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역사를 만들다 - 예술이 보여주는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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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은 방학이나 정년 보장이 아니다. 대학 시절 한 은사님은 선생이 된 이유를 ‘평생 젊은이와 함께할 수 있어서’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피 끓는 청춘이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내가 당시 교수님의 연배가 되었다.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으로서의 교사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인지.

내가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 말할 청중이 항상 대기해 있다는 점이 나는 가장 행복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창의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대부분 2천 권이 팔리기 힘들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사는 오천만 명 중에서 단지 이천 명만 아는 이야기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일 수밖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이나 생각을 혼자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자신이 발견했고 생각해낸 것인 양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아는 게 많더라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할 수는 없다. 자칫하다간 잘난척한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교사는 얼마나 행복한가? 호기심이 많고 말 잘 듣는 학생이라는 청중이 있어서 언제라도 당신의 유식함을 뽐낼 수 있다. 아무리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영어 선생이 교과 내용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마구 할 수는 없다. 영어 교과서를 읽어나가다가 ‘돼지’가 나오면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와 수수께끼>에서 읽어서 알고 있던 돼지 숭배문화와 혐오 문화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영어라는 극협하는 과목을 담당하다 보니 아이들의 부담을 들어주고 졸음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는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싶어서 교과서에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메모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신기해했고 즐거워한 적이 많았다.

전원경 선생의 <예술, 역사를 만들다>는 이런 나의 버릇에 최적화된 책이다. 예술과 역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은 두툼한 책이라는 이유로 내 책상에서 한 달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 일단 읽기 시작하니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를 읽고 전원경 선생의 팬이 되었는데 <예술, 역사를 만들다>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쉽고 재미나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유물을 나열하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왜 그런 풍습이 생겼고 왜 그런 유물이 남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역사책이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건 이거니까 무조건 외워! 라는 식이 아니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상한 설명 말이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왜 늘 옆을 바라보는가? 기사도가 발생한 배경은 무엇인가? 구약 성경의 내용은 왜 징벌 위주며,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치고 사나운 것일까? 는 등의 흥미로운 의문에 대해서 자상한 설명이 따른다. 흥미로운 역사와 관련된 예술품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차라리 역사와 예술의 멋진 향연이라는 설명이 더 걸맞다. 역사와 예술을 이토록 흥미롭게 풀어나간 책이 또 있을까 싶다. 무거운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가는 전원경 선생의 필력은 워낙 뛰어나서 이 책에 수록된 많은 사진과 그림 자료에 눈길을 돌리기 어려울 정도다.

좋은 책은 메모를 부른다. 쉼 없이 밑줄을 긋고 잊어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 적어놔야 마음을 놓고 다음 쪽을 넘기게 하는 책 말이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가 그런 책이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다 읽을 때까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참지 못하게 되는 책이다. 남은 분량에서 또 얼마나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슴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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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2-11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잡식성책장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박균호 2017-02-11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해요 앞으로 자주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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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의 재혼 - 나이듦에 대한 공감 에세이
백문현 지음 / 두리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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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교사답게 대체로 고지식하지만 뜻밖에 쿨한 면이 많다. 그녀는 여러모로 신식이고 일반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진보적인 가치관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운전을 할 때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서 실망스럽다. 조수석에서 간섭 질이 대단하다. 그토록 고리타분한 것을 혐오하면서 왜 조수석에만 앉으면 쌍팔년도 다운지 모르겠다. 

조수석에 앉으면 일단 빛의 속도로 내 차 안의 상태를 점검한다. 차의 청결 상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운전자라는 것을 인지한 지 오래라 포기하였지만, 그녀의 좌석이 조금이라도 착용감이 미흡하면 단박에 질타가 따른다. 그녀가 내 차에 타는 순간부터는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 운전기사지 내 차의 주인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내 차 안의 모든 기기의 조정과 세팅은 아내의 권한에 귀속된다. 오디오, 에어컨의 설정은 모두 그녀의 입맛대로 움직이며 나는 단지 운전대만 잡고 있을 뿐이다. 

