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만담>을 낸 계기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섭외를 받고 출연료가 나오는지 방송 출연이 잦은 지인에게 확인했다. 나는 프로작가이니까 당연한 순서다. 작가님이 미리 준 질문지에 답안을 작성했다. 온종일 연구를 해서 내 책의 콘셉트에 맞게 유머코드를 대폭 장착했다. 예행연습도 했다. 교사를 하면서 공개수업을 많이 해본 경험이 있으니 방송쯤이야 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완벽한 방송을 위해서 서울에 일찍 도착한 다음 아지트인 출판사 사무실에서 리허설하기로 했다.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출판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만담을 주고받느라 모범 답안지를 확인할 틈도 없이 방송국으로 출발해야 했다. 출판사 관계자와 직원이 고맙게도 로드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어린 시절 숫기가 없어서 동네 이발관에도 혼자 가지 못한 나를 데리고 가주고 기다려 주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는 촌놈이 아니니까 방송국에서 만난 연기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도 엄연히 방송 출연자니까 말이다. 라디오 스튜디오이지만 규모가 제법 웅장해서 놀랐다. 피디님과 작가님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안하게 맞아주어서 낯선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회를 보는 분과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착석을 했다. 피디와 작가분은 나를 프로 출연자라고 인정을 했는지 특별히 사전 교육이 없었다.


그분들의 기대에 걸맞게 나는 고정 출연자처럼 여유 있게 커피를 들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사회자분은 대본을 충실히 읽는 것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나도 작성해온 모범답안을 말하면 될 일이었다. 방송이란 거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고정 출연 프로그램을 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실전은 달랐다. 예상된 질문인데도 나의 발음은 새기 시작했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말을 하는 기분이다. 간신히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쳤는데 진행자분이 예상 질문 순서를 지키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나는 피의자가 되었고 진행자분은 검사가 되었다. 피의자는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질문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진행자분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예정된 질문을 할 때는 원고만 보고 읽으시던 진행자분이 즉흥적인 질문은 나를 또렷이 응시하면서 나의 진술을 요구하셨다. 밖에서는 큰소리치다가 검사실에 끌려가면 술술 불게 된다고 하던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리가 공백이 되었다. 차라리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범죄의 진상이라도 술술 불었으면 좋았겠다. 


<독서 만담>은 웃기는 책이다. 웃기고 싶은데 진행자분은 웃길 틈을 주지 않는다. 간신히 아내와의 ‘예송 논쟁’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아내가 차례상을 차릴 때 큰 대접 한 곳에 송편을 차례상에 올리자고 하던데 그러면 조상님들이 우르르 둘러앉아서 회식을 하라는 말이냐’고 했다는 말로 진행자분을 웃기는 데 성공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기쁨도 잠시 진행자분은 <독서 만담>에 언급된 많은 책 중에서 하필이면 ‘존엄사’에 관한 책을 집중 공략하지 시작했다. 난 웃기러 왔는데 ‘죽음’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아버님의 별세에 관해서 이야기 해야 했고, 어머니의 병환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야 했다. 


급기야 노인과 의료 복지에 관한 사회 비평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해야 했다. 웃기고 싶었다. 나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노인의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내가 쓴 책이 ‘현대사회와 노인의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닌지 착각하게 되었다. 진행자분이 교수님이라더니 내가 공부를 하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셔서 질문하셨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답변했고 나는 방청객이 되었다. 불굴의 의지로 ‘재미’를 추구한 나의 노력이 얼마나 발휘가 되었는지는 방송을 들어 봐야 하겠다. 


방송은 끝났다. 골프 라운딩을 갔는데 티샷이 연못으로 빠졌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캐디에게 애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쉽게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셨다. 워낙 노련한 분들이니 그 분들의 말을 위로 삼았다. ‘편집의 힘’도 의지가 되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잔을 들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발음에 대한 걱정을 말씀드렸는데 ‘시청자 모두가 내가 경상도 사람임을 충분히 인식했을 테니’ 그만하면 충분하단다. 


스튜디오에서 마시지 못한 커피를 냉수 마시듯이 원샷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출연료를 지급 받기 위한 인적사항을 기재하는데 계좌번호는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서 또박또박 적었다. 다음 차례의 작가 한 분이 스튜디오로 입장했다. 그분에게 부디 신의 가호가 있었기를 바란다. 

