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깜찍, 반짝, 예쁜 아동 모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요즘의 미디어 세상. 특히나 각종 CF의 카메라 앵글은 이 ‘꼬마’들을 분주히도 쫓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 ‘꼬마’들의 매력에 폭 빠져든다. 나는 언제 이 꼬마들에 들떴을까, 한번 떠올려보자. 베스킨라빈스, 트롬 세탁기 등 여러 CF들이 머릿속을 스쳐갈 것이다. 베스킨라빈스 꼬마 광고의 등장 이후 하나하나 세어보면 꼬마들이 메인인 광고의 수는 족히 20여 편은 되는 것 같다. 또한 트롬 세탁기의 꼬마는 모델료로 단발 2천만 원 이상을 받으며 5~6편의 CF, 뮤직비디오 등에 출현하였고 베스킨라빈스의 꼬마도 지금까지 6편의 CF, 4편의 영화 등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미디어의 수용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급 꼬마는 앞선 둘을 포함해 5명 이상을 꼽아볼 수 있는 등 종으로 보나 횡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은 확연하다.  


<아동 모델 정다빈과 정채은>

    그렇다면 이러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왜 이 꼬마들에게 열광하는가? CF 속에서 이 꼬마들이 나타내는 이미지들을 종합해 나열해보면 귀여움, 예쁨, 순수, 평온, 화목, 풍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아동 모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이미지들은 포화상태의 광고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떨리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다. 그리고 광고의 수용자들은 실제로 떨려한다. 나 역시 이 꼬마들의 미소에 살살 녹아버렸다! 당신은? 당신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철저히 광고주의 시각, 어른의 시각을 거쳐 인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란 비판적 시각은 여기선 잠시 가볍게 접어두자. 어느 광고에선가는 꼬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무도 인위적인 어른의 언어와 한껏 꾸며진 표정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기억들은 잠시 잊자. 아주 잠시만.) 

  그럼 이쯤에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에 편승하여 나 또한 한 명의 아주 어여쁜 꼬마 아이를 소개하려 한다. 여느 아동 모델 뺨치게 예쁘고 귀여운,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처럼 결코 풍요롭지도 평온하지만도 못한, 다시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하얗고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그럼으로써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내 마음을 살살 녹여버린 꼬마아이, 김예슬을. 


<스타급 아동 모델 정다빈(좌상), 정채은(좌하)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의 김예슬. 나는 예슬이가 다빈, 채은 못지않게 객관적으로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5년, 10년이 지난 후에 이들을 비교해본다면... 어떠할까. 앞으로 이들이 각기 나아갈 길의 풍광은 너무도 상이하다. >

  나는 예슬이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에서 만났다. 예슬이는 광주 서구의 한 외곽에서 65살의 할머니, 14살의 오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예슬이가 3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사고의 충격으로 술과 담배에 쩔어 든 아빠도 몇 달 후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 머물러있다. 자연스레 집안은 기울어졌고 생계유지란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예슬이의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은 각종 폐지와 고물들. 예슬이와 예슬이의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이끌고 밤거리를 나선다. 예슬이는 추위 속에서 호호 녹여가며 그 연하고 조그마한 손으로 폐박스를 뜯어 옮기고, 그 작은 몸으로 리어카를 뒤에서 밀고 때론 앞에서 끌어간다. 리어카를 가득 채워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와 오빠가 폐지와 고물들을 정리하는 동안 예슬이는 조촐한, 참으로 조촐한 저녁상을 차린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열심이고, 제법 능숙하다. 

  카메라는 이러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고 헤쳐가고 있는 예슬이의 가족을 차분히 그리고 담담히 응시한다. 할머니가 아파서 못 일어나시는 어느 밤에는 오빠와 예슬이 단 둘이 할머니 몰래 리어카를 끌고 나가기도 하고, 지금은 비어있는 옛 집에 찾아가 찾아낸 엄마의 사진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100원 200원 모아온 용돈으로, 한 시간이나 걸어 시내에 나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기도 한다. 어린 것 단 둘이 리어카를 끌고 밤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한켠 대견하면서도 왠지 불안하고, 엄마 사진을 찾아 밝게 웃는 얼굴의 내면엔 얼마나 뭉클한 그리움이 담겨있을까 안타깝고, 큰마음 먹고 준비한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도 소박하여 마냥 슬프다. 



