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깜찍, 반짝, 예쁜 아동 모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요즘의 미디어 세상. 특히나 각종 CF의 카메라 앵글은 이 ‘꼬마’들을 분주히도 쫓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 ‘꼬마’들의 매력에 폭 빠져든다. 나는 언제 이 꼬마들에 들떴을까, 한번 떠올려보자. 베스킨라빈스, 트롬 세탁기 등 여러 CF들이 머릿속을 스쳐갈 것이다. 베스킨라빈스 꼬마 광고의 등장 이후 하나하나 세어보면 꼬마들이 메인인 광고의 수는 족히 20여 편은 되는 것 같다. 또한 트롬 세탁기의 꼬마는 모델료로 단발 2천만 원 이상을 받으며 5~6편의 CF, 뮤직비디오 등에 출현하였고 베스킨라빈스의 꼬마도 지금까지 6편의 CF, 4편의 영화 등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미디어의 수용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급 꼬마는 앞선 둘을 포함해 5명 이상을 꼽아볼 수 있는 등 종으로 보나 횡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은 확연하다.  


<아동 모델 정다빈과 정채은>

    그렇다면 이러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왜 이 꼬마들에게 열광하는가? CF 속에서 이 꼬마들이 나타내는 이미지들을 종합해 나열해보면 귀여움, 예쁨, 순수, 평온, 화목, 풍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아동 모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이미지들은 포화상태의 광고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떨리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다. 그리고 광고의 수용자들은 실제로 떨려한다. 나 역시 이 꼬마들의 미소에 살살 녹아버렸다! 당신은? 당신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철저히 광고주의 시각, 어른의 시각을 거쳐 인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란 비판적 시각은 여기선 잠시 가볍게 접어두자. 어느 광고에선가는 꼬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무도 인위적인 어른의 언어와 한껏 꾸며진 표정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기억들은 잠시 잊자. 아주 잠시만.) 

  그럼 이쯤에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에 편승하여 나 또한 한 명의 아주 어여쁜 꼬마 아이를 소개하려 한다. 여느 아동 모델 뺨치게 예쁘고 귀여운,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처럼 결코 풍요롭지도 평온하지만도 못한, 다시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하얗고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그럼으로써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내 마음을 살살 녹여버린 꼬마아이, 김예슬을. 


<스타급 아동 모델 정다빈(좌상), 정채은(좌하)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의 김예슬. 나는 예슬이가 다빈, 채은 못지않게 객관적으로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5년, 10년이 지난 후에 이들을 비교해본다면... 어떠할까. 앞으로 이들이 각기 나아갈 길의 풍광은 너무도 상이하다. >

  나는 예슬이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에서 만났다. 예슬이는 광주 서구의 한 외곽에서 65살의 할머니, 14살의 오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예슬이가 3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사고의 충격으로 술과 담배에 쩔어 든 아빠도 몇 달 후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 머물러있다. 자연스레 집안은 기울어졌고 생계유지란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예슬이의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은 각종 폐지와 고물들. 예슬이와 예슬이의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이끌고 밤거리를 나선다. 예슬이는 추위 속에서 호호 녹여가며 그 연하고 조그마한 손으로 폐박스를 뜯어 옮기고, 그 작은 몸으로 리어카를 뒤에서 밀고 때론 앞에서 끌어간다. 리어카를 가득 채워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와 오빠가 폐지와 고물들을 정리하는 동안 예슬이는 조촐한, 참으로 조촐한 저녁상을 차린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열심이고, 제법 능숙하다. 

  카메라는 이러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고 헤쳐가고 있는 예슬이의 가족을 차분히 그리고 담담히 응시한다. 할머니가 아파서 못 일어나시는 어느 밤에는 오빠와 예슬이 단 둘이 할머니 몰래 리어카를 끌고 나가기도 하고, 지금은 비어있는 옛 집에 찾아가 찾아낸 엄마의 사진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100원 200원 모아온 용돈으로, 한 시간이나 걸어 시내에 나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기도 한다. 어린 것 단 둘이 리어카를 끌고 밤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한켠 대견하면서도 왠지 불안하고, 엄마 사진을 찾아 밝게 웃는 얼굴의 내면엔 얼마나 뭉클한 그리움이 담겨있을까 안타깝고, 큰마음 먹고 준비한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도 소박하여 마냥 슬프다. 



<오빠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있는 예슬이>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적 감상이 무색하게, 예슬이의 얼굴은 결코 찌들어있거나 어둡지 않다. 왜 그런 상황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웃고 있니, 어째서 투정부리지 않고 묵묵히 집안의 일에 동참하고 있니, 어떻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우울해하지 않고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오순도순 맑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니? 아, 이러한 예슬이의 꿋꿋한 모습을 보며 이 꼬마의 미래에 대해, 감히 희망을 걸어봐도 되려나. 그런데 검고 짙은 스모그 속에서 생각이 뒤엉켜가는 건 왜일까. 

