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새벽에 눈을 떴다. 세찬 비가 내린다. 밤새 꿈을 꾸었다. 아이들이 시간내에 돌아오지 않아 하루종일 찾아 헤매던 꿈으로 요즈음 정유정의「28」과 김영하의「살인자의 기억법」을 연달아 읽어서인듯 하다. 얼마전 문학동네가 개최한 김영하 낭독회에 다녀왔다. 참여 자격은 예약도서 구입자에 한정했는데 인원이 천명을 넘는다. 콘서트가 아닌 작가 강연회에 이렇게 많은 독자가 모인적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옥수수와 나」를 읽고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내용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노인이 무수히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처럼 첫 문장에서 오는 강렬함과 사실적 묘사는 책의 전체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초, 중반부는 범인을 쫓거나 스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가다가 '순간 멈춤' 하는 스토리 전개는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듯한 재미를 더해준다.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새로운 살인범과의 대결로 자신의 목숨은 잃지만 딸의 목숨은 지켜내겠지하는 다소 평범한 결론을 생각했지만 거대한 반전이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딸 은희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저 치매 노인을 가끔 돌봐주었던 사회복지사였다는 것, 주인공 김병수와 피 말리는 신경전을 벌였던 연쇄 살인범 박주태도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은 꽤 오래 정적으로 이어졌다. 딸이었다고 믿었던 은희도 결국 김병수가 죽인 것일까?  어릴적 술만 마시면 엄마와 여동생을 두들겨패는 아버지를 죽이며 살인자의 길을 걷게 된 김병수의 삶은 불우한 가정환경이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그에게 알츠하이머는 순간의 기억조차 잊어버리는 무서운 형벌이 되고, 결국 연쇄살인자라는 과거의 악이 세상에 공개된다. 

  

낭독회에서 사회자로 나온 가수 이적이 반전있는 결론에 대한 질문에 작가는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인이 1인칭 화자인 지극히 주관적인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불안정한 정서임을 강조한다.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한번의 실수도 없었던 영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시간, 죽음, 노쇠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두번씩이나 반복한 반야심경의 구절, 니체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적절히 묘사된 고급스러운 문체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여름밤 무더위로 잠이 오지 않을 때, 휴가때 읽으면 좋을 책 1순위로 이 책을 추천한다.

  

밑줄 긋기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다행히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                p.9

딸내미와 커피숍에 앉아 팥빙수를 먹으며 이 구절을 읽다가 한참을 웃었다. 딸에게 보여주고 후배에게 카톡으로 사진찍어 보내주며 '대단해!'를 연발했다. 전직 살인자인 노인이 시 강좌를 듣는것도, 강사에 대해 평을 해놓은것도 무시무시한 내용이지만 유머가 곁들여있다. 

내 마음은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습기라곤 없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늘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나를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p 34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p. 57

 

수치심과 죄책감 :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 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p. 105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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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7-3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옥수수와 나>를 재밌게 읽었어요.
9쪽에 있는 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음이 나와요. ㅋㅋ
재밌고 깊은 사색의 시간으로 몰고 갈 책인 것 같군요.
<살인자의 기억법>, 딱 우리 남편이 좋아할 스타일의 제목이에요.
책 뭐 살까, 물어 보면 이 책을 대답해 주겠습니다. ^^

세실 2013-07-31 09:05   좋아요 0 | URL
딸내미랑 팥빙수 먹으며 읽다가 빵 터졌어요~~~
지난번 김영하 낭독회에서 김영하가 정돈된 톤으로 읽어주는데 또 웃음이 나더라구요.
무서운 내용인데 전혀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드는 책입니다.
유머와 지적인 내용이 겸비되어서? ㅎㅎ
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거예요~~ 좀 얇은게 흠!

2013-07-30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31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8-0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책은 읽은 게 없는거 같아요.
나도 팥빙수 억고 싶다~~~~~~~~~ ^^

세실 2013-08-04 13:12   좋아요 0 | URL
김영하 작가 매니아가 많더라구요.
지난번 낭독회 갔다가 천명이 넘는 인파에 깜짝 놀랬답니다.
광주 다음 모임은 청주에서 해요^^
청남대 갔다가 수암골 풀문 커피숍에서 팥빙수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