KBS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산책> 3월 5일 일요일 밤 11시 5분에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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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2 08: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축하드립니다. 출연료라는 말에 눈이 번쩍ㅋ 인상도 너무 좋으세요^^

박균호 2017-02-22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푸라쿠키님 감사해요

yureka01 2017-02-22 09: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쓰는 거랑 말하는 거랑 작동하는 뇌가 따로 있을 거예요..
글도 잘쓰고 말도 잘하면 제일 좋은데 신은 모든 걸 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주 하다보면 늘어요..ㅎㅎㅎ
초보운전때의 그 버벅거림이었을 거예요 ^^..
아 축하드립니다,...

박균호 2017-02-22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격려 감사해요

cyrus 2017-02-22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녹화 방송이면 프로그램과 시간을 알려주셔야죠. ^^

박균호 2017-02-22 09:11   좋아요 2 | URL
네 방송시간 넣었습니다...감사해요.

야클 2017-02-22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 재미있는게 아니라 페이퍼도 참 재미있군요. ^^

박균호 2017-02-22 09:15   좋아요 1 | URL
에궁...감사해요.

한기호 2017-02-22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그 방송 진행자가 원고를 무시하고 질문하는 것을 즐기시죠. ㅋㅋ 수고하셨습니다.

박균호 2017-02-22 10:09   좋아요 1 | URL
전 식은 땀이...ㅠㅠㅠ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7-02-22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출연료 받으셨으니 다행입니다.
저는 책 나오고 나서 인천의 무슨 방송이라고 하면 알만한 곳
라디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출연료 없던데요..
그렇지 않아도 출판사쪽에서 되레 내게 묻더군요.
출연료 주냐고 물어 봤냐고.
저는 저대로 그럼 안 물어보셨냐고 되물었죠.
오히려 PD 양반 제 책 읽고 싶다고 해서
제가 방송료를 지불한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고 말았죠.ㅠ

질문이 엇나간 것도 PD나 진행자가 균호님 책을 읽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걸 대충 짜집기 해서일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독서 만담> 읽으면 그런 심각한 질문은 안 나오죠.
그 사람네들 바빠서 그렇다는 거 이해는 하겠는데
출연자 입장에선 엄청 섭섭하더라구요.
방송사야 우리가 당신 책 선전해 주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이겠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라도 제 책을 알릴 곳이 없다는 게 좀 아쉽더군요.ㅠ

박균호 2017-02-22 13:28   좋아요 1 | URL
제가 <오래된 새 책> 나올때 MBC에서 외주 촬영 기사를 보내서 우리집에서 4시간 촬영했는데 출연료 없었어요...ㅋㅋ 우리 처럼 무명 저자들은 책을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합니다.

stella.K 2017-02-22 13:37   좋아요 1 | URL
ㅎㅎ 첫 책 땐 다 그런가 봐요.
근데 4시간 씩이나? 저는 1시간도 안 걸렸던 것 같아요.
저도 준비는 많이 하느라고 했는데 외우는 건 자신 없고
엄청 버벅거렸어요. 어느 부분은 정말 턱 막혀 버렸고.
편집하긴 했는데 다시 들어보니 거의 생방송이나 다름 없더군요.ㅋ
맞아요. 제가 앞에 나서는 걸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출판사에서 자료 뿌려놨으니 섭외 들어오거든 어디든 출연하라고
하고 저도 마음 먹고 있었는데 세상 편하게 됐죠.ㅠㅋㅋ

박균호 2017-02-22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시간 촬영했는데 방송 분량은 5분이란게 함정이에요...ㅎㅎ

[그장소] 2017-02-22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애드립 ㅡ 이야말로, 유머의 고수를 나타나는데, ㅎㅎ완전 웃겨요. 후일담이 이렇게 재미지니 자주 낯선곳에 출연하셔야겠네요! 계좌 ㅡ또바또박 ..ㅋㅋ
경상도 사람임이 드러나는 발음 푸하하핫~
뒤늦게 재치가 폭발이네요!^^

박균호 2017-02-22 18:53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네 감사해요.

박균호 2017-02-2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moonnight 2017-02-26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송하게도 난처하셨을 상황을 상상하며 키득거렸습니다^^; 겸손하실 뿐 발음도 답변도 훌륭하시리라 생각합니다. 3월 5일 폰에 입력해두고 기다립니다^^

박균호 2017-02-26 16:55   좋아요 0 | URL
에공...안 들어시는게 좋을텐데....ㅎㅎ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