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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지난해 뉴욕에 머물 무렵, 잠시 센트럴파크로 산책을 나간 M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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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가끔 읽고 있는 책의 줄거리를 조근조근 얘기해 줄 때가 있는데, 나의 요청에 의해서도 아니고, 책 얘기를 하던 중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난처스럽다. 이야기의 첫머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면 지금 M이 하는 이야기가 책의 줄거리인지, 아니면 한 다리 건너 아는 친구의 요즘 사는 얘기인지 분간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날 역시 갑작스레 시작된 M의 이야기는 [인간의 굴레]였다. 사실 그건 딱히 '줄거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냥 한 챕터의 요약이었는데, 회계사무소에 다니는 한 견습사원의 지루한 일상 이야기였다. 사무실과 하숙집만 오가거나 가끔 혼자서 거리를 거닐고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간다는 필립 이야기. 그리고 너나 나 역시 뉴욕 한복판에 여행을 와 있지만 딱히 갈 데라고는 박물관이나 도서관, 길거리 뿐이라 왠지 스펙터클하지는 않다는 류의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뉴욕 꽃미남한테 파티 초대 한 번 못 받은 동양인 여자 둘의 하소연이 그 뒤를 잇고.
그리고 나서 며칠 후였던가. 비오는 금요일 오후. 하루종일 슈퍼마켓에서 사온 군것질거리를 입에 물고 뒹굴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혼자 뉴욕현대미술관 MoMA 에 가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금요일 오후엔 공짜 입장도 가능하고, 얼마 전에 브로드웨이에서 산 메리 포핀즈 우산도 자랑 좀 하고 싶고 해서였는데.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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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과 층 사이에 걸린 저 커다란 그림!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어디였더라 갸웃거리며 일단 카메라만 대충 들이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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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보니 책상 위에 놓인 M의 책 한 권! 같은 그림이다! 그제서야 아까 본 그림이 유명한 그림이었구나 M에게 황망히 떠들어댔다. 오오- 같이 흥분한 M과 함께 책 앞날개를 뒤집어보니 이 그림, 앙리 마티스의 'Dance'였구나. 이 그림, 이윤기 작가의 집에도 복제품이 있다지. 이윤기 작가의 집에 놀러온 노교수가 그림이 참 좋다며 혹시 안사람의 솜씨냐고 물었다던. 그림은 잘 모르지만 이 그림은 참 좋네요 말했다던 노교수처럼, 나도 가만히 보니 이 그림이 참 좋다.
책 표지 담당자가 누구인지 얼굴은 몰라도, 이거 참 기가 막힌 조합이구나 싶다. 책 내용을 한 장면으로 압축하라면 정답은 도무지 이 그림밖에 없을 것 같다. 두 권짜리 묵직한 '인간의 굴레'를 보는 게 지레 겁먹어진다면, 그냥 이 그림 10분만 가만히 들여다보는 걸로 대신해도 되겠다. 모든 게 압축되어 있다. 명작끼리의 훌륭한 조우다.
[인간의 굴레]는 [달과 6펜스]가 주목을 받은 후에야 재조명을 받은 작품. 그런데 두 작품 성향이 비슷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좀 더 스펙터클한 후자가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보다는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가 더 좋다. 이건 왜 갑자기 뜬금없는 순위 매기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