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의 재혼 - 나이듦에 대한 공감 에세이
백문현 지음 / 두리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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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교사답게 대체로 고지식하지만 뜻밖에 쿨한 면이 많다. 그녀는 여러모로 신식이고 일반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진보적인 가치관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운전을 할 때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서 실망스럽다. 조수석에서 간섭 질이 대단하다. 그토록 고리타분한 것을 혐오하면서 왜 조수석에만 앉으면 쌍팔년도 다운지 모르겠다. 

조수석에 앉으면 일단 빛의 속도로 내 차 안의 상태를 점검한다. 차의 청결 상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운전자라는 것을 인지한 지 오래라 포기하였지만, 그녀의 좌석이 조금이라도 착용감이 미흡하면 단박에 질타가 따른다. 그녀가 내 차에 타는 순간부터는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 운전기사지 내 차의 주인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내 차 안의 모든 기기의 조정과 세팅은 아내의 권한에 귀속된다. 오디오, 에어컨의 설정은 모두 그녀의 입맛대로 움직이며 나는 단지 운전대만 잡고 있을 뿐이다. 

운전경력이 내가 더 많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그녀는 경력보다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능력이 자신이 더 우월하므로 닥치고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한다. 그녀는 운행 속도, 차선 변경, 온도 조절을 완벽히 통제한다. 나라고 속이 없겠는가? 자존심이 없겠는가? 당연히 숨이 막힐 듯한 독재에 항거했다. 이 차는 내 차이며 내가 운전대를 잡았으니 내 맘대로 운전하겠다고 말이다. 감히 아녀자가 남편이 하는 일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 

하여 내 마음껏 내 취향대로 운전을 하긴 했는데 긴 여정 동안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침묵 속의 레이스를 했다. 참으로 긴장감 넘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백문현 선생이 쓴 <아내와의 재혼>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선생은 아내분의 운전 섭정을 충직한 조언으로 받아들여 적극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의 간섭을 ‘클래식’ 음악으로 여기는 경지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아내와의 재혼>은 30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은퇴한 백문현 선생의 은퇴생활을 담담히 그린 책인데 남자가 은퇴하면 아내의 운전 간섭도 고매한 클래식 음악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러나 아내의 충언을 대놓고 불쾌해한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를 알겠다. 어쩌면 <아내와의 재혼>은 아내를 위해서 10시간 일을 해도 3초간의 실수 때문에 그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꾸지람만 듣는 은퇴한 남자들의 삶에 대한 예행연습이 될 수 있겠다.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러나 대다수가 자기계발이나 돈벌이에 치중한 책이다. 물론 은퇴 이후에도 자기 계발이나 돈벌이가 중요하겠지만 정작 아내와의 관계의 재정립이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남자들이 은퇴 후 신경 써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아내를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기사가 아니고 모셔야 할 봉건 군주로 생각하고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실감했다. 우리가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퇴한 남자로서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예우를 해야 애완견보다 못한 신세가 되지 않는지를 잘 말해준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집을 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아내가 제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우리 집의 제례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라도 하면 ‘감히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함양박씨 가문의 제례 전통을 무시하느냐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어느 추석 때는 송편을 조상님 개인별로 그릇에 따로 담는 것이 아니고 큰 대접에 함께 놓아야 하지 않느냐고 아내가 물었을 때 대노를 했더랬다. 조상님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드시는 것도 아닌데 어찌 큰 대접에 송편을 함께 담아 쭉 둘러앉아서 드시게 하느냐고 말이다. 아내와 예송논쟁을 벌인 것이다. 치열한 예송논쟁 끝을 거쳤는데 오로지 나의 고집 덕분에 우리 조상님들은 여전히 추석 때 개인별 접시에 놓인 송편을 드신다. 

그런데 <아내와의 재혼>을 읽으니 제사를 위해서 가장 수고하는 사람들은 아들들이 아니고 며느리들이니 며느리들의 입장과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를 또 반성하게 한다. 저자 백문현 선생의 가문도 당연히 고유한 제례 풍속이 있지만 고생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배려고 그 뜻을 따른다는 내용은 깊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재미있고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에피소드가 가득한 이 책으로 은퇴자의 삶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는 것이 좋겠다. 당장 그 뜻을 실천하기로 했다. 아내가 주말에 가자는 국카스텐 공연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겠다. 방관적인 관객이 아닌 주인의식으로 똘똘 뭉칭 적극적인 관객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내가 좋아하는 국카스텐 공연을 남김없이 동영상으로 담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긴 공연을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가장 큰 용량의 메모리를 준비했고 오래 들면 어깨가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주는 DSLR과 대포만 한 렌즈를 가져가기로 했다. 국카스텐 멤버들의 숨구멍마저 담아와야 한다. 참으로 비장한 각오로 국카스텐 공연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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