<오빠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있는 예슬이>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적 감상이 무색하게, 예슬이의 얼굴은 결코 찌들어있거나 어둡지 않다. 왜 그런 상황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웃고 있니, 어째서 투정부리지 않고 묵묵히 집안의 일에 동참하고 있니, 어떻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우울해하지 않고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오순도순 맑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니? 아, 이러한 예슬이의 꿋꿋한 모습을 보며 이 꼬마의 미래에 대해, 감히 희망을 걸어봐도 되려나. 그런데 검고 짙은 스모그 속에서 생각이 뒤엉켜가는 건 왜일까. 

  예슬이네 할머니의 한숨은 왜인지 깊어만 간다. 과거 연골 수술을 받았던 무릎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백내장으로 눈까지 점점 어두워져 간다. 또한 석 달 후면 지금 살고 있는, 초라하지만 아늑했던 집을 비워줘야만 한다. 폐지와 고물을 한 가득 모아 끙끙 힘겹게 고물상까지 옮겨가 팔아도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100kg에 7500원 미만. 과연 새 보금자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으려나. 손주, 손녀가 ‘고등핵교’ 졸업할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무리 아프고 고단해도 계속 일해서 ‘애기들’ 대학 보내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내 가슴을 불안한 먹먹함으로 때린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못 갖고 와도 웃어요. 아이들이 웃겨 븐께....>

  “기분 좋죠. 어떤 때는 (폐지와 고물을 팔아) 4만원도 할 때가 있어요. ... 그때 최고 좋죠. 그때 우리 애기들 천원씩 탁탁 주면 돈 갖고 춤춘디요. 얼마나 좋다고 춤 춘다고요.”

  한 쪽에서는 매일밤 고단하게 고사리 손까지 품들여 올린 4만원의 수입에 더덩실 춤을 추고, 한 쪽에서는 4천만원이란 금액도 1~2초 사이에 가볍고 우습게 나뒹군다. 누군가에겐 4억원도 우습다. 이러한 직접 비교, 이러한 극한 차이. 그냥 통밥만 굴려 생각해봐도, 직관에만 귀를 기울여봐도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끈적히 달라붙지 않는가? 극한 차이, 명백한 불합리함. 혹여 능력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현상이라고 차갑게 말하는 당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당신일지라도 예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을 안타까움까지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바로, 본인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극한 차이의 현상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현실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우리 개개인이 예슬이를 보고 들으며 가슴에서 솟았던 느낌들을 좀 더 열심히 되돌아보고, 대면해주길 바란다. 그저 단순한 안타까움, 일차원적인 찝찝함에 머물지 않길 바란다. 그러한 안타까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세상을 뒤집어엎어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자 외치진 않겠다. 다만 OECD 가입국, 첨단기술 강국, 세계 10대 경제규모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 좀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않고 있음이 (‘못함’이 아닌 ‘안함’이다.) 그저 기이할 뿐이다. 이 땅에서는 과연 조금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그저 요원한 이상일까. 많이도 아니다, 그저 조금,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도 안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끙끙 앓는 노파와 9살 먹은 어린 꼬마를 춥고 깜깜한 밤에 폐지를 주워오도록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다 스러져가는 초라한 집에서조차 내쫓으려 하는가. 이 노파와 꼬마가 적어도 초라한 집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제때에 최소한의 병원 진료라도 받을 수 있고, 학교 교육으로부터 이탈됨을 걱정하지 않고, 일주일에 2~3번만 폐지를 주워와도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갈 수 있는 사회시스템은 정말 그리도 요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냉혹함이 현재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들의 인격적 수준이다. 이는 우리 사회와 우리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가치관과 지향의 문제이다. 주체조차 사물화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푹 절어버린 가치관과 지향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예슬이의 이야기에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혹 ‘사회복지’란 ‘상품’을 ‘소비’해줄 마음은 안드는가? 아서라, 천박하게 뿌리내린 우리 고도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의 소비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임을(‘나’가 ‘진정 나’인지의 문제는 미루어두자). ‘사회복지’란 공공을 위한 ‘상품’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이미 사회주류의 룰을 어긴 상품, 그 태생부터 도태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을 어찌할까. 선진국, 7대 경제대국, 국민소득 4만 달러, 이건희의 삼성, 이명박에 대한 선망과 지지. 10억 모으기, 50평 아파트, 로또, 프로토, 의대, 고시, 대기업 입사로 빽빽이 가득 찬 인생지도. 이러한 생각과 지향에 줄서기한 우리 대다수가 동시에 예슬이를 보며 안타까워함은 심각한 자가당착, 양의 탈을 쓴 자위, 독한 가식이다. 물론 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우리, 단순 일차원적인 안타까움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면 감히 안타까워하지도 말자. 내가 지향하는 세상, 이루려는 삶과 예슬이를 보며 흘린 눈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차를 직시하지 못할거라면 어서 추한 눈물을 뚝 그쳐라. 우리의 자위가 때론 너무도 역겹다. (오바했나? 나 또한 가식의 글을 끝맺는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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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누군가는 80년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군사독재권력과 민주운동 간의 피어린 대결이 숨 막히게 진행된 저 80년대.” 

