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걸어간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아마도 대학에 복학하던 해인 1995년 봄인 것 같다. 윤대녕의 소설집을 처음 읽은 것은. 첫 소설집인 <은어낚시통신>이었다. 그 책의 초판은 이미 발간된 지 1년쯤 지나 있었고, 내가 산 책은 4쇄째였다. 군대 가기 전에 단편소설 한두 편은 읽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 윤대녕이란 작가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그때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은어낚시통신” 같은 빼어난 단편들을 만났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는 동안 산수유와 진달래가 피었고, 봄밤을 맞아 라일락이 난분분 향기를 뿌렸다. 늦은 봄밤처럼 눈과 귀를 시름시름 앓게 하는 소설이었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지 않는 동안에는 취업 준비를 위한 스터디를 했다. 뜻과 맘이 맞는 친구, 후배들과 꾸린 모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면 절반은 윤대녕의 소설을, 절반은 TOEIC과 광고 Copy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해 가을, 두 번째 소설집인 <남쪽 계단을 보라>를 읽었다.


  윤대녕의 소설을 생각하면, 봄이 생각난다.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1995년 봄이 떠올라서기도 하지만, 그의 소설엔 유독 봄을 떠올리게 하는, 멀고 아련한 과거, 헤어진 연인 등의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깊은 밤 저 너머에서 건너오는 목소리 같은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윤대녕이 말하는 인연의 덧없음과 시원(始原)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겼었다.


  <누가 걸어간다>는 윤대녕의 네 번째 소설집으로, 5년 만에 나온 신작이다. 그는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쓰던 중인 2003년 제주도로 이사했다. 굳이 이 같은 사실을 적는 것은, 6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의 절반인 세 편이 제주도로 이사한 후 씌어진 작품인데, 나머지 세 편의 작품들과 완성도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작가의 제주도행(行) 이후 씌어진 작품들은 작가의 초기 소설에서 보여주던 긴장과 깊이를 다시 보여주는 가작(佳作)들이다. 그 작품은 “찔레꽃 기념관”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 “올빼미와의 대화”이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두드러진 것은 ‘나에 대한 낯섦’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선뜩선뜩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하지만, 이전의 윤대녕의 소설과는 다르다.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는 과거와의 절연성을 바탕으로 한 물음이었다. 이번 소설에서는 현재에 대한 고착성이 배경이 되고 있다. 즉, 본질적인 물음,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실존적인 물음, 정치사회적인 물음으로 변화한 것이다.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에서 주인공은 자동차 세일즈맨이다. 아등바등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걷기 시작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걷기 시작한 그에게 아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


  “왜 그 먼 길을 걸어서 온 거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걷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몸 안에, 입안까지 모래가 가득 차서 걷지 않고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어. 그래서 모래를 가득 실은 트럭처럼 나는 무겁고 느리게 걸었어. 걷다 보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고 몸이 가벼워지더군. 걷고 있는 동안 모래가 조금씩 똥구멍으로 빠져나갔나 봐.” - 238쪽.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고, 자기 자신이 삶의 한복판이 아닌 변두리에 서 있다는 소외감과 덧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넓은 세상에 ‘나’처럼 낯선 것도 달리 없다. 윤대녕은 이 ‘나에 대한 낯섦’을 섬뜩할 만큼 잘 그려 보여준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현실의 고단한 삶의 세부까지도 여실히 보여주며 더욱 실존적인 무게감을 전달하고 있다.


  “올빼미와의 대화”를 보면, 작가의 분신인 듯한, 제주도에 살고 있고, 글을 쓰는 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늦은 밤 어떤 사내로부터 계속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는 내 마음속에 깃든 생각까지도. 궁금증은 더욱 커져 가고, 그를 만나러 서울 인근 신도시로 찾아 가지만, 정작 그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진심을 가지고 대화할 사람이 없다고 너무 투덜거리지 마. 그렇다면 자신을 붙잡고 계속 얘기하면 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도 쉽게 말이 통하게 돼 있어. 그리고 또한 나무와 물고기와 동물 들과 대화하는 것도 멈추지 마. 그들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얘기하니까 모름지기 들어둘 게 많아. 모두가 잠든 밤에 귀를 열어두고 있으면 들리지.” - 299쪽. 


  작가에 따른다면, ‘낯선 나’를 ‘낯익은 나’로 만들려면, 나와의 대화를 자주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하다. 또 나무와 물고기와 대화하는 것도. 그런다고 해도 가끔씩은 ‘낯선 나’를 만나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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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09-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내게 두려운 건 나이지요. 얼마전에 읽었지만 <남쪽 계단을 보라> 소설집은 윤대녕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싶더군요.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작품집은 총천연색 컬러 그림 처럼 선명해서 좋구요.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정말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어요. 얼마전에 올해의 좋은 소설에서 "고래등" 을 읽었는데,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 보다 윤대녕씨가 발가벗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윤대녕의 미문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는 많은 것을 버린 것 같아요. 윤대녕 소설을 읽다보면 길 한복판에 나앉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실제의 거리와 상점들을 나열해 놓은 탓도 있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선때문인 듯 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브리즈 2004-09-03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저 님 이야기대로 <남쪽 계단을 보라>가 윤대녕의 대표 소설집이라고 생각해요.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배암에 물린 자국" 등 빼어난 작품이 가득하죠.
또한, 최근의 소설들을 통해 윤대녕이 예전과 달리 서정적인 색채보다는 좀더 리얼한 묘사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플레저 님의 '발가벗고 있다'는 느낌은 바로 그러한 '날것'의 느낌이 아닌가 합니다.
변변찮은 글에 추천도 해주시고, 좋은 의견도 전해주시고..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09-0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까 이 소설을 더 깊이있게 읽을 수 있겠네요..

