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최성일 지음 / 책동무 논장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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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저자의 책을 읽고서 그의 다른 책이나 같은 주제의 다른 저자를 읽고 싶은데 2차 자료가 미비해 어려움을 겪어본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요새야 온라인 서점이 있어서 도서관에 버금가는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을 읽기 위해서는 대형 서점에 가보는 일밖에 방법이 없었다.

특히, 수지 타산을 따지기 힘든 '사상서'들은 잘 팔리는 몇 권만 살아남을 뿐 출간 후 몇 년 후에는 아예 절판되는 형편이고 보니, 그런 책이 있었던가 싶을 때가 제법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의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서지 목록은 도서관에서나 작성하는 것으로 여겨온 연구자들의 몫도 무시할 수 없다(예를 들어, '찾아보기'를 달아야 할 많은 책들이 그것을 생략한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경제학, 사회학, 철학, 물리학, 생태학 등의 분야에서 대표적인 해외 사상가 70명을 소개하고 그들의 저작 목록들을 정리해놓고 있다. 특히, 각 사상가를 우리 나라에 소개된 시점부터 최근까지 연대순으로 설명하고, 대표작과 그 밖의 책들을 조목조목 정리해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이 책이 정확한 서지 목록을 작성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였음을 의미하며, 지은이가 각 사상가들의 '번역사'에도 주의를 기울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자칫 방대하거나 딱딱해질 수도 있었음에도 가볍고 재미있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는 저자가 연재라는 특성을 따라 글을 써나간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사상은 생각과 같은 뜻이기에 나는 사상가를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 정도로 본다'는 저자의 태도에 더 큰 이유가 있을 듯싶다. 즉, 이 책은 연구를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상당 부분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 움베르토 에코, 데즈먼드 모리스, 노암 촘스키, 니어링 부부 등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인기' 있는 사상가들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분야도 철학이나 사회학 등 몇몇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경제학, 정치학, 물리학, 여성학 등을 다양하게 다루며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예전에도 이런 유의 책들이 몇 권 나왔었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은 사상가들의 모습을 살피는 데 있어 곤혹스러움을 안겨준 적이 많았다. 한 사람의 단일한 시각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이 흐트러졌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부분에서도 걱정이 없다.

하지만 이 책도 얼마간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객관적인 평가를 많이 따랐음에도 다소 사적인 군더더기 같은 서술이 눈에 띈다. 또한 분량이나 깊이에 있어 '수박 겉핥기식이다'라는 비판도 있을 듯싶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들을 만나게 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해낼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책이 증보판을 내며 그러한 역할을 계속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앎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앎의 쓰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앎에 대한 관심이나 의식이 없다고 상상해보면 끔찍하다. 앎이 바탕이 되어야 삶도 사랑도 가능하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이 아니다. 앎은 읽은 책의 양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읽은 책의 양은 훈련을 도와줄 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에서 자유주의 정신을 갖고 지방지 기자로 살았던 둘째아들은 낚시를 하다가 급류에 휘말려 죽는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후 목사인 아버지는 예배 중간에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알지 못했지만, 완전히 사랑했습니다.' 어느 쪽이냐면, 앎은 완전한 이해를 지향하지만 그저 조금 더 알게 해줄 뿐이라는 뜻이다. 좋은 것, 바른 것은 누가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려운 것은 이를 잇는 관심이고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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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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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전락>을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은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다.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다시 검토할 이유도 없었고, 주변의 어떤 일로 환기가 되어서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두어 달 전에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읽고 번역자인 김화영 교수를 따라갔다고나 할까. 책장을 뒤적거려보니 예전에 많이 아꼈던 카뮈의 <결혼·여름>이 눈에 띄었다. <안과 겉>까지 다시 읽고 나니 카뮈의 소설도 읽고 싶어졌는데, <이방인>이나 <페스트>보다는 <전락>에 손이 갔다. 주인공 클라망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나 보다.