  그래, 고개가 끄덕여지다가 순간, 세차게 의문이 돋는다. 그런데 그 시절을 과연 ‘피어린 대결’, ‘숨 막힌 진행’으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저들의 피흘림, 숨막힘과 이들의 피흘림, 숨막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무언가 부당하지 않은가. 부당하다. 부당하다. 시뻘건 피의 분한 비린내를 아프게 맡아야만 했고 잔인한 어둠 속에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 죽여만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언제나, 늘, 누구였던가. 

  “지난 새천년 봄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은 1980년대를 ‘관념, 시대, 역사’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현실, 개인, 일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본 걸작”이란 호평처럼 <오래된 정원>은 어두운 시대를 끊임없이 몸으로 부대끼며 견뎌내고 이겨내야만 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현실, 개인, 일상을 치열하게 그리고 있으며 또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끊임없이 진솔한 글로 버무려온 황석영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이기에 한층 각별하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민주활동가 오현우. 17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형을 마친 그는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교도소를 나선다. 세월을 따라 변해 버린 가족과 사회의 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허나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늘 함께했던 한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 며칠 후, 현우의 누나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혹시 누님...... 한선생 주소 아세요?
  내가 말했지? 편지 갖구 있다구. 너, 괜찮겠지......
  누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주 오래 있다가 얘기해줄려구 그랬는데...... 그 사람, 죽었어.
  나는 숨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서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17년 동안 그려왔던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1980년, 군부로부터 도피생활을 하던 오현우는 그를 숨겨줄 사람으로 한윤희를 소개받는다. 이제 막 봄의 문턱, 포근하고 흙냄새 풍기는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갈뫼,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윤희. 현우는 윤희와의 갈뫼 생활 속에서 마치 딴 세상에라도 온 듯한 따스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며, 시대적 사명감과 평온한 현실안주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우는 결국 갈뫼를 떠나, 아니 윤희를 떠나 새로운 활동을 펼칠 결심을 한다. 윤희는 그를 잡고 싶지만 잡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고 17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다. 한 명은 감옥이란 ‘그 안’에서 한 명은 ‘이쪽 밖’에서. 다시 현재. 윤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갈뫼를 찾아간 현우. 그는 윤희가 남겨둔 일기, 그림과 함께 17년 전의 과거로 빠져든다. 과연,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꿈꾸었던 그들의 오래된 정원을 찾을 수 있을까?

  80년대에 태어난 나는 그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지나왔던가. 물론, 아무런 어두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 시대의 어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앞서 나는 어떤 어둠도 인식조차 못했었다. 난 그저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80년대를 동심에 한껏 즐거웠음으로만 기억할 뿐 80년대의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공교육의 기간을 거치면서도 누구 하나, 어느 교과서 하나 80년대의 사회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에 그 시대와 나와의 단절은 공고하게 지속됐다. 아니, 남 탓만해서는 어찌하랴. 한 때는 시험 성적이, 한 때는 군대가, 한 때는 취직만이 인생의 거진 유일한 초점이었기에 80년대의 사회는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지금 역시. 

  너무도 어렸기에 인식조차 못했던 80년대의 어두움. 나이 스물이 훌쩍 넘고 어른이란 표딱지를 달고 있는 지금, 여전히 8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 이 200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너무 어리기’때문일까?