브리즈 2004-09-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딸기 2004-09-14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95년에 복학하셨으면... 히히 저하고 얼추 비슷한 학번이실 것 같군요.
'은어낚시 통신'은 정말 '빼어난 단편'이었다고 생각해요. 꽤 좋아했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남쪽계단을 보라-- 제목을 들으니 읽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나중에 '은어'였나, 윤대녕의 또다른 책을 읽고나서 저는 몹시 실망했었어요. 그 뒤로 저 작가에 대해서 잊고있었는데 브리즈님 글을 읽으니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갑자기 '빼어난 단편' 몇가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브리즈 2004-09-1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 늦게 간 편이어서 95년에 4학년으로 복학했는데, 얼추, 비슷, 한가요? ^^..

윤대녕의 장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사슴벌레 여자> 등을 읽었는데, 분량과 내용의 무게가 서로 어긋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행이었던 건, 윤대녕의 소설을 처음 읽던 95년이 선연히 기억이 났다는 것이고, 이번 소설집을 통해 윤대녕의 소설이 가진 힘과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에요. 개인적인 소회겠지만, 참 가슴 벅찬 일이기도 하거든요.

딸기 2004-10-0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저는 90학번. ^^

브리즈 2004-10-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예전에도 재롱금지 님(이쪽도 괜찮은데요?)은 비슷한 연배일 거라 생각했었답니다.
좌절금지를 수정하신 아이디어에 빙긋. :)
 


 

 

 

 

 

 

 

 

 

 

 

 

 

 

 

 

 

 

 

 

 

[불면증 2]에서 언급된 야간순찰을 찾다가 이 에칭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마음 따뜻해지는 작품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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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8-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el 님의 서재에서 램브란트의 에칭 작품 한 편을 빌려왔다.
생각컨대,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달리 없다. 하루하루 신산한 삶, 존재의 궁핍에 지칠 때 마음은 생애의 창가에서 저 먼곳을 바라본다.
이렇게 눈 밝은 Kel 님 같은 이가 있어 마음이 잠시 푸근해진다.
 

 

Vertical Horizon_We Are

Title : Everything You Want

Release : 1999

Styles : Alternative Pop/Rock, Post-Grunge, American Trad Rock

Credits : Matthew Scannell - Vocal, Guitar(Acoustic, Elec.), Keyboards /

              Keith Kane - Acoustic Guitar, Vocal /

              Sean Hurley - Bass / Ed Toth - Drums /

              Luiz Resto, Jamie Muhoberac, Mark Endert - Keyboards(Guests)

01. We Are

03. Everything You Want

04. Best I Ever Had

06. Finding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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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_Englishman in New York

Title : Nothing like the Sun

Release : 1987

Styles : Adult Contemporary, Pop/Rock, Adult Alternative Pop/Rock, Album Rock

Credits : Sting - Vocal, Bass, Guitar /

              Branford Marsalis - Sax. / Kenny Kirkland - Keyboards / Mark Egan - Bass /

              Eric Clapton, Mark Knopfler, Andy Summers, Rubén Blades, Hiram Bullock,

              Fareed Haque - Guitar / Ken Helman - Piano / Mino Cinelu - Perc., Vocoder /

              Kenwood Dennard, Manu Katche, Andy Newmark - Drums /

              Gil Evans - Conductor / Gil Evans Orchestra - Orchestration

02. Be Still My Beating Heart

03. Englishman in New York

06. Fragile

 

  관련 마이페이퍼 링크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473122

  관련 마이페이퍼 링크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463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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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8-2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팅의 곡은 참 멋있는 것 같아요. 특히 03의 곡 멋있어요.^^

브리즈 2004-08-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 님은 스팅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곡이 멋있다고 해놓기는 하셨지만.. ^^..
 


 

 

 

 

 

 

 

 

 

 

 

 

 

비가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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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8-24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닥의 돌 틈에 물이 고였네요. 섬세한 그림 좋아요. 어제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네요. 오늘을 쨍쨍한 맑은 날이에요. 저는 제가 걷는 거리에 비가 내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창으로 바라보는 비랑 이렇게 그림 속의 비는 좋아해요. 가끔씩은 우산을 쓰고 걸을 때가 좋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비는 바라볼 때가 제일 좋은 듯해요.

stella.K 2004-08-2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만 참아주세요. 아직은 비오면 안되어요. 강원도가 수해복구에 밤잠설치고 그 좋은 올림픽도 못 본다네요.^^

브리즈 2004-08-2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 님 : 파리에 가보셨나요? 파리에는 저런 돌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답니다. 그 위로 사람도 다니고 차도 다니고요. 바닥의 돌 틈에 물이 스며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얼른 Kel 님 서재에서 퍼왔답니다. ^^..
호밀밭 님 이야기대로 비는 바라볼 때가 좋은 듯해요. 아니면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도요. 물론, 그때는 음악은 안 틀어놓구요. :)

stella 님 : 제가 직접 수해복구에 참여한 건 아니지만,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수해복구을 돕기 위해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하셨더랬죠. 아직 수해복구가 안 된 곳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2004-08-25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