운전경력이 내가 더 많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그녀는 경력보다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능력이 자신이 더 우월하므로 닥치고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한다. 그녀는 운행 속도, 차선 변경, 온도 조절을 완벽히 통제한다. 나라고 속이 없겠는가? 자존심이 없겠는가? 당연히 숨이 막힐 듯한 독재에 항거했다. 이 차는 내 차이며 내가 운전대를 잡았으니 내 맘대로 운전하겠다고 말이다. 감히 아녀자가 남편이 하는 일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 

하여 내 마음껏 내 취향대로 운전을 하긴 했는데 긴 여정 동안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침묵 속의 레이스를 했다. 참으로 긴장감 넘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백문현 선생이 쓴 <아내와의 재혼>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선생은 아내분의 운전 섭정을 충직한 조언으로 받아들여 적극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의 간섭을 ‘클래식’ 음악으로 여기는 경지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아내와의 재혼>은 30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은퇴한 백문현 선생의 은퇴생활을 담담히 그린 책인데 남자가 은퇴하면 아내의 운전 간섭도 고매한 클래식 음악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러나 아내의 충언을 대놓고 불쾌해한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를 알겠다. 어쩌면 <아내와의 재혼>은 아내를 위해서 10시간 일을 해도 3초간의 실수 때문에 그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꾸지람만 듣는 은퇴한 남자들의 삶에 대한 예행연습이 될 수 있겠다.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러나 대다수가 자기계발이나 돈벌이에 치중한 책이다. 물론 은퇴 이후에도 자기 계발이나 돈벌이가 중요하겠지만 정작 아내와의 관계의 재정립이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남자들이 은퇴 후 신경 써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아내를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기사가 아니고 모셔야 할 봉건 군주로 생각하고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실감했다. 우리가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퇴한 남자로서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예우를 해야 애완견보다 못한 신세가 되지 않는지를 잘 말해준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집을 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아내가 제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우리 집의 제례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라도 하면 ‘감히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함양박씨 가문의 제례 전통을 무시하느냐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어느 추석 때는 송편을 조상님 개인별로 그릇에 따로 담는 것이 아니고 큰 대접에 함께 놓아야 하지 않느냐고 아내가 물었을 때 대노를 했더랬다. 조상님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드시는 것도 아닌데 어찌 큰 대접에 송편을 함께 담아 쭉 둘러앉아서 드시게 하느냐고 말이다. 아내와 예송논쟁을 벌인 것이다. 치열한 예송논쟁 끝을 거쳤는데 오로지 나의 고집 덕분에 우리 조상님들은 여전히 추석 때 개인별 접시에 놓인 송편을 드신다. 

그런데 <아내와의 재혼>을 읽으니 제사를 위해서 가장 수고하는 사람들은 아들들이 아니고 며느리들이니 며느리들의 입장과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를 또 반성하게 한다. 저자 백문현 선생의 가문도 당연히 고유한 제례 풍속이 있지만 고생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배려고 그 뜻을 따른다는 내용은 깊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재미있고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에피소드가 가득한 이 책으로 은퇴자의 삶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는 것이 좋겠다. 당장 그 뜻을 실천하기로 했다. 아내가 주말에 가자는 국카스텐 공연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겠다. 방관적인 관객이 아닌 주인의식으로 똘똘 뭉칭 적극적인 관객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내가 좋아하는 국카스텐 공연을 남김없이 동영상으로 담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긴 공연을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가장 큰 용량의 메모리를 준비했고 오래 들면 어깨가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주는 DSLR과 대포만 한 렌즈를 가져가기로 했다. 국카스텐 멤버들의 숨구멍마저 담아와야 한다. 참으로 비장한 각오로 국카스텐 공연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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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나는 책을 의무감으로 읽은 적이 없다. 오로지 ‘재미로’ 읽었다. 어렸을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것은 ‘혼자서 하는 가장 재미난 놀이’이었기 때문이지 ‘마음의 양식’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있었다고 해도 책을 즐겨 읽었으리라고 장담을 못 하겠다.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 말고는 달리 유흥거리가 없었던 시대적, 장소적 배경이 나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만든 주요한 요인이라고 믿는다. 