  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간 사람들이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타인의 죽음에 빚진 것이며, 우리의 풍요는 타인의 가난에 힘입은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잔디밭에서 음악실에서 또는 다방에서 빈둥거리던 바로 그 시간에 똥물세례를 받으며 구사대의 발길에 차이던 동일방직 여공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무엇이었겠으며 또 무엇이 되었겠는가? 그들이 노동하며 흘린 땀으로 내 몸은 자랐고, 그들이 입술을 깨물며 흘렸던 눈물로 내 영혼이 성숙했다. 그들의 슬픔과 눈물은 내 존재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고통의 빚을 지고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티없는 행복을 짓밟고 서 있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우리와 피부색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의 비참한 빈곤 위에 터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나는 김상봉의 이 말이 왜 우리가 우리와 상관도 없던 과거와 관계를 맺어야하며, 왜 황석영이 굳이 한 시대의 진실을 600여 페이지 분량의 글로 애써 써내려갔는지에 대한 현답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어렸을 때는 ‘너무 어려도’ 되었지만 아직까지 ‘너무 어리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체험과 기억이 직접적으로 없는 경우일지라도 우리는 문학을 통해, 영화를 통해, 음악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하늘을 날아보았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보았으며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으며 비극적인 사랑에도 빠져봤다. 경험은 간접적이되 감각은 비교적 생생하다. 상상력의 힘을 10억 모으기, 메이커 아파트 구매, 귀족적 문화의 향유, 로또 1등 당첨 등에 모두 쏟아버리지 말고 <오래된 정원>에 한번 ‘투자’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8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80년대생들이여! 80년대 당시엔 지금의 나, 당신,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인 20대였을 오현우와 한윤희. 우리들의 부모님, 삼촌, 이모와 같은 세대의 또래로서 동시대를 살았을 오현우와 한윤희. 어째서 서로 사랑했던 현우와 윤희는 서로의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그토록 긴 시간을 이별해야만 했는가? 내가 연인과 떨어져 소식도 모른 채 17년을 감옥에 가있을 수 있을까? 현우와 윤희를 이별하고 고뇌하게 만든 80년대에 우리 부모님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그 80년대엔 우리 부모님의 연애 또한 힘겨웠을까? 나와 나의 애인이 80년대에 연애를 했다면 어떤 장면들이 가능할까? 부디, 상상력의 힘을 뻗쳐보자. 부디, 오현우와 한윤희의 슬픔과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윤희의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누님에게서 전달받은 마지막 편지는 구십육년 여름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네의 마지막 글귀를 기억한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눈물이 떨어진다. 가슴 속 파장이 퍼지고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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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3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건,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을거라 믿는 근거가 되죠.^^
가슴 아픈 우리 역사~~~ 80년 광주에 빚진, 산자의 죄의식도 갖고 있어요.
영화는 광주에서조차 한주만에 내려서 못 봤어요.ㅜㅜ

Arm 2008-07-01 23:30   좋아요 0 | URL
역시나 황석영 선생님의 냄새가 배어있는 책이 영화보다 많이 더 좋았어요!
책이 영화화되면 그 둘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아요-
순오기님이 바라시면 영화파일 보내드릴게요! ^^
아, 그런데 광주에 사시는군요- 아, 광주...

순오기 2008-07-02 00:0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광주댁'으로도 통한다죠.
결혼 후 왔으니까 올해 20년째...자칭 '광주홍보대사'로 살아요.^^
 
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의 고도자본주의·소비사회에 불만을 품고 고민하는 당신에게 띄웁니다.

  똑똑, 혹시나 당신 마음의 문을 두드려봅니다. 가끔은 당신의 어깨가 그저 축 처져만 보이는군요. 무엇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나요? 이따금 당신의 얼굴은 왜 이리 어두워 보이는지요. ‘세상 고민혼자 짊어졌냐!’란 말을 들어보지 않았었나요, 그것도 여러 번이나? 그렇다면 혹시, 제 멋대로 추측해봐도 될까요? 당신은 현실 불만자, 당신은 이상을 좇는 자. 다르게 말해보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

  개인의 온전한 생존조차도 그닥 여의치 않은 이 정글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정답’인 이 고도 경쟁주의 사회에서 나 자신만이 아닌 세상에 대한 고민까지도 품은 당신. 아, 반갑습니다. 이런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이런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당신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역시나 괜히 어깨가 처지고 얼굴에 그늘이 진 게 아니었군요. 세상에 대한 고민이라, 세상을 바꾼다... 아, 쉽지 않죠? 심장을 쿵쾅이게 하는 마음 속 불만과 추상적인 이상향을 가슴 속에 품고있음은 확실한데 구체적으로 나아갈 길의 방향과 거리의 선정, 그에 대한 확신은 왜 이리도 어려운지요. 또한 우리는 그간 얼마나 수많은 과오들을 보아왔던가요. 성찰없는 확신으로 자신의 이상을 ‘정답’ 나아가 ‘선’으로 착각하여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소인배들을, 결국엔 자신에 취해 거대담론형 구호들만 내 목 찢어져라 네 귀 찢어져라 외쳐대는 소인배들을. 긴장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이상이 소중한 만큼 우리도 그러한 과오에 빠져들기란 너무나 쉽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세상에 대한 고민이라, 세상을 바꾼다...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쩌면 좋을까요. 방법도 모르겠고, 역량도 부족합니다. 무언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괜스레 초조해지고 가슴이 막막합니다. 차라리 세상에 대한 이런 불만, 이런 희망을 품지조차 않았던들 이렇게 한숨짓고 있지 않아도 됐을텐데요.