카뮈의 작품을 특징짓는 '부조리 문학'이라는 꼬리표는 <전락>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이방인>이나 <페스트>와는 몇 가지 점에서 선을 긋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불길한 시대 속에 놓인 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능동적인 힘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클라망스의 유희에 가까운 언어가 이어지면서 '중얼거림' 같은 자조와 헛된 자부가 넘쳐난다. 기실 자조란 자기 자신을 가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던가. 소설 전체를 통해 클라망스는 정치와 이상, 실존과 구원을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돌고 도는 이야기처럼 그 끝에서 클라망스 자신으로 돌아간다.

아마 때때로 나도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그 심각성 자체가 지닌 경박한 면이 눈에 보여서, 그저 할 수 있는 한 내가 맡은 역할을 계속 연출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 총명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시민 정신이 투철한, 분개한, 너그러운, 협동적인, 모범적인 사람 등의 역을 연출했어요. 그만 해두죠. 이미 선생께서도 이해하셨겠지만, 요컨대 나는 저기 있으면서도 딴 데 가고 없는 저 네덜란드인들과 같았던 겁니다. 즉 내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사실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91∼92쪽

달리 말하면, 소설 <페스트>나 희곡 <정의의 사람들> 등에서와 달리 <전락>에서는 비극적인 상황과 이에 맞서는 인물이 보이지 않고, 비극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웃음을 띄우고 호의를 가장하는 인물이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매력이 클라망스의 다변(多辯), 관계와 의미를 뒤섞으며 실존의 부침을 보여주는 고백들에 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가만히 살펴보면 클라망스의 고백들은 거짓과 진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영광스럽던 삶이 끝났다/분노와 몸부림도 끝났다라는 고백(112쪽), 모든 사람이 다 유죄라고 단언할 수 있다(113쪽)/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것이다(146쪽)라는 고백 등등. 더욱이 클라망스는 거듭해서 자신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더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결론 삼아 이야기하자면, 고백이야말로 <전락>이 도달한 주제가 아닐까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선택이 '후회'가 되고, 자신의 구원이 '고통'이 되고, 자신의 실존이 '변명'이 되는 상황. 그 상황을 담은 말이 고백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 즈음 산다는 일은 무엇무엇을 지키는 것, 무엇무엇을 나누는 것이기보다는 무엇무엇을 원하는 것, 무엇무엇을 누리는 것일 때가 많아졌다. 그것을 위해 심지어는 사람을 짓밟거나 죽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태연하게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가끔 클라망스의 고백이 그 안락한 삶과 겹쳐진다. 거짓 고백과 진짜 고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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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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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 재미는 '문제적 개인'에 대한 핍진한 묘사로부터 올 때도 있고, 브룩클린 식의 삶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올 때도 있다. 하지만 늘 비슷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오스터의 소설이 일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에서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스터의 일상에 대한 관심은 조금은 특별하다. 이를테면 유럽, 특히 프랑스 소설이 일상의 미묘한 엇갈림을 주로 담아내고 그래서 매력 있고 탐나는 일상을 보여준다면, 오스터의 소설은 어느 쪽이냐면 자본주의적 삶에 다름아닌 반복적인 일상의 모습을 들이밀어 악다구니 삶을 만나게 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프랑스 소설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1994년작인 <공중 곡예사>(이 소설의 원제는 'Mr. Vertigo'인데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이 왜 '공중 곡예사' 같은 엉뚱한 제목을 달고 다시 나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을 읽어보라. '공중 곡예사'가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이 짧은 글에서도 '미스터 버티고'로 부르고자 한다)는 1992년 발표된 <거대한 괴물(Leviathan)>에 바로 뒤이어 발표된 작품이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보통 한 작가는 작품들을 발표하는 동안 연속성과 단절성을 보인다. 오스터의 경우에도 두어 번 단절의 과정을 겪었는데, <미스터 버티고>는 현대성이라는 '괴물'에 대한 해체를 통해 '삭스'라는 개인의 삶을 드러내 보여준 <거대한 괴물>의 연장선상에 있는 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미스터 버티고' 월트의 삶은 소설 앞부분부터 전면에 드러나면서 지극히 미국적인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현대성에서 그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게 하는 소설인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의 명성에 대한 언급, 주인공 월트의 묘기를 선보이는 순회식 공연, '사부'를 흠모했던 위더스푼 부인의 고전적인 태도, 무엇보다도 월트가 선보이는 '공중 부양'(!) 등등 이 소설엔 실로 과거 미국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거기에는 오스터가 지극히 일상적인 것 속에서 지극히 역사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한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거대한 괴물>과 닮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서 서로를 밀어내기도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되기도 한 월트의 별명 '미스터 버티고'는 인상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가 어린 시절 공중 부양자로 살았던 삶을 상징하는 동시에, 삶이라는 혼돈 속을 헤쳐나온 생애 자체를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를 통해 이리저리 솟구치고 전락하며 인생유전을 보여주는 월트는 오스터의 소설에서 만나는 주인공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참 흥미롭다.

