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어렸을 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다. 언제나 잘 시간이 되면 내 옆에 누워 이야기를 졸랐다. 이야기의 종류는 다양했다. 나 어렸을 적 살았던 시골 이야기, 어디 책에서 읽은 자투리 이야기, 심지어 군대 이야기까지.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모두 열광했다.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내 이야기 창고는 금방 바닥이 드러났고 나는 매일 머리를 쥐어짜며 창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영특한 딸아이는 오늘 한 이야기가 전에도 했던 것이며, 때로 몇 가지 이야기는 짜깁기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그래도 손뼉을 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들었다. 심지어 내 말솜씨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는데도, 신기한 마술이라도 구경하듯이 이야기마다 열중했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심지어 노래 경연대회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참가자가 주목을 받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소설에 비유하는 것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능에서 비롯한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소설은 가장 공을 들여 만든 정교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단순히 이야기만 담고 있지 않다. 작가가 소설에 자신의 삶을 녹여내면서 동시대 사회의 역사, 사건, 문화, 생각을 모두 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아주 풍성하고 생생하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연구한 몇백 년 전 사회의 모습보다 당대의 소설가들이 묘사한 사회의 모습이 더 생생한 이유다


소설은 문학 장르로써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품는다. 이렇게 재미난 소설에 나이 오십이라는 경륜이 더 해지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서사가 태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소설 같은 생애를 살아오지 않았는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소설의 눈으로 청년 시절 읽었던 소설을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급하게 삼켰던 청춘의 독서를 되새김질하기에 좋은 시절이다. 새로운 소설을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빛바래고 홑이불처럼 사각거리는 옛 책을 꺼내놓고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설렘과 감동을 추억하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줄거리를 따라가기 급급해 미처 살피지 못한 소설에 얽힌 뒷이야기, 배경 이야기를 파헤치고 찾아보는 것은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러고 보면 소설은 당대의 사회문화의 특징적인 요소가 총집결된 결정체가 아닌가.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로만 읽기에는 아깝다.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입은 옷과 가방이 어느 회사 제품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는 것처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이 어떤 배경을 통해서 탄생했는지 알아가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이 책에서 다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예로 들어본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로쟈의 범죄와 처형이라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다룬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주인공의 하숙집, 거리, 다리 등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주인공 로쟈를 추적하는 예비 판사의 수사 기법은 오늘날 경찰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다. 그뿐인가, 마치 소설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살인자의 심리가 생생하고 뛰어나게 묘사된다.


우리의 국민 소설 춘향전도 읽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춘향전에는 춘향과 이 도령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공고한 신분제도에 반발하는 민중의 분노가 담겨 있고, 벼슬아치의 행태도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히 느껴진다.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추리를 해가며 읽어야 하는 탄탄한 전개도 재미나지만, 작가가 즐긴 음악과 책이 끝도 없이 등장하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글 속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주는 즐거움에는 텍스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루키가 영위했던 낭만의 시대를 공유한다.

 

이렇듯 소설은 이야기를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 역사, 사회, , 종교,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문화를 읽는 즐거움도 누리게 해준다. 좋은 소설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뛰어난 인문학 서적 여러 권을 읽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경험을 소설 인문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이 소설 인문학이다. 인문학도 따지고 보면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20권의 소설에는 당대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 이야기와 함께라서 나는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한 인문학책들도 재미나고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그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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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15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용하셔서 이때쯤 또 책을 내시지 않을까 했는데 맞았네요.ㅋ
하지만 이렇게 소설 인문학을 내실거라곤 상상 못했습니다.
소설은 비록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늘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맞아요. 나이 50이 넘으면 소설도 다르게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흥미로운 책 같습니다. 찜했다가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2022-07-15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20 1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7-15 18: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책 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목차 보니까 익숙한 책이 많아서 반갑네요. <해변의 카프카> 이야기는 완전 공감이 가네요 ㅋ 책에 나온 음악들도 갠적으로좋아하는 음악이어서 더 재미있었던거 같습니다~!! 10판 인쇄까지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박균호 2022-07-15 20:11   좋아요 3 | URL

네 고맙습니다. 익숙한 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캐내는 것이 이 책의 콘셉트 입니다..ㅎㅎㅎ

감은빛 2022-07-15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스북에서 새 책을 내셨다는 소식을 봤습니다. 축하드리고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아직 오십이 아니라 패스 하겠습...... 농담입니다. ^^

박균호 2022-07-16 05:36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패스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페이스북 친구라니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

감은빛 2022-07-16 06:43   좋아요 3 | URL
페이스북도 감은빛입니다. ^^

mini74 2022-07-15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군대이야기 좋아하는 딸이라니 ㅎㅎ 복받으셨습니다 *^^* 새책 출간 축하드려요. 오십 ㅠㅠ 그렇지요. 뭔가 ㅎㅎㅎ 저도 관심이 갑니다. 하루키이야기 좋아요 *^^*

박균호 2022-07-16 05:36   좋아요 2 | URL
하루키 매력적인 작가이지요. 딸아이는 저에게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귀여워요 ㅎㅎ

서니데이 2022-07-15 22: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상품페이지에 나오는 간략한 소개도 좋지만, 이렇게 자세한 내용도 좋은 것 같습니다.
책을 읽기 전 어떤 내용이 될 지 상상해보게 되니까요.
새 책 출간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번 책도 베스트셀러 되시면 좋겠습니다.
박균호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박균호 2022-07-16 05:37   좋아요 3 | URL
그런가요? 응원 정말 감사합니다 !!!

2022-07-21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22-07-21 18:00   좋아요 0 | URL
아...그런 애로점이 있었군요 ㅠㅠㅠ 모쪼록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래요 !!!

2022-07-24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22-07-24 20:02   좋아요 1 | URL
네네 언제나 즐거운 오십대가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