  그런데요 여기 ‘즐거운 불편’이란 책이 한권 있습니다, 희망을 가려버리는 불만과 욕심과 초조의 그늘 속에 움츠리고 있던 저의 어깨를 토닥여준 책이. 이 책의 저자는 후쿠오카 켄세이 씨입니다. 그는 대량소비사회의 문제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소비사회의 병폐를 넘어서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의 자발적인 실천을 다부지게 계획하고, 해나갑니다. 책 ‘즐거운 불편’은 바로 이러한 켄세이 씨의 소박하지만 치열한 실천기록입니다.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그는 오늘날의 대량소비사회에 불만을 품고 고민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거의 같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불만이 있고 바꾸고 싶어 고민하고.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그는 우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란 고민에만 눌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담담히, 실제로 세상을 바꿀 실천에 임합니다. 설사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일지라도, 국자로 강물 퍼내기 일지라도 그 ‘절망적’ 현실이 그에겐 그닥 중요한 게 아닌가 봅니다. 그는 그저 담담히 바가지에 물을 채우고 채워나갑니다. 그것도 고행적 수행의 자세라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도 홀로 기쁜 마음이 아닌 더불어 기쁜 마음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계획들을 적어내려 갑니다.

- 자전거 통근  - 자동판매기 물건을 사지 않는다  - 제철채소나 과일이 아닌 것은 먹지 않는다  - 커피,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 엘리베이터, 이불건조기, 다리미, 무선전화기, 티슈, 샴푸, 린스, 식기용 세제를 쓰지 않는다  - 도시락 갖고 다니기  - 병, 우유팩, 일회용 접시는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다  - 목욕하고 남은 물은 대야로 세탁기에 퍼 담는다  - 음식찌꺼기는 퇴비로 활용한다  - 고장이 나도 새로 사지 않고 수리해서 쓴다  - 쌀을 무농약으로 자급한다

  어떤가요? 죽 훑어보니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는 실천계획들이 참 소박하다는 느낌에 웃음도 나오던걸요. 어떻게 보면 좀 시시하기까지도 하고요. 그러나 켄세이 씨의 실천기록을 읽어보면 그런 소소한 실천들 속에 깊은 사유와 성찰, 진중한 치열함과 진솔함이 담겨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리고 그 산물인 대량폐기의 더미 위에 세워진 현대문명이, 이대로 가다가는 환경파괴나 인구폭발, 식량부족, 자원과 에너지 고갈 등의 위기에 휘둘리고, 마침내는 파탄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감하고 있는 터이다.”, “정신적 수양을 쌓은 종교인뿐만 아니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위협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그러한 생활을 선택하고, 그로 인해 이전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현재 무엇보다 급선무다.”, “이 ‘즐거운 불편’의 실천과 대화를 통해서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지금 문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취해 보면, 그때까지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대화 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있다.”