<미스터 버티고>는 평범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범한 삶이 가진 사건들, 인연들, 감정의 순간들을. 감정 과잉을 절제하면서 초월로의 비약도 꿈꾸지 않으면서. 그럼으로써 도리어 평범한 삶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슴 저릿한 직관과 흥미진진한 서사(敍事)는 재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다고 '떠드는', 평범한 눈과 손으로 씌어진 글들과는 다르다. 그러한 글들이 의도하는 건 일종의 '드라이크리닝'이다. 일상에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그러한 글들은 TV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톤으로 일상을 늘어놓는다. '드라이크리닝'을 즐기는 독자들이 오스터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데 간혹 오스터를 안다고 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때 느끼는 것은 곤혹스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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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내 아름다운 파출부 - 해외현대소설선 3
크리스티앙 오스테르 지음, 임왕준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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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현대소설은 보통 사건보다는 심리의 묘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읽기에 까다롭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인 경향을 띨 때가 많다. 그럼에도 마그리트 뒤라스, 르 클레지오 등의 작업에서 보듯 풍부한 이미지로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한편, 섬세한 일상에의 접근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를 자주 놀라게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 소개된 작가 중에도 이러한 작가들이 꽤 있는데, 아멜리 노통, 마리 다리외세크, 조엘 에글로프, 퍼시 캉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명단에 크리스티앙 오스테르의 이름을 추가하고자 한다.

<로라, 나의 아름다운 파출부>는 원고지 500매 내외의 경장편 소설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작가들도 이러한 짧은 분량의 경장편을 선보이고 있는데(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가 대표적일 것이다) 경장편 소설은 분량이 짧은 데만 그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 삶의 특정한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생각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면, 이러한 분량을 통해 그릴 수 있는 것은 보통 세상사의 몇몇 순간, 몇몇 인물에 한정될 것이다. 이 소설 역시 주인공인 쟈크와 그의 파출부 로라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후반부에 가서야 쟈크의 헤어진 애인 꽁스땅스와 랄프의 사건이 겹쳐지는, 작다면 작은 이야기다.

<로라, 나의 아름다운 파출부>는 꽁스땅스가 떠난 후 6개월이 넘도록 세상과 단절한 채 살고 있는 쟈크의 집에 파출부 로라가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쟈크의 집을 청소하게 된 로라가 어느 날 조심스레 쟈크의 침실에 들어오고, 쟈크 역시 그녀의 존재를 조심스레 받아들인다. 로라를 '발견'하게 된 쟈크는 로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한편, 서서히 세상에 적응하는 힘을 길러가는데, 그러던 중 로라는 동거하고 있던 남자친구와 헤어져 쟈크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로라가 집에 들어온 이후 스며들듯 서로에게 친밀감을 키워가며 두 사람은 행복한 감정과 시간을 나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꽁스땅스가 쟈크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쟈크는 혼란스러움을 느껴 꽁스땅스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데, (소설에 자세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녀가 무책임하게 그를 떠나며 생긴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꽁스땅스가 쟈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랑 혹은 의지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런 꽁스땅스를 피해 쟈크와 로라가 대서양 연안의 랄프 집으로 도망가면서 속도를 높인다. 랄프네가 있는 바닷가에 도착해 더욱 깊은 사이가 된 쟈크와 로라는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 있을 때보다 더욱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 꽁스땅스가 랄프와 사귀었다는 것을 쟈크가 알게 된 것. 거기에 사랑하는 사이로 믿었던 로라가 바로 그 해변에서 새 남자를 사귀고 만 것. 쟈크는 절망한다.