숙제로 책을 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드물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고통이 큰 벌은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다. 요즘이 얼마나 역동적인 시대인가? 굳이 멀리 눈을 돌리지 않고 손안의 스마트폰만 터치해도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요즘 아이들이 가만히 앉아서 책을 강제로 읽게 하는 것은 마치 솔제니친이 국외로 추방되는 고통에 비견되는 일이다. 

출판계의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당연한 일이다. 독보적이었던 ‘정보 제공’의 기능도 상당 부분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의해서 빼앗겼고, 과거 독서의 중요한 매력이었던 ‘시간 죽이기’나 ‘유희’로서의 기능은 거의 멸망단계에 이르렀다. 굳이 책을 통하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많아졌고, 책을 읽는 것 말고도 재미있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아졌다. 


오늘의 출판인들은 선배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괴물’ 즉 인터넷을 비롯한 멀티미디어라는 적을 상대해야 하며 이 싸움은 갈수록 힘겹기만 하다. 나만 해도 그렇다. 인터넷보다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고서야 겨우 책장을 넘기는 편이다. 그런데도 책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늘 재미있는 책을 찾아왔던 경험이 다섯 번째 책을 출간한 동력이 되었다. 


이번에 낸 <독서 만담>은 제목에서 충분히 추측할 수 있듯이 실용적이거나, 깊이가 있다거나, 지식이 충만한 책이 아니다. 책을 읽고 모아온 그간의 에피소드와 즉흥적으로 가지게 된 책에 대한 생각들을 담았다. 아내와 딸의 틈바구니에서 꼼꼼하지 못하고, 권위라고는 전혀 없는 책을 좋아하는 가장이 겨우겨우 살아가면서 겪었던 ‘웃기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겨울철엔 군것질거리가 오직 처마 밑에 걸린 곶감이 유일했는데 일찍 잠이 드신 부모님의 코 고는 소리가 커지면 나는 몰래 방문을 열고 나갔더랬다. 곶감을 몰래 먹기 위해서였다. 누나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혼자서 곶감을 따 먹지 않았다. 아랫방에 모여 자던 누나들을 불렀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좋은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었다. 


<독서 만담>에는 웃기는 에피소드와 함께 책 이야기도 있다. 단순히 재미있는 책을 이야기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재미’를 함께 나눴으면 하는 취지에서 쓴 글이지 무슨 거룩한 목적이나 계몽을 위해 쓰지 않았다. 


<독서 만담>은 하나도 실용적이지도, 깊이가 있지도, 수려하지도 않은 책이다. 

책을 수집하고 읽다 보면 이런 웃기는 일도 경험할 수 있구나! 

이런 모자란 남편도 있구나!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웃기는 일도 겪는구나! 

세상에 이런 책도 있었구나! 


이런 정도의 감탄과 함께 재미를 느끼면 원래의 기능을 다 한 책이다. 


이 책에는 재미있고 웃기는 에피소드만 담았다. 세상살이가 고달픈 요즘인데 굳이 책을 읽으면서 까지 우울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짧은 소견 때문이다. ‘재미’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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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신작을 내셨군요. 저번에 책을 보내주셨으니 이번에 나온 책은 직접 사서 읽어볼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박균호 2017-02-02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네 감사합니다...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북프리쿠키 2017-02-06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양철나무꾼님 리뷰타고 왔어요
출판 축하드립니다^^;

박균호 2017-02-06 19:15   좋아요 2 | URL
에궁...고맙습니다....편안한 저녁 되세요.
 
변경의 역사 - The History on Frontier 1679-2015
이상엽 지음 / 이안북스(IANNBOOKS)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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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지 않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1871년에 발생한 신미양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아픔의 역사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단 몇 줄로 기술되어 있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라고 결론지어져 있으며 대다수의 한국인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신미양요는 1871년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의 전쟁이며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올라가는 물자의 통로이자 한양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요충지인 강화도를 미국이 점령했다. 불과 3일간의 교전으로 조선군은 사령관격인 어재연을 비롯해서 240여 명ㅇ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미군 측은 병사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한 말이 전쟁이지 거의 학살이나 다름없는 조선군의 대패로 마감된 전쟁이다. 