  저는 줄곧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하면 논리적으로 결점 없는 높은 수준의 탄탄한 이론이나 결연한 의지의 선구자들, 민중의 거대한 물결 등만을 떠올려왔었습니다. 그래요, 물론 중요하겠죠. 그러한 힘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써내려 가겠죠. 하지만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탄탄한 이론을 세울 실력은커녕 이미 제시된 이론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결연한 의지 가득찬 선구자가 되기엔 나란 존재의 그릇의 크기, 수없이 보아온 나의 치사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스스로를 선구자로 생각함은 엄청난 기만이 됩니다. 민중의 거대한 물결이라 함은 직접적으로 치열하게 참여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5·18항쟁을 되돌아보고 오늘날의 반전시위에 가담해 보아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켄세이씨의 ‘즐거운 불편’과 같은 길이라면 어떨까요? 그 시시해보이기까지 하는 실천계획들과 소소한 일상 속에서의 철학이라면 어떠할까요? 고통 속에 독야청청이 아닌 기쁨 속에 평범한 다수가 함께 할 수 있는 실천의 길이라면 어떠할까요? 저는 저의 무력감과 절망감이 한층 덜어짐을 느꼈습니다. 나도 고민의 제자리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실질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란 자신감. 소걸음일지라도 천리를 갈 수 있다는 희망. 이 ‘즐거운 불편’의 길이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만큼 훨씬 어려운 길일 수 있고, 소소하게 보이는 만큼 더욱 크나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길이리라 믿습니다. ‘즐거운 불편’의 실천과정에서 켄세이씨가 겪은 실천의 의미에 대한 고민과 사유의 나아감, 자기스스로와의 그리고 가족 및 주변과의 갈등과 그 갈등의 해결해나감 등의 너무도 실질적인 실천의 이야기들이 당신의 처진 어깨와 그늘진 얼굴에도 희망으로 다가가길 바래봅니다. 당신이 품은 세상의 불만을 넘어설 수 있는 의미있는 실천의 길의 제시가 되길 바래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소비문명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것들 중에 더 없이 소중한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할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결과, 당신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풍요로워졌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이다.” - 후쿠오카 켄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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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8-02-2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지 잘 받았어요. 저에게 쓰신 거 같았어요.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 동네 친구집에 마실온 기분입니다.^^ 글을 제대로 읽으면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그게 즐거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어요. 앞에 놓인 일들에 순간순간 대면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먼얘기를 가까이 가져오는 감수성과 자세가 필요한 거 같아요.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서평단 알림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단 도서]
  우연찮은 기회에 김병종 화백의 ‘라틴화첩기행’을 손에 쥐게 되었다. 겉표지를 살핀 후 스르르 책장을 넘겨본다. 경쾌하고 선굵은 그림들이 가득하다. 내 머릿속, 낯설음과 미지의 신비감으로 희미하게만 그려지던 남미. 아! 이 책은 그러한 남미의 미술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로구나! 그런데 어쩌나. 그림에 대한 조예가 턱없이 부족한 나에게 남미의 그림이라니? 물론 서구 중심의 사고에 짙게 길들여짐에서 비롯된 발상이겠지만, 서구의 유명한 명화 감상조차 서툰 내게 라틴 그림이라니, 무언가 한층 더 어색하고 어려워만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책이 아닐까, 과연 이 책이 내 머릿속 희미한 남미의 이미지를 한층 확연하게 그려줄 수 있으려나, 의문이 줄을 잇는다. 혹시 이 책을 얼핏 딱 보고 나와 같은 의문을 품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막상 책을 제대로 펴보시라! 이 책은 전문가적 입장에서 단순히 라틴의 미술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그러한 오해는 ‘화첩기행’이란 단어의 뜻풀이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먼저 전적으로 ‘기행’에 무게를 두라. 이 책은 김병종 화백의 남미 여행을, 그 여행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과 그림이란 그의 ‘언어’로 표현한 기행문이다. 즉, 책에 실린 많은 그림들은 남미 작가들의 작품이 아닌 김화백이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경쾌한 언어인 것이었다. 글만이 아닌 글과 그림으로 쓰여진 기행문, 그것이 바로 ‘화첩기행’이다. 괜한 뜻풀이의 오해로 책장을 덮어버리지 말고, 용기내어 책장을 넘겨보시라. 라틴의 음악이, 문학이, 미술이, 자연이, 역사가 당신을 향해 손짓한다.

  김화백의 라틴화첩기행은 크게 여섯 장으로, 그가 지나온 국가인 쿠바,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순으로 구성되어있다. 쿠바에서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흔적을 좇아 쿠바 재즈에 취하고, 허밍웨이가 드나들던 카페와 머물던 집들을 방문하여 그를 회상하고, 쿠바의 연인 체 게바라와 그의 정신적 사부인 호세 마르티의 족적을 따라가며 다시금 혁명을 떠올린다. 멕시코에서는 벽화운동의 기수였던 디에고 리베라와 페미니스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을 둘러보며 삶을 반추해보고, 혁명기념탑을 찾아가서는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만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환상문학의 대가 보르헤스가 걸었던 거리를 걸으며 그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보고, 탱고의 발상지와 유명 탱고극장들을 찾아 온몸으로 쓰는 시 탱고에 몸을 맡긴다. 브라질에서는 삼바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서 직면해보고, 코르코바도 산 정상의 거대한 예수상의 광경에 압도당하면서도 예수상 뒤편으로 펼쳐진 세계 최대의 빈민촌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칠레에서는 피로 얼룩진 현대사를 작품에 투영시키는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 불과 얼음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칠레의 풍경에 되그려본다. 마지막 여행지 페루에서는 잉카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와 공중도시 마추픽추의 광경에 감탄함과 동시에 서방세계의 야만으로인해 조락해버린 잉카의 후예들에 가슴 아파하며,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속의 리마 해변을 거닐며 희망과 고독과 절망에 대하여, 그 모든 것들의 바스러짐에 대하여 긴 생각에 젖는다.

