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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폴 오스터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 재미는 '문제적 개인'에 대한 핍진한 묘사로부터 올 때도 있고, 브룩클린 식의 삶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올 때도 있다. 하지만 늘 비슷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오스터의 소설이 일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에서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스터의 일상에 대한 관심은 조금은 특별하다. 이를테면 유럽, 특히 프랑스 소설이 일상의 미묘한 엇갈림을 주로 담아내고 그래서 매력 있고 탐나는 일상을 보여준다면, 오스터의 소설은 어느 쪽이냐면 자본주의적 삶에 다름아닌 반복적인 일상의 모습을 들이밀어 악다구니 삶을 만나게 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프랑스 소설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1994년작인 <공중 곡예사>(이 소설의 원제는 'Mr. Vertigo'인데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이 왜 '공중 곡예사' 같은 엉뚱한 제목을 달고 다시 나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을 읽어보라. '공중 곡예사'가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이 짧은 글에서도 '미스터 버티고'로 부르고자 한다)는 1992년 발표된 <거대한 괴물(Leviathan)>에 바로 뒤이어 발표된 작품이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보통 한 작가는 작품들을 발표하는 동안 연속성과 단절성을 보인다. 오스터의 경우에도 두어 번 단절의 과정을 겪었는데, <미스터 버티고>는 현대성이라는 '괴물'에 대한 해체를 통해 '삭스'라는 개인의 삶을 드러내 보여준 <거대한 괴물>의 연장선상에 있는 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미스터 버티고' 월트의 삶은 소설 앞부분부터 전면에 드러나면서 지극히 미국적인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현대성에서 그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게 하는 소설인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의 명성에 대한 언급, 주인공 월트의 묘기를 선보이는 순회식 공연, '사부'를 흠모했던 위더스푼 부인의 고전적인 태도, 무엇보다도 월트가 선보이는 '공중 부양'(!) 등등 이 소설엔 실로 과거 미국의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거기에는 오스터가 지극히 일상적인 것 속에서 지극히 역사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한 의도가 숨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거대한 괴물>과 닮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서 서로를 밀어내기도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되기도 한 월트의 별명 '미스터 버티고'는 인상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가 어린 시절 공중 부양자로 살았던 삶을 상징하는 동시에, 삶이라는 혼돈 속을 헤쳐나온 생애 자체를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를 통해 이리저리 솟구치고 전락하며 인생유전을 보여주는 월트는 오스터의 소설에서 만나는 주인공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참 흥미롭다.
<미스터 버티고>는 평범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범한 삶이 가진 사건들, 인연들, 감정의 순간들을. 감정 과잉을 절제하면서 초월로의 비약도 꿈꾸지 않으면서. 그럼으로써 도리어 평범한 삶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슴 저릿한 직관과 흥미진진한 서사(敍事)는 재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다고 '떠드는', 평범한 눈과 손으로 씌어진 글들과는 다르다. 그러한 글들이 의도하는 건 일종의 '드라이크리닝'이다. 일상에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그러한 글들은 TV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톤으로 일상을 늘어놓는다. '드라이크리닝'을 즐기는 독자들이 오스터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데 간혹 오스터를 안다고 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때 느끼는 것은 곤혹스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