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반지제왕을 읽던 중에.

반지제왕,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서 읽고 있다. 이미 10년전쯤에 처음 소설책을 구입한 이래 수차례 '완독'에 실패한 것은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내겐 이 책이 그닥 흡입력이 없었다. 솔직히 앞부분, 지겨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1편은 버섯마을같이 생긴 귀여운 호빗네 마을만 기억나고, 2편은 거의 기억이 안 난다. 3편은 제법 장관이어서 재밌게 봤다. 스펙터클에 압도되기도 했고.
하지만 (반지팬들께는 죄송하지만) 뭐 그렇게 감동적인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없는 영화'라는 점도 맘에 안 들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것 같지도 않고. 그 영화 만드는데 돈이 꽤 들어갔을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소설가의 '느낌'이 나에게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고 치자. 실제로 나는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어느 한 작가의 레퍼토리를 그렇게 많이 찾아읽은 케이스가 드물 정도로. 하루키 소설의 탄탄한 구도와 문장력도 좋아하지만, 내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외로움' 내지는 '상실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떠나버릴까봐 늘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 중에, 불현듯 다가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 내면에 있는 막연한 그런 두려움을, 하루키 소설을 통해서 확인한다. 하루키가 느끼는 두려움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나한테도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바로 그런 기분 때문에 조금은 두려워하면서 하루키의 소설들을 계속 읽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내게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작가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 갑자기 내게로 확 밀려들어올 때. 그런 면에서 톨킨이라는 작가는, 그동안 내게 별로 전해준 것이 없었다.

제법 긴 여행을 앞두고 있다. 이번 여행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반지제왕 2권 뒷부분이 조금 남았는데, 이 책은 종이커버라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가볍다. 3권을 가방에 꿍쳐넣고 떠나기 위해 2권 남은 부분을 맹렬하게(그래봤자...이지만) 읽고 있던 차였다. 톨킨은 영국의 고풍스런 윤리에 젖어있는 듯하고, 꽤나 늙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글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귀족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냄새는 도대체 맘에 들지가 않는다.
다만 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작가의 감수성 섞인 언어들, 옛이야기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은 맘에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인물은 파라미르. 아라곤은 작가가 완벽하게 설정해놓은 지도자이고, 프로도는 역시나 '설정된' 구도자 혹은 순례자, 간달프는 '설정된' 현자의 냄새를 풍기는 반면에 파라미르에 대한 묘사는 아주 구체적이고 정성스럽다. 어쩌면 톨킨은 파라미르에게 아라곤보다 더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감상들을 궁시렁거리며 읽어나가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다.

And so Gollum found them hours later, when he returned, crawling and creeping down the path out of the gloom ahead. Sam sat propped against the stone, his head dropping side-ways and his breathing heavy. In his lap lay Frodo's head, drowned deep in sleep; upon his white forehead lay one of Sam's brown hands, and the other lay softly upon his master's breat. Peace was in both their faces.

거미귀신이 나오는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거미귀신에게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돌아오는 길이고, 샘은 프로도에게 골룸을 경계하라는 말을 하다가 잠이 든 참이다.

Gollum looked at them. A strange expression passed over his lean hungry fage. The gleam faded from his eyes, and they went dim and grey, old and tired. A spasm of pain seemed to twist him, and he turned away, peering back up towards the pass, shaking his head, as if engaged in some interior debate. Then he came back, and slowly putting out a trembling hand, very cautiously he touched Frodo's knee - but almost the touch was a caress. For a fleeting moment, could one of the sleepers have seen him, they would have thought that they beheld an old weary hobbit, shrunken by the years that had carried him far beyond his time, beyond friends and kin, and the fields and streams of youth, an old starved pitiable thing.

저 구절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읽으면서 결국은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버린' 불쌍한 존재에 대한 애도 혹은 그의 외로움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겠지. 기나긴 소설의 3분의2를 읽어오면서 처음으로 작가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 구절 때문에 이 소설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내 마음대로 단정해버렸다. 자아분열된 골룸 안의 갈등은 문법에 맞지 않는 방정맞은 대사들 때문에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작가는 저런 순간을 예비해놓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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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9-15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반지의 제왕은 소설과 영화 모두 좋게 기억되어요. 소설과 영화가 많이 다르지만요. 예문에서 나온 <반지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책을 읽었는데 1, 2권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영화에서는 골룸이 참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소설 속에서는 피핀과 메리가 참 매력 있었어요. 생기도 있고, 용기도 있고요. 반지 원정대가 뿔뿔이 헤어지는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매력이 있구나 싶었는데. 작가와의 소통, 사실 전 잘 못하는 편인데 가끔은 작가와의 소통이 아니라 낱말이나 한 구절이 확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가 있어요. 그냥 책 한 권에 기억할 만한 문장 하나 정도만 있어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책이든지 좋은 문장 하나 정도는 숨겨져 있더라고요.

2004-09-16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리즈 2004-09-1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 님은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으시군요. 역시.. ^^..