  어떠한가, 라틴의 손짓이 느껴지지 않는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디에고 리베라, 로맹 가리, 파블로 네루다 등등이 그저 낯설기만 하다고? 괜찮다, 상관없다. 나 또한 그들이 그저 낯설기만 했으나 이 책을 통해 그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호감을 갖고 친해지게 되었으니, 영화를 찾아보고 소설을 읽고 시와 그림을 검색해가며. 이렇듯 이 책은 김화백이 여행길을 통해 만나고 느낀 남미의 음악, 문학, 미술, 자연, 역사를 글과 그림을 통해 독자의 가슴에 나누어주려 한다.

  물론 남미의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고 남미인들의 낙천성을 정말 ‘낙천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가능하겠으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기행문이란 것, 그 사실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블랙커피를 한 잔 내린다. 그 향. 그 맛. 그 내음. 그 울려퍼짐. 오늘은 왜인지 남미의 뜨거운, 정열의 태양이 느껴져 지그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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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초회 한정판 (3disc) - 본편+부가영상+OST+엽서 4종
허진호 감독, 황정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경고 



오늘 영화 <행복>을 봤다! 아, 개봉 당시 그렇게나, 정말 정말 그렇게나 보고 싶었는데... 기어코야 오늘, 드디어 <행복>이 출시된 것이다! 밤샘 당직 근무의 여파로 침대에서의 잠이 너무도 간절한 절박의 시각이었으나 잠에 대한 욕심이 <행복>에 대한 설렌 기대를 누르지 못함은 당연지사였다. 자자, 숨죽인 가운데 숨가쁘게 플레이버튼이 눌리고, 드디어 시작이다~

여기저기에서 들어왔던 얘기대로, 영수(황정민)는, 나빴다, 못됐다, 지독히 이기적이었다. 영수는 은희씨를 배신한다. 배.신. 이 두 음절 속에 담긴 그 잔인한 칼날. 배신에는 엄연히 가해자-피해자의 구조가 설정되어지게 마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각기 아픔의 색상이 다를지언정, 즉 가해자 또한 마음의 상처를 입을지언정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아픔의 깊이 차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 칼로 베는 사람의 고뇌와 칼에 베이는 사람의 고통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미 ‘배신’만으로 피해자 측은 비틀거리게 된다. 그런데, 은희(임수정)씨는 어떠한 사람인가? 폐병과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싸워오며 늘 죽음을 목전 가까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보살핌이 정서적일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필히,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람, 그러한 자신에게 오래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보장해주던 ‘희망의 집’을 영수와 함께 꾸려갈 희망을 좇아 박차고 나온 사람, 이렇게 말해버리면 은희씨에게 미안하지만, 약한 사람. 그러하기에, 은희씨가 그러한 사람이기에 영수의 배신은 더욱 아프고 아리게 다가온다. 싸한 아릿함. 은희씨의 비틀거림의 진폭이 걱정되어 내가 먼저 쉬이 좌절해버릴 것만 같다.

또한 아픔의 수용과 치유를 더욱 어렵게 하는 건 배신의 과정에 있다. 영수는 배신의 과정 속에서 비열하고 소심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본인의 마음속에선 이미 은희씨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었음에도, 아니 적어도 은희씨와의 관계에 대해 결심을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영수는 은희씨 앞에서 그저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그러한 서늘한 고백의 용기를, 과중한 부담을, 목젖의 찢어짐을, 터질 듯 한 눈물을, 그러한 잔인한 책임을 은희씨에게 떠넘기려고만 한다. 그저 슬슬 눈치만 보며, 그저 쌀쌀 눈치만 주며.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입 밖으로 먼저 꺼낸 사람은 은희씨가 되고 만다. 오, 할렐루야! 이런 기적이! 이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물론 얼핏 외관상만으로의 뒤바뀜이지만.)! 영수는 아마도 그런 생각으로 자위했을 것이다. 물론 영수도 마음 아팠겠지, 잠 못 이루고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겠지. 허나 그는 은희씨의 상처, 아픔, 눈물을 생각하기에 앞서 본인이 상처를 덜 받기만을 일순위로 바란 것이다. 본인이 상처를 덜 받음으로써 은희씨는 상처를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더 받을 것임에도... 이렇게 그의 배신은 고차원의 배신으로 승격되고야 만다.

