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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이가 궁금했다. 1949년생, 우리나이로 64세다. 어쩜! 그 나이에 이렇게 말랑말랑 유쾌한 이야기를 쓸 수 있지? 마치 30대 후반의 젊은 작가가 쓴 듯한 통통 튀는 글이 여름 끝자락의 무더위를 날려 버린다.
<상실의 시대>, <1Q84>의 무거운(?) 장편을 쓴 작가 답지 않은 가벼움에 잠시 혼돈스럽기도 했지만 읽을수록 맛깔스럽고, 깔끔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나는 제법 나이를 먹었지만, 나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는 분명 아저씨랄까, 영감이랄까, 틀림없이 그쯤 됐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뭐, 아저씨니까"하고 말하는 시점부터 진짜 아저씨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제 아줌마 다 됐네" 라고 말하는 순간(설령 농담이나 겸손이었다 해도) 그 사람은 진짜로 아줌마가 돼버린다.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만한 힘을 발휘한다. 정말로.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나이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 쯤에서 떠올리면 된다. (p.112)
마흔을 넘기면서 나 자신을 아줌마로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의식하지 말아야 겠군. 옆지기에게 빈말이라도 아저씨라는 호칭도 쓰지 말아야겠다. '젊은 오빠'로 불러야 할까?
서명의 일부분이기도 한 에세이 소제목 <채소의 기분>에서 영화 주인공 앤서니 홉킨스가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는 말에서 "채소가 시시한 존재가 돼버린다"고 우려한 그의 고민에 웃음이 났다. 나도 '듣는 채소 기분 나쁘겠다. 채소를 무시하는거야?'하며 혼잣말을 했는데......
채소, 햄버거. 파티, 금붕어, 아보가토, 굴튀김, 버찌등 일상을 소재로 한 내용들이지만 미국, 유럽등 다양한 곳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풍요로운 삶들이 에세이에 녹아 있다. 책속 주제와 연결된 간결한 동판화 그림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Tip처럼 한 제목이 끝나고 난뒤 두 줄로 쓰여진 글, 예를 들면 "초밥 만드는 사람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회전초밥은 없죠? 눈이 돌아가기 때문일까?" 하는 글은 주제와 전혀 연관성 없는 생뚱맞은 글이지만 잔잔한 웃음을 준다. 일본 서점의 소설 코너에는 남성작가와 여성작가의 글이 구분되어 진열돼 있다니 궁금해지네. 일본여행때 확인해야 할 미션!
에세이를 쓸때 정했다는,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 이런 원칙도 마음에 든다. 에세이는 간결하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런 류의 글이 좋다.
현재의 삶이 어수선해서 긴 글을 읽을 수 없을때,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지만 책을 읽고 싶을때, 마음이 한없이 우울할 때 이 책은 '바카스' 처럼 달콤함과 시원함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