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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근자에 '거침없는 하이킥'을 즐겨보고 있다. 가끔 변두리를 즐겨 보는 이들이라면 이 시트콤의 작가와 피디 이름이 예명으로 된 걸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 기억나는 예명 중 하나가 '서펄벅'이다. 세상에...! 펄벅이라는 이름이 '서'씨 성과 그리도 잘 어울리다니! 내 성씨와는 그 어떤 유명 작가도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고민했더랬다. 전펄벅, 전밀란, 전외수, 전하루키, 전주제... 어쩌면 이리도 혀에서 따로 놀까 싶어 안타까웠지만, 이렇게 내 성과 유명작가의 이름을 대입해보면서 왠지 짜릿한 기분도 들었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 이름 갖고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괜히 작명가도 아니면서 이 이름은 이게 나빠 저게 나빠 쌈마이 평가를 해대는 걸 알고 있을까. 쓰나미가 100번 쳐대도 모르겠지. 괜히 내가 그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삼장법사 같아서 삐죽 웃음도 나더라. 상상의 나래는 언제나 즐거운 법.
'책그림책'을 보면 이런 상상의 나래가 한없이 펼쳐져서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못해 저려온다. 간혹 전시회에 가도 감흥 한 번 못 느껴봤는데 컴퓨터 모니터보다 작은 이 책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많은 걸 느낄 수 있다니... 글자를 보기보다는, 책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그림을 보기를 권한다. 밀란 쿤데라가 아무리 좋아도, 오르한 파묵의 명성이 아무리 믿음직스러워도, 그들의 글을 보기 이전에 그림을 보길 권한다. 글보다 그림이 100배 훌륭하다. 그림 전문가가 아니어서 붓놀림이 어떻고 구도가 어떻고 하는 건 애시당초 모르겠지만, 그림이 주는 상상력은 정말 최고가 아닐까 싶다. '책'이라는 화두 하나로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려냈을까. 저 화가는 아마도 1년에 300권 이상의 책을 읽는 게 틀림없어, 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도 내려버렸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의 그림은 그 어떤 독서가보다, 그 어떤 탐서주의자보다 더 많은 걸 설파한다.
마흔여섯명이나 되는 작가의 개성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상상력은 먼 데 외출시켜놓고 그저 그림의 내용만 묘사해놓은 글들이 몇몇개 있다는 것. 독자들은 단순한 그림 설명이 아니라 그 그림을 받아본 작가들의 상상력을 기대했을 텐데, 조금은 무성의한 듯한 글도 있다. 하기야, 그들도 자신을 제외한 마흔다섯명 작가의 글과 자신의 글이 이렇게 비교될 수 있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그들은 그저 어느 날 우연히 편지봉투 안에 동봉된 그림 한 장을 받아봤을 테니까. 그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서점에 풀리는 날, 그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을 수도 있다. 그 중 뛰어난 작품 순위를 매겨보는 건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즐거운 덤이다. 임금 없는 데서는 흉도 마음껏 볼 수 있다는데, 하물며 작가들 순위 매기고 흉 보는 거야 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 밀란 쿤데라의 글은 단연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그를 워낙 좋아해 콩깍지가 내 눈을 덮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밀란 쿤데라라면 그 정도 콩깍지는 얼마든지 괜찮지 않은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이 책을 덮은 날, 그림을 배워볼까 생각했다. 마침 새해도 됐겠다, 고등학교 때 그림을 못 배워 미대를 못 간 게 못내 서운하기도 했겠다, 그리고 '책그림책'도 읽었겠다... 이보다 더 근사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두고두고 이 책을 펴보며, 글보다는 그림을 보며, 기분 내킬 땐 이젤 앞에 앉아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