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그의 연주회에 가본 사람은 입을 모아 제르킨의 연주는 레코드로 듣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듣는 쪽이 훨씬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만년에 일본에 왔을 때 연주를 들으러 간 어느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아무튼 연주하다 실수하는 경우가 많아.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았지. 하지만 진짜 마음에 와 닿더라고, 그 연주가 말이야." <제르킨과 루빈스타인>-166쪽

음악으로서 순수하게 우수하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물론 정론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음악을 매개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나 감정을 좀 더 밀접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 뭔가 득을 본 듯한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음악을 듣는 방법이 있어도 괜찮을 듯하다. <제르킨과 루빈스타인>-184쪽

이상한 예를 들어 송구스럽지만 괜스레 전희만 능숙한 남자 같아 신용하기에는 좀 미심쩍은 면이 있다. (개인적 감상) <윈턴 마살리스>-211쪽

그것이 재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만큼 녹아웃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 <윈턴 마살리스>-219쪽

그러한 그 사람에게서만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정취에 일단 익숙해지면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진다. 비속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약을 파는 이가 손님에게 주사를 한 대 놓고 나서 "어때? 젊은이, 기분 좋지? 약기운이 돌지? 다음에 또 돈 가지고 와" 같은 얘기가 되고 만다.
여담이긴 하지만 음악뿐만이 아니라 글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두드러지는 비틂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글의 구석구석에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마약적인 기호 같은 것을 자유롭게 단편적으로, 혹은 집적 부여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문체'를 구사해 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적어도 10년 정도는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스가시카오>-232쪽

어쩌다 텔레비전 연속극 같은 걸 보게 되면 경박한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견디다 못해 곧바로 전원을 꺼버리는 일이 있는데, 상황은 그것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나는 온갖 J-POP의 가사라든지 텔레비전 연속극의 대사라든지 아사히, 요미우리를 비롯한 신문의 기사 문체 같은 것은 일종의 '제도 언어'라고 늘 인식하고 있다. <스가시카오>-234쪽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해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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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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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에 대한 새로운 발견. 김남일의 소설은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 이제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 산문이라는 특성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문체가 참 마음에 든다. 군더더기가 없는 듯하면서도 감정에 호소할 때는 어찌 그리 마음을 싸악싸악 문지르는 비유를 해낼 수 있는지.

평소에도 '책'에 관한 책을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많은 책들이 읽고 싶어진다.

-. 서점에서 새 책을 '소유'하고 난 뒤엔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문장가 상허 이태준의 <무서록>.

-. '책'보다는 '冊'이 더 아름답고 冊답다는 소설가 이태준의 <복덕방>.

-. 식민지 경찰로 근무했다는 낯선 이력의 소유자 조지 오웰의 <식민지의 사계>.

-. 출판사에서 돈을 받아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는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 자만심에 가득찬 의고체의 매력이 돋보이는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 담 너머의 미래를 전혀 설계할 수 없어 대신 발 밑 세계에 탐닉했던 정치범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

-. 60년대 초반 사이공의 평범한 여학생 홍이 광기의 역사에 휘말리는 과정을 추적한 응웬 반 봉의 <사이공의 흰 옷>.

-. 고약한 작가 제임스 핀 가너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

-.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인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

-. 77년부터 82년까지 서울 한복판 산동네에 살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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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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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고향이란, 특히 글쟁이들에게 고향이란, 아침 겨우 때우고 나면 막바로 점심 걱정을 하는 징글징글한 굶주림과 자고 나면 꿈처럼 늘어나는 빚, 그리고 점심시간 물배를 채운 뒤 퀭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난스레 새파란 하늘 같은 것이었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과 나무 이름이었으며, 인공 시절 뒤란 대숲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는 삼촌의 빛바랜 흑백사진 속 잘생긴 얼굴과, 그런 삼촌을 가슴에 묻고 평생 수절한 숙모의 너무도 어여쁜 볼연지 같은 것이었으며, 때로는 장터 마당에 코주부 안경을 끼고 나타나 쿵짝쿵짝 북을 치던 약장수라든지 이마로 못을 박고 안광으로 벽돌을 깨고 입으로 불을 토해내던 천하괴력의 차력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금은 기억마저 희미해져 더욱 아련하기만 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 그게 바로 고향이었다.-13쪽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압고 더 '冊'답다. <소설가 이태준>-22쪽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게 혁명적 정열의 보전이었다.-37쪽