남북전쟁으로 습득된 경험과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선 조선군을 지켜줄 것은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뿐이었고 사냥꾼이 포함된 조선군은 죽는 순간까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적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를 떨어야 했다. 지금도 강화도를 탐방하는 일반인들이나 소풍을 가는 학생들이 들리는 필수 코스가 바로 그 당시 역사의 현장 돈대다. 


그 옛날 서양의 무시무시한 화력에 맞서 싸운 조선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기대를 하고 찾지만, 막상 ‘볼 것이’ 없어서 금방 발길을 돌리는 곳이기도 하다. 웬만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유심히 지켜보고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돌려 보기 힘든 곳이 바로 강화도의 돈대다. 돈대란 요즘의 해양 경비 초소쯤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데 소대 병력 정도의 병사가 주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화도에 설치된 돈대는 총 54곳이었으며 숙종 때 관병과 승려 1만 5천 명을 동원해서 겨우 80일 만에 축조되었다. 신미양요까지 갈 필요 없이 축조 당시 때에도 이미 민중의 피눈물이 배어있는 아픔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미 ‘이상한 숲 DMZ’라는 이 땅의 민중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변경을 담는 작업을 해온 사진가 이상엽이 조선의 변경 강화도를 주목하고 렌즈에 담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미 본래의 모습이 상당 부분 훼손된 강화도의 돈대이니만큼 그의 사진은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경외감을 준다든가 극적인 놀라움을 주는 사진은 아니다. 그러나 유명무실해진 돈대와 변방지대를 두루 살피고 사진으로 기록한 그의 이번 작업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 그의 다큐 사진의 매력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사진보다는 텍스트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책을 주로 낸 이상엽 작가가 예외적으로 사진을 중심으로 한 <변경의 역사>를 내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사진집은 시각보다는 생각에 치중하도록 의도됐다고 본다.


<변경의 역사>의 주인공이 돈대이긴 하나 그의 사진의 피사체는 돈대가 아니고 돈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건물보다는,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풍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이상엽 작가는 돈대를 주 피사체로 삼음으로써 돈대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조선 민중들의 아픔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초병들의 시각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보았던 강화도의 풍경과 민중들의 고난을 이해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대에서 바라본 역사의 흔적을 바라보려 한 이상엽 작가의 시선은 매우 옳다. 돈대라는 시설물을 담는다는 것은 민중의 시선이 아니고, 민중들을 핍박한 지배층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수백 명의 조선군을 살해하고 자랑스럽게 기념사진을 남긴 미군의 시선에 가깝기도 하다. 


이상엽 작가가 1871년 그날의 흔적을 빌려 온 것도 그 당시 미군의 승리를 기록하고자 동행한 사진가의 필름이라는 것은 어쩌면 아직 우리에게 대물려진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변경의 역사>에 수록된 신미양요의 생생한 흔적을 담은 사진들은 미국의 시선으로 본 ‘정복의 현장’이라는 것이 현재의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변경의 역사>는 장정이라든가, 사진집의 앞표지와 뒷표지의 이미지를 이상엽 작가가 찍은 사진 위에 강홍구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남다른 훌륭한 자랑거리가 있지만, 신미양요와 조선의 관문 강화도라는 아픈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작업이다. 사진집의 장정과 디자인에 관해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정보나 지식을 담는 책과는 달리 사진이라는 예술을 담는 사진집은 그 만듦새가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간 국내 사진집은 마치 학위논문집처럼 다소 딱딱하고 투박하게 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변경의 역사>의 경우에는 사진집다운 예술적이고 단아하며 독특한 만듦새가 맘에 든다. 잘 만든 사진집이라기보다는 잘 지은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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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균호님,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글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

박균호 2016-03-30 18:42   좋아요 0 | URL
에궁 반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전 잘 지내고 있어요...앞으로 자주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