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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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00쪽에 있는 글귀 하나. "역서가 좋아 보이면 역자의 저서로 눈길이 옮아가는 법"이라지. 이런! 무릎을 탁! 쳤다. 무릎팍 도사보다 어쩜 그리 독자의 마음을 꿰뚫고 계신지 순간 머리가 쨍 해지는 기분.

이윤기 작가의 책 중 읽어본 것이라곤 "그리스 로마 신화 1,2",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가 술김에 내 집에서 자고 나가는 길에 "그리스 로마 신화 1권"을 빌려가는 바람에, <안 친한 그 친구 + 못 돌려받은 내 책>에 대한 짜증이 애꿎게도 작가에게까지 옮아가 있던 때였다. 나쁜 친구. 차라리 2권을 빌려갔으면 이렇게 텅 빈 마음이 들지 않았을 텐데. 책장을 바라볼 때마다 비어 있는 1권 자리에 화가 나서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했으니 자연히 작가에 대한 관심도 더 이상 커지지 못했으리라. 그 후론, 웬만하면 책을 빌려주지 않는 쪽으로 방향까지 선회했다.

그런데 이 예쁜 제목의 책을 접하는 순간 잊었던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읽을 때 시원시원하고 쉽고 걸지게 써내려가던 그분의 필법에는 이미 매료되어 있던 터였다.

그리고... 아, 좋다.

이런 것이 연륜이고, 이런 것이 애정이구나. 구석구석 밑줄칠 곳도 많고, 책을 펴놓은 채 생각에 잠기느라 책 겉장은 구깃구깃해졌다. 가방에 넣고 다니다 녹차까지 쏟아부었다. 책 한 권이 너덜너덜해졌는데 내 머릿속은 팽팽해진다. 쉽게 읽히는데 생각할 틈도 많다니... 이건 이윤기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필살기일 터.

그래서.

100쪽에 있는 글귀처럼 나는 이윤기 작가의 다른 저서로 눈길이 옮아가버렸다. 운 좋게도 홍대 벼룩시장에 헌책을 팔러 나온 아저씨도 나와 독서취향이 비슷한 모양이다. 이윤기 작가를 되게 좋아해서 그 책을 많이 모았다는 그 아저씨 덕분에 나도 절판된 책들을 여럿 구했다.

무지개와 프리즘. 뿌리와 날개.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에세이 온 아메리카.

역시 실망을 안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려올 때 보았네>를 읽으면서 많은 걸 본 셈이다. 이런 책은 참 고맙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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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품절


"하루 공부한다고 해서 현명함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에서는 멀어진다. 하루 나태하게 군다고 해서 무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명함에서는 멀어진다. 공부하는 사람은 봄 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나날이 자라는 바 있으나,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칼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날이 닳고 있는 것이다." (동악성제)-34쪽

요즘 나에게 이따금씩 악몽을 안기는 말 한 마디가 있다.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는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의 생물학적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뜻일 터이다. 죽고 나서 10년 뒤에 작품이 남지 않는다면 그것이 작가의 진정한 죽음이라는 뜻일 터이다.-35쪽

나는 세월로부터 검증 받지 않은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나에게는 10년 뒤에 쓰레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36쪽

경구라는 것이 그렇다.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경구도 우리를 흔들어놓지 못한다. 그러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읽으면 우리는 그만 소스라치고는 한다. 어느 순간에 내 마음이 그럴 준비를 했던 것일까?-75쪽

나는, 굽은 작대기를 바로잡으려면 반대쪽으로 좀더 구부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88쪽

"생각 없이 사는 일상적 삶, 그것이 바로 악의 근원이다." (아렌트)-89쪽

말맛에 찰기가 매우 부족하다...-92쪽

역서가 좋아 보이면 역자의 저서로 눈길이 옮아가는 법이다.-100쪽

"외국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나이만큼 되는 숫자의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외국 여행이 삶의 외연, 인연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들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 세계로 나갔더니 세계가 당신에게로 오기도 하던가? 풍경만 보고 왔는가, 사람도 사귀고 왔는가?-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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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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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1시 11분, 혹은 4시 44분의 우연처럼 접한 김애란의 소설은, 끈적이며 유머러스한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실, 꽤 재미있다는 몇 편의 리뷰를 읽고 살까말까 고심했었는데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위시리스트에만 넣어놓았더랬다. 형광핑크 반바지를 입은 털 복슬복슬한 남자의 다리라니.. 제목이 '달려라 아비'이니 분명 저 징글맞은 다리는 아버지의 다리일 텐데, 그게 왠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심하고 읽어보고나니 아이고 이렇게 기막히게 글과 그림이 어우러질 순 없겠구나. 왜 그런지는 읽어본 사람만이 알 일. 쉽게 읽히고 군데군데 공감 가는 구절도 있다. 특히 앞에 인용한 11시 11분, 혹은 4시 44분의 우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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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8-2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형 이 재미있네요 ^^ 갑자기 미녀들의 아름다운 모습만 캡쳐했다는 그림이 연상 ㅋ

고도 2009-08-3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럼 제 이상형도 합쳐 놓으면 별거 아닌 게 되는 건가요? ㅋ

다이조부 2009-09-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ㅋ 근데 고도님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저 이상형 만 봐서는 감이 잘 안오네요.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구판절판


그는 사무적이므로, 내게 가끔 성적이다.... 신명조의 말투.-42쪽

그러니 어떤 우연들은 11시 11분처럼, 혹은 4시 44분처럼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120-121쪽

고메라섬 부족은 휘파람으로 된 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높낮이와 길이가 다른 수많은 휘파람 소리를 만들었다. 그들이 휘파람 언어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있는 거대한 협곡 때문이었다.-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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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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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으면, 나도 어서 나이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덤덤하면서도 인생을 달관한 듯한 문투가, 인생 육십 넘어야 비로소 깨우칠 것 같은 진리가, 못내 부럽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두려워지는 때가 있는데, 혹시라도, 정말 외람되지만, 박완서 님이 세상을 뜨기라도 하시면 어쩌나 미리 눈물이 그렁해진다. 아껴읽어야겠다.

여기 이 단편들은 스펙터클한 맛은 없지만 '두부'같고 '싱아'같은 맛이 난다. 쉽게 잘 읽히는 반면 생각할 것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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