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구판절판


나는 '태평양 물이 모두 럼주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할 만큼 럼주를 사랑합니다. -16쪽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나.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먼지였어. 죽어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 사람이라기보다는 먼지인 쪽이 훨씬 길어. 그렇다면 죽어 있는 것이 보통이고 살아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니 죽음을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라고."-57쪽

나는 히구치 씨와 메밀국수를 먹으며 책과 우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랫동안 찾던 책과 만나는 일. 혹은 길을 걸으며 생각했던 책이 때마침 눈앞에 나타나는 일. 내용도 보지 않고 사 온 서로 다른 책들 속에 같은 사건이나 인물이 나오는 일. 또는 옛날에 내가 샀던 책이 헌책방을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일.
이만큼 많은 책들이 사고 팔리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니 그런 우연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복잡하게 얽힌 인과의 끈을 못봐서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책을 둘러싼 우연에 마주쳤을 때 실로 나는 운명 같은 뭔가를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믿고 싶은 사람입니다. -109쪽

"아버지가 옛날에 나한테 말했어. 이렇게 한 권의 책을 들어 올리면 헌책시장이 마치 커다란 성처럼 공중에 떠오를 거라고. 책은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133쪽

맑은 하늘과 비 오는 하늘의 경계점을 본 적이 있는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물방울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고 앞을 바라보면 몇 발자국 앞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지면은 바싹 말라 있다. 눈앞에 맑은 하늘과 비 오는 하늘의 경계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신기한 현상을 어린 시절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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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온우주 단편선 1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되게 찌질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되게 우주적인 사랑 방법이 이 책에 총망라되어 있다. 곽재식은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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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온우주 단편선 1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품절


친구들이 나이가 확 들어 보이는 순간만큼 서글픈 때도 없다. 물론, 내가 나이를 먹는 느낌이 드는 생일이나 새해가 밝아올 때쯤도, 괜히 이날 이때까지 뭘 해오고 살았나 하는 생각에 사무치긴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가 옛날의 그 모습 대신 세상의 바람과 물결에 닳고 닳은 모습일 때의 비감은 그런 사무침을 뛰어넘었다. -11쪽

멕시코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한번 멕시코의 흙먼지를 맛본 사람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평안함을 잊지 못한다."-80쪽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만 남아서 지나간 옛날 일은 실제보다 더 좋게 기억된다고들 한다. 그래서 항상 현실은 힘들고 추억은 더 아름답다고 한다. -188쪽

그녀의 손을 잡을 때, 팔을 뻗어 그녀의 손 가까이로 다가가서 손을 잡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세상을 한 바퀴 돌아 그 손에 마침내 닿기까지의 시간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되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일부러 힘을 주어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나는 앞으로 어지간하면 다시는, 팔을 뻗어 이 손을 잡을 수 없는 거리 이상으로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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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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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잔은 막대기처럼 목에 걸리고, 두 번째 잔은 매처럼 날아가고, 세 번째 잔부터는 작은 새들처럼 마구 넘어가는 것이다. -265쪽

가정생활에서 무언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의 완벽한 불화나 애정 어린 화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부부 관계가 불명확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많은 가정이 단지 완전한 불화도 화합도 없다는 이유로 부부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그 묵은 자리에 수년 동안 머무르곤 한다. -396쪽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객차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그녀와 나란히 온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일어날 자세를 취하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짓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떤 정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점점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455쪽

그는 그녀와 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러한 순간은 독에 오염되어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회환을 남긴 채 실현되어 버린 그녀의 의기양양한 협박만을 기억했다. 그는 더 이상 치통을 느끼지 않았다. 흐느낌이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486쪽

언젠가 그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의지'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에 '사랑'을 넣어 보았다. 그러자 그 새로운 철학은 그가 그 철학을 벗어나기까지 이틀 동안 그를 위로해 주었다. -5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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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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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때 본 것을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특히 학교 가는 아이들, 지붕에서 보도로 내려앉는 회청색 비둘기들, 보이지 않는 손이 진열해 둔 가루 묻힌 흰 빵, 이런 것들이 그를 감동시켰다. 이 빵과 비둘기와 두 소년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다. 소년은 비둘기에게 달려가다 레빈을 쳐다보며 방긋 웃었따. 비둘기는 날개를 퍼덕이며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허공에 아른거리는 눈가루 틈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작은 창문 안쪽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고 뒤이어 흰 빵들이 진열되었다. 레빈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좋아 기쁨에 겨워 울고 웃었다. 그는 가제트니 거리와 키슬로프카를 따라 멀리 돌아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기 앞에 시계를 놓고 앉아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353쪽

레빈이 결혼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레빈은 행복했다. 그러나 일단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 그는 걸음걸음마다 그 행복이 그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걸음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행복하게 떠다니는 보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그 보트에 몸소 앉았을 때 느꼈음 직한 것을 경험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한시도 잊지 말고, 발아래에 물이 있다는 점, 노를 저어야 한다는 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하면 아프다는 점, 보고만 있을 때는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해 보면 무척 즐겁기는 해도 굉장히 힘들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5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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