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본 사람들 - 해외현대소설선 2
조엘 에글로프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199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의사 강그리옹>이라는 소설이 모 문예지에 연재되었을 때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 기억이 그의 두 번째 소설까지 이어졌다.

조엘 에글로프의 <해를 본 사람들>은 근래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는 담론 구조가 엿보이는 소설이다. 거대 담론이 퇴조한 지 오랜 지금, 작은 일상의 모습을 깨알같은 이야기들로 모으는 것이 그것으로, 이같은 경향은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된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 같은 영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삶의 총체성’이란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삶이란 한두 가지 원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됐었다. 하지만, 삶이 단편화되고 노마드(nomad)적인 형식으로 변해버린 지금, 그러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거의 없다. 삶이란 하루하루, 시간시간마다 달라지고, 그것을 사유하는 인간의 의식 또한 부유하는 형식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거대 담론이나 그러한 담론 뒤에 버티고 있던 이성(理性)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 다만, 그러한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 인문학의 몰락과 인간에 대한 가치 상실이 안타깝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횡포가 슬픔을 자아낸다.

<해를 본 사람들>은 일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상을 시적 스케치로 잡아낸 작품이다. 일식을 보기 위해 사무실에서 빨리 퇴근하고자 하나 사장이 붙잡고 있어 살인을 저지르는 여직원, 일식을 같이 보기 위해 애인을 기다리다 지쳐 도움을 청하러 남자친구 집에 가지만 거기서 샤워하고 나오는 애인을 보게 되는 청년 등등 ‘일식’이 상징하는 어떤 ‘계기’를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짧은 길이로 흩어져 있다.

무심하게 보면 이들 인물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하지만, 그들은 모두 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람’이다. 이러한 인간 군상을 카메라로 한 컷 한 컷 찍어가듯 묘사한 작가는 아마도 인간사의 분주함을 일식이라는 형식을 빌려 ‘틀’ 속에 넣고 싶었나 보다. 그것이 인간사를 굽어보는 저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유쾌하게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작가는 재치 있고, 기발한 솜씨를 드러낸다. 절제된 문장과 톡톡 끊어가는 어투가 재미있고, 일식이라는 ‘계기’를 생각게 하는 시적 표현도 자주 눈에 띈다. 두 권의 작품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유희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작가의 다음 소설 역시 그러할 것이라 짐작케 한다. 그때는 좀더 성숙한 시각으로 ‘슬픔’까지 담아내길 기대해본다.

사족 하나. 기억이 맞다면, 이 소설의 원서 표지에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낙천적인 표정으로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세상사를 무심하게 대하는 자의 표정이어서 참 마음에 들었었다. 무심하게 세상을 보는 것만큼 부러운 것이 없는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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