혹은 순수한 정열 그 자체)은 소설의 심장 역할을 하며 늘 독자의 눈과 귀를 긴장시켰으며, 척박한 문화 풍토와 저급한 상업주의를 함께 나무라는, 작가 특유의 소설관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인도 기행> 이후 10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이다. 전체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고의 사진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운구가 경주 왕릉의 사계절을 빼어나게 담아내고 있다. 수평적으로 <인도 기행>과 닮은 점을 찾자면 <능으로 가는 길> 역시 일상적인 삶과 거리를 가지고 있는 탈(脫)현실적 시공간을 그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작가의 소설작품들이 현실과의 불화를 주제로 삼아 종로 밤거리로, 인도로, 티벳으로 떠다니는 주인공들을 그려온 점을 생각하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인도 기행>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우선 <인도 기행>에서 불안한 실존을 붙잡아줄 수 있는 절대 존재, 혹은 절대 가치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모습이 앞섰다면, <능으로 가는 길>에서는 그러한 염원 대신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긍정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긴 작가의 변화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 불과 한 해 전에 내놓았던 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에서도 작가는 부침을 거듭하는 실존의 부딪침을 격정적이면서도 서늘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능으로 가는 길>은 개인의 사적 고백이 위주가 아니다. 경주를 상징하고, 더 넓게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왕릉들을 사료(史料)에 바탕한 현대적인 분석과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일이 이 산문집이 가진 본디 성격이다. '문명' '집착' '슬픔' '고독' 등의 테마를 가지고 옛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생각게 하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 특유의 고독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왕릉의 안과 밖을 맴돈다.
생각해보면 <능으로 가는 길>을 읽으며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일보다 그러한 작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고독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깔을 달리하며 환희와 권세를 자랑하는 왕릉도, 문화유적의 상징인 경주도 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