아, 그러나, 그러나 어찌하랴. 과연 어찌할 수 있을까. 낭만적 사랑이란 것의 불완전한 속성을, 인간이란 존재의 불완전한 속성을, 한껏 꿈을 꿀 수는 있으되 늘 꿈과 현실 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괴리를, 우리의 사랑이 한껏 빛나고 영원하리라 믿는 ‘꿈’과 사랑이 시간을 타고 시들시들 변해만가는 엄연한 ‘현실’의 차이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영화 ‘봄날은 간다’ 중)라고 간절히 외칠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어떻게 변한다. ‘꿈’의 눈으로 영수를 볼 때엔 속 시원하게 비판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현실’의 눈으로 영수를 볼 때엔, 과연 어떠할까. 앞서서 난 꿈의 눈을 통해서는 영수를 마구 비난했지만, 현실의 눈을 통해서는 그를 마음 놓고 욕하고 때릴 용기가 차마 솟질 않는다. 현실의 사랑에 있어서는 나 또한 그와 같이 배신하고, 믿음을 짓밟고, 지독히 이기적이고, 충분히 비열해질 수 있음을, 그러한 가능성을 가득품고 있다는 ‘현실’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에. 현실의 사랑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인정하긴 싫더라도.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에 결국 세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듯, 영수를 향한 손가락질은 결국 나 자신, 우리 자신에게 닿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난 은희씨를 떠나간 영수가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 흔들리고 무너져내리기보다는 그의 클럽 사업을 통해 노후 자금 4억7천만 원을 문제없이 모아가고 그의 ‘애인’과 고도 자본주의화, 도시화된 풍족하고 사치스런 일상을 착실히 꾸려가며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은희씨를 떠올리고 걱정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영수의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러한 영수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을 더욱 차갑게 꿰뚫을 수 있지 않을는지, 관객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관통하지 않을는지......





그나저나 영수가 떠나간 후 은희씨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루 이틀 한 시간 두 시간을 어떻게 꾸려나갔을까. 영화에서는 그러한 은희씨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영수가 은희씨를 떠나간 후 영화는 줄곧 떠난 영수의 삶만을 조명한다. 은희씨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 커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런데 불현 듯 영화 초반부에 은희씨가 영수에게 건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때 헤어지죠, 뭐.” 그러한 담담함. 현실에 대한 용기를 수줍게 허나 당차게 담아둔 그런 담담함. 바람 한 줄기에도 쉽게 흩어져버릴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자, 그럼에도 그 사랑을 붙잡으려는 자. 조제(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중)는 알지만 피하지 않았다. 혹시 은희씨도 조체처럼, 알지만 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영수가 떠난 후의 은희씨에게, 츠네오가 떠난 후 홀로 담담하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나아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살기위해 홀로 담담하게 반찬을 만들어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그려보는 건, 그저 나의 낭만적인 기대일까.

지금껏 은희씨에겐 ‘씨’라는 존칭을 붙이고 영수에겐 ‘씨’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은희씨에게 보내는 ‘씨’에 존중과 위로를 담고 싶었다, 존중과 위로와 응원을. 은희씨, 부디...... 아, 고백하자면 실은 영수에게도 줄곧 ‘씨’자를 붙여왔다,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생략했을 뿐. 다만 영수에게 붙였던 ‘씨’는 은희씨에게 보낸 ‘씨’와 다르다. 영수의 ‘씨’는 못마땅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뱉는 말, 씨. 나에게도 내가 ‘씨’자를 붙여준다면, 과연 어떤 ‘씨’를 선택하게 되려나. 나 또한 영수처럼 현실 속에서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나 스스로에게 영수의 ‘씨’자를 붙여가는 삶을 살아가려나, 그런 삶을 만들어가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까,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당신은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에, 당신의 삶에 어떠한 ‘씨’를 붙여줄 수 있나요? 묻고싶다, 내 가슴이 먹먹해오는 그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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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0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뭉클한 감상 후기에요. 영희씨가 숨이 멎을만큼 달리고 달려 쓰러져 몸부림 치던 장면...그리고 돌아와서 헤어지자고 말하죠. 영수를 보내고 오열하던 장면도~~~ 정말 먹먹하죠. 영희에겐 그겐 사랑이고 행복이었죠.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Arm 2008-07-01 23:38   좋아요 0 | URL
아, 말씀하시니 영화 장면들이 뭉글뭉글 가득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봐봐야겠어요. 은희씨-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