작가와의 소통이란 것은 사실 공감과 관련이 있겠죠. 하지만, 공감한다고 해서 작가와 100% 소통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유행하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덩달아 크게 유행했었는데, 이것도 알고 보면 맞는 말은 아니죠. 지식은 앎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

작가와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전해주는 주제나 관점을 통해 '내 생각'을 얼마만큼 얻느냐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내용이 형편없는 책일지라도 무언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면 반기는 편이죠. 영화나 그림, 심지어는 TV 드라마 같은 경우도요. :)
 

 

Mark Knopfler_What it is

Title : Sailing to Philadelphia

Release : 2000

Styles : Rock & Roll, Adult Contemporary, Folk-Rock, Album Rock

Credits : Mark Knopfler - Vocal, Guitar / James Taylor - Vocal / Van Morrison - Vocal /

              Paul Franklin - Pedal Steel, Lap Steel Guitar / Richard Bennett - Guitar, Strings /

              Guy Fletcher - Keyboards / Jim Cox - Piano, Organ / Glenn Worf - Bass /

              Chad Cromwell - Drums / and ...

01. What it is

02. Sailing to Philadelphia (with James Taylor)

12. Silvertown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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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9-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이 앨범을 들었다. 가슴이 시원해지고 조금씩 지상에서 떠오르는 느낌..
생각해보면, 나는 비행기도 참 좋아한다. 특히, 기내에서 작은 창을 통해 비행기의 날개와 희디흰 구름을 바라보는 것을..

superfrog 2004-09-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sailing to philadelphia 들으면서 일하고 있어요..^^
 
 전출처 : 플레져 > 초록별


James McNeil Whistler,1834~1903,미국

Nocturne in black and gold:The falling r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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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wboy Junkies_Blue Moon Revisited

Title : The Trinity Session

Release : 1988

Styles : Alternative Pop/Rock, Alternative Country-Rock, Adult Alternative Pop/Rock

Credits : Michael Timmins - Guitar / Margo Timmins - Vocal /

              Alan Anton - Bass / Peter Timmins - Drums /

              Kim Deschamps - Dobro, Guitar(Guest) / Jaro Czerwinec - Accordion(Guest) /

              Jeff Bird - Fiddle, Harmonica, Mandolin(Guest) / Steve Shearer - Harmonica(Guest)

02. Misguided Angel

03. Blue Moon Revisited

10. Sweet 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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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09-1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문. 저는 블루문이 좋아요. 한 달에 두번 뜨는 달. 서양에선 블루문을 불가능한 일을 일컫는 말이라 하지요. 저는 블루문을 볼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달력을 넓히는거에요. 내 맘을 넓히는거에요. 그러면 블루문을 볼 수 있을거에요...

브리즈 2004-09-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담동에 가면 '원스 인 어 블루문'이란 재즈 레스토랑이 있어요. 음식이나 술이 비싼 편이어서 자주 가지는 않지만, 기념할 만한 날 가면 좋은 곳이죠. 좋아하는 재즈 라이브를 들을 수 있고, 가끔은 미국이나 일본에서 내한한 내로라하는 재즈 뮤지션들도 만날 수 있답니다.

'Once in a Blue Moon'은 '아주 드물게' '아주 가끔씩'이란 뜻이라고 해요. 이 역시 블루문이 드물기 때문이죠. ^^..
 

 

라이너스의 담요_담요송 (Blanket Song)


Title : Semester

Release : 2003

Styles : Alternative Pop/Rock, Indie Rock, Dream Pop, Indie Pop

Credits : 왕연진 - Vocal, Keyboards, Recorder / 배기준 - Guitar /

              강민성 - Guitar / 이용석 - Bass / 이용희 - Drums

04. 담요송 (Blanket Song)

05. Pic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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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9-09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두 곡 정말 좋아하는데~~~~ 작년에 우연히 라이너스의 담요라는 밴드 이름을 듣고나서 이 곡들을 한참 많이 들었더랬죠. 이제 또 이 노래들이 끌릴 계절이 돌아오니 브리즈님께서는 이리도 기민하게 올리시는군요. 담요송을 들으면 정말 담요 속에 들어가서 한 숨 자고 싶을정도로 나긋나긋해지고 피크닉을 들으면 금방 나가서 햇빛을 받으며 나들이하고 싶어질 정도로 기분이 통통 튄다죠~

superfrog 2004-09-0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담요송 잘 들었어요..

브리즈 2004-09-0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렌초의 시종님 : 오랜만에 뵙네요. 어찌나 열심히 서재를 가꾸시는지 서재가 이제 도서관 수준이시던데요? ^^.. 부러움과 더불어 로렌초의 시종 님의 다양한 관심에 놀라움도 가져봅니다.
라이너스의 담요를 좋아하는군요. 대학 때 후배 녀석 하나가 어느 날 문득 저를 보고 "선배를 보면 참 찰리 브라운 같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찰리 브라운이 아니라 스누피를 두고 한 얘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

금붕어 님 : 담요송 좋지요? 길게 끌고 다니는 라이너스의 담요라니.. ^^..
금붕어 님의 서재도 그렇지만, 여러 님들의 서재에 가끔 가면서도 흔적 없이 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보통은 부러움을 가득 안고서 말이지요. :)

kimji 2004-09-1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요송이군요! 집이 아닌 곳에서 듣는 담요송, 제법 괜찮은데요. 제가 있는 이 곳은 흐린 하늘입니다. 가을비가 내리기 직전의 기분이랄까요. 약간 울기가 내려앉은 공기였는데, 음악 덕분에 기분이 조금 많이 나아집니다. 후후-
잘 들을게요- 고마워요^>^

브리즈 2004-09-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날이 제법 흐리고, 바람도 부는군요. 이런 날씨를 참 좋아하는데요..
"집을 떠나면 인터넷과는 잠시 떨어져 있어도 좋습니다" 모 CF 같다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