더도 덜도 없이 이 나이는 꼭 그렇게 오는 것만 같다. 이제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을 피해 슬슬 '그늘의 미학'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 문득 허무해지는데, 엎지른 죽그릇 같은 마음 한구석에서 쑥스럽게도 꿈이 새록 솟는다. 면 단위 마을의 공공도서관 관장, 그보다 더 작은 마을의 별정우체국 국장, 하루에 두 차례망 기차가 서는 간이역의 역장, 김치박물관이나 우표박물관 같은 특수 목적 박물관의 학예관, 시키는 사람은 없어도 할 일은 많은 향토사학자, 발품으로 먹고 사는 여행전문기고가......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면서도 가장 보람 있을 것만 같은 직업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45쪽

지난해 장미 이후론 한 번도 물맛을 보지 못한 커튼-46쪽

속도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버리면 안 보이던 것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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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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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온다 리쿠는 <밤의 피크닉>을 집필하기 전, 보행제에 참가해봤던 게 분명하다. 안나의 동생처럼 몰래 흰 체육복을 구해 입고 걸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농밀하게 걷는 동안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리라. 머리로 체득한 철학보다 몸으로 체득한 철학이 더 절절하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었는데, 나도 깊은 생각을 좀 해보기 위해 그들처럼 하루 낮과 밤을 꼬박 걸어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밑줄을 긋다가 발견한 예상치 못했던 버릇 하나. 왠지 오른쪽 페이지, 그러니까 홀수 페이지에만 밑줄이 그어지더라. 나의 뇌는 왼쪽을 읽을 때보다 오른쪽을 읽을 때, 더 팽팽 돌아가나 보다. 혹은 오른쪽에 시선이 머무를 때 감성이 이성을 누르는지도... 다른 책에 비해 유독 밑줄긋기를 한 독자들이 많아 하나하나 다 살펴봤는데, 같은 곳에 밑줄 그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도 반가운 일. 역시 좋은 생각은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다. 시간과 마음, 그리고 요즘 상처받은 '연애'에 대해서도 배울 것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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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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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19쪽

"그렇지만 너희들 뭔지 모르게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이렇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뭐 그런 분위기."-23쪽

수면이라는 것은 고양이 같은 것이다. 시험 전날처럼 부르지 않을 때는 잘도 찾아와서, 잠에서 깨어나면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으면 죽어도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한다.-29쪽

"웃지 마. 소풍 도시락이라고 하면 당연히 비엔나 꼬치잖아."-48쪽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거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60쪽

"다카코는 겉보기는 무심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무심해 보인다기보다 반응이 늦은 거지. 신경전달이 둔해서 얼굴에 감정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아하하."
"이거 정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자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좀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빌어먹을,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하는 식으로."-67쪽

지구는 둥글어서 그것을 누군가가 꼬옥 껴안고 있다.
수평선을 보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든다.-83쪽

"오래된 마을로 그다지 크지 않고 산보할 수 있는 자연이 있는 곳이래."
불쑥 리카가 끼어들었다. 다카코와 치아키는 당황한다.
"뭐가?"
"독창적인 학문이 생겨나는 마을의 조건이."-93쪽

처음 가는 길인 경우 돌아올 때가 짧게 느껴지는 것은 뇌가 이미 익숙해져서 정보처리를 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13쪽

"...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어쨌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뿔싸' 하는 말이었어."
"아뿔싸?"
"응. "아뿔싸, 타이밍이 늦었다.'야. 어째서 이 책을 좀더 옛날, 초등학교 때 읽지 않았을까 몹시 후회했어. 적어도 중학생 때에라도 읽었더라면. 10대의 첫머리에서 읽어두어야 했아. 그랬더라면 분명 이 책은 정말 소중한 책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뭔가가 되어주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분해서 견딜 수 없어졌어. 사촌형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주었던 게 아니었어. 우리 남매의 나이며 흥미 대상을 생각해서, 그때에 어울리는 책을 골라주었던 거야. 사촌형이 책을 주었을 때 바로 읽었더라면, 사촌형이 골라준 차례대로 순순히 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만큼 분했던 일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아."-155쪽

뭐, 생각해 보면 매년 이랬던 것 같군. 행사 당일까지는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우물쭈물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의 웃물뿐. 끝난 후에야 겨우 여러 장면의 단편이 조금씩 기억의 정위치에 자리 잡아가며, 보행제 전체의 인상이 정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177쪽

까치발을 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남자아이도 있지만,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유이치의 그 이성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친구들과의 의미 없는 일상적 대화가 우울해졌을 때, 유이치의 생각 깊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220쪽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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