이 소설의 매력은 대상을 바꾸며 엇갈리는 '사랑의 행로'를 보는 데 있지 않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옮겨다니는 로라의 가벼운 사랑도, 옛 사랑을 찾아 다시 찾아오는 꽁스땅스의 무책임함도 무심히 읽어갈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쟈크의 비참함은 가엾다. 그의 가슴에 가득히 쌓일 먼지가, 쌓인 채 죽음을 이룰 모래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사람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 사람만이 사람의 온 삶을 휘어잡고 아프게 한다.

이 소설에 아쉬움이 있다면, 1인칭 시점이 아닌 전지적 시점으로 쟈크의 사랑과 고통을 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로라의 의지박약한 자유분방함도 꽁스땅스의 불안한 결심도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쟈크의 내부는 잘 드러나지 않았을 테지만. 창 밖으로 황사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따라 그 바람은 아주 심하게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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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본 사람들 - 해외현대소설선 2
조엘 에글로프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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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의사 강그리옹>이라는 소설이 모 문예지에 연재되었을 때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 기억이 그의 두 번째 소설까지 이어졌다.

조엘 에글로프의 <해를 본 사람들>은 근래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는 담론 구조가 엿보이는 소설이다. 거대 담론이 퇴조한 지 오랜 지금, 작은 일상의 모습을 깨알같은 이야기들로 모으는 것이 그것으로, 이같은 경향은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된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 같은 영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삶의 총체성’이란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삶이란 한두 가지 원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됐었다. 하지만, 삶이 단편화되고 노마드(nomad)적인 형식으로 변해버린 지금, 그러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거의 없다. 삶이란 하루하루, 시간시간마다 달라지고, 그것을 사유하는 인간의 의식 또한 부유하는 형식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거대 담론이나 그러한 담론 뒤에 버티고 있던 이성(理性)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 다만, 그러한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 인문학의 몰락과 인간에 대한 가치 상실이 안타깝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횡포가 슬픔을 자아낸다.

<해를 본 사람들>은 일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상을 시적 스케치로 잡아낸 작품이다. 일식을 보기 위해 사무실에서 빨리 퇴근하고자 하나 사장이 붙잡고 있어 살인을 저지르는 여직원, 일식을 같이 보기 위해 애인을 기다리다 지쳐 도움을 청하러 남자친구 집에 가지만 거기서 샤워하고 나오는 애인을 보게 되는 청년 등등 ‘일식’이 상징하는 어떤 ‘계기’를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짧은 길이로 흩어져 있다.

무심하게 보면 이들 인물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하지만, 그들은 모두 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람’이다. 이러한 인간 군상을 카메라로 한 컷 한 컷 찍어가듯 묘사한 작가는 아마도 인간사의 분주함을 일식이라는 형식을 빌려 ‘틀’ 속에 넣고 싶었나 보다. 그것이 인간사를 굽어보는 저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유쾌하게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작가는 재치 있고, 기발한 솜씨를 드러낸다. 절제된 문장과 톡톡 끊어가는 어투가 재미있고, 일식이라는 ‘계기’를 생각게 하는 시적 표현도 자주 눈에 띈다. 두 권의 작품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유희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작가의 다음 소설 역시 그러할 것이라 짐작케 한다. 그때는 좀더 성숙한 시각으로 ‘슬픔’까지 담아내길 기대해본다.

사족 하나. 기억이 맞다면, 이 소설의 원서 표지에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낙천적인 표정으로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세상사를 무심하게 대하는 자의 표정이어서 참 마음에 들었었다. 무심하게 세상을 보는 것만큼 부러운 것이 없는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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