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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 ㅣ 창비시선 301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평점 :
가끔 시집을 펼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시를 읽을까?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문태준, 나희덕, 정호승, 황동규 시인 정도.....ㅇ
오늘은 나희덕 시인의 <야생사과>를 읽었다.
캄캄한 돌
메카의 검은 돌은
원래 흰색이었다고 해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손에 움켜쥐고 나온 돌,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입 맞추고 만지는 동안
고통을 빨아들여 캄캄한 돌이 되었다죠
내게도 검은 돌이 하나 있어요
그 돌은 한때 물속에서 아름다웠지요
오래전 해변을 떠나며
무심코 주머니에 넣고 온 돌,
그러나 그토록 빨리 빛바랠 줄은 몰랐어요
내가 고통을 견디는 동안
고통이 나를 견디는 동안
돌 또한 나를 말없이 견디어 주었지요
어느날부터인가 돌을 만지는 게 두려워졌어요
돌을 열 수도, 닳게 할 수도 없으면서
돌의 본성이 너무 깊이 박힌 손,
만지는 것마다 돌이 되어버릴 것 같았지요
빛바랜 돌을 바라보며 떠올려봐요
돌이 물속에서 빛나던 때를
검은 물기 위에 어룽거리던 무지개를
그 찰랑거리던 아침이 내게도 있었겠지요
메카의 검은 돌이
오래전 흰색이었던 것처럼
밤 강물이여
낯선 물결이 반짝인다
바로 눈 앞에서, 또는 아주 먼 곳에서
몇시간째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누가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기억의 포말들
밤 강물이여
여기,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그를 미워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곳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나를 깨우러 오지 않고
이틀쯤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마음의 공복만으로도 배가 부른 곳
몸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강물이 깨어나
물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곳
밤 강물이 고요한 것은
더 깊이 더 멀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은 시 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