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 회사에서 만든 작품은 웬만하면 챙겨보는데(이혼숙려캠프만 빼고) 모자무싸는 영~ 땡기지 않는 드라마였다. 일단 나는 배경이 어두컴컴한 드라마를 싫어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밝고 따뜻하고 잔잔한 드라마를 좋아한다. 언제나 자사 드라마를 방송 전 먼저 보는 딸아이는 재미있다고 자부했는데 우리 부부는 딸아이의 식견을 거꾸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다. 역시 초반은 재미없더라. 그냥 보고 있으면 암 걸릴 것 같고. 그런데 7화부터인가 본격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했는데(하도 집사람이 챙겨보길래) 이 드라마는 마치 300쪽 분량 중 200쪽이 빌드업인 고전 소설 같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소중하고 재미나다. 각 캐릭터는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 숨 쉰다.

10화를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드라마 속 대배우 노강식이 오정희에게 역할을 뺏기자, 홧김에, 황동만의 똘끼에 반해서 출연계약서에 서명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가 한 악마의 계약을 떠올렸다. 히트작을 낸 유명 작가이지만 도박 빚으로 끼니를 때우기 힘든 도스토옙스키에게 한 출판업자가 6천 루블짜리 계약서를 내민다. 조건은 1866년 11월 1일까지 즉 일 년 안에 장편소설을 완성해야 하며 이를 지키지 못할 시 9년 동안의 출판권을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글을 쓰는 작가로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계약인데 ‘움직이면 더 배가 고플까 봐’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아마도 노강식과 같은 표정으로 서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영부영하다가 마감일 26일이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제 막 속기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20살짜리 처녀 안나를 만나 무사히 원고를 넘긴다. 이 원고가 <도박꾼> 또는 <노름꾼> 정도로 번역된 작품이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 즉 40대 중반에, 간질병이 있으며, 의붓자식이 딸린 홀아비와 결혼하여 그의 빚을 모두 해결하고 향후 작품활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도박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여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