  예슬이네 할머니의 한숨은 왜인지 깊어만 간다. 과거 연골 수술을 받았던 무릎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백내장으로 눈까지 점점 어두워져 간다. 또한 석 달 후면 지금 살고 있는, 초라하지만 아늑했던 집을 비워줘야만 한다. 폐지와 고물을 한 가득 모아 끙끙 힘겹게 고물상까지 옮겨가 팔아도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100kg에 7500원 미만. 과연 새 보금자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으려나. 손주, 손녀가 ‘고등핵교’ 졸업할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무리 아프고 고단해도 계속 일해서 ‘애기들’ 대학 보내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내 가슴을 불안한 먹먹함으로 때린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못 갖고 와도 웃어요. 아이들이 웃겨 븐께....>

  “기분 좋죠. 어떤 때는 (폐지와 고물을 팔아) 4만원도 할 때가 있어요. ... 그때 최고 좋죠. 그때 우리 애기들 천원씩 탁탁 주면 돈 갖고 춤춘디요. 얼마나 좋다고 춤 춘다고요.”

  한 쪽에서는 매일밤 고단하게 고사리 손까지 품들여 올린 4만원의 수입에 더덩실 춤을 추고, 한 쪽에서는 4천만원이란 금액도 1~2초 사이에 가볍고 우습게 나뒹군다. 누군가에겐 4억원도 우습다. 이러한 직접 비교, 이러한 극한 차이. 그냥 통밥만 굴려 생각해봐도, 직관에만 귀를 기울여봐도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끈적히 달라붙지 않는가? 극한 차이, 명백한 불합리함. 혹여 능력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현상이라고 차갑게 말하는 당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당신일지라도 예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을 안타까움까지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바로, 본인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극한 차이의 현상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현실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우리 개개인이 예슬이를 보고 들으며 가슴에서 솟았던 느낌들을 좀 더 열심히 되돌아보고, 대면해주길 바란다. 그저 단순한 안타까움, 일차원적인 찝찝함에 머물지 않길 바란다. 그러한 안타까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세상을 뒤집어엎어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자 외치진 않겠다. 다만 OECD 가입국, 첨단기술 강국, 세계 10대 경제규모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 좀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않고 있음이 (‘못함’이 아닌 ‘안함’이다.) 그저 기이할 뿐이다. 이 땅에서는 과연 조금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그저 요원한 이상일까. 많이도 아니다, 그저 조금,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도 안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끙끙 앓는 노파와 9살 먹은 어린 꼬마를 춥고 깜깜한 밤에 폐지를 주워오도록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다 스러져가는 초라한 집에서조차 내쫓으려 하는가. 이 노파와 꼬마가 적어도 초라한 집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제때에 최소한의 병원 진료라도 받을 수 있고, 학교 교육으로부터 이탈됨을 걱정하지 않고, 일주일에 2~3번만 폐지를 주워와도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갈 수 있는 사회시스템은 정말 그리도 요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냉혹함이 현재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들의 인격적 수준이다. 이는 우리 사회와 우리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가치관과 지향의 문제이다. 주체조차 사물화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푹 절어버린 가치관과 지향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예슬이의 이야기에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혹 ‘사회복지’란 ‘상품’을 ‘소비’해줄 마음은 안드는가? 아서라, 천박하게 뿌리내린 우리 고도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의 소비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임을(‘나’가 ‘진정 나’인지의 문제는 미루어두자). ‘사회복지’란 공공을 위한 ‘상품’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이미 사회주류의 룰을 어긴 상품, 그 태생부터 도태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을 어찌할까. 선진국, 7대 경제대국, 국민소득 4만 달러, 이건희의 삼성, 이명박에 대한 선망과 지지. 10억 모으기, 50평 아파트, 로또, 프로토, 의대, 고시, 대기업 입사로 빽빽이 가득 찬 인생지도. 이러한 생각과 지향에 줄서기한 우리 대다수가 동시에 예슬이를 보며 안타까워함은 심각한 자가당착, 양의 탈을 쓴 자위, 독한 가식이다. 물론 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우리, 단순 일차원적인 안타까움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면 감히 안타까워하지도 말자. 내가 지향하는 세상, 이루려는 삶과 예슬이를 보며 흘린 눈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차를 직시하지 못할거라면 어서 추한 눈물을 뚝 그쳐라. 우리의 자위가 때론 너무도 역겹다. (오바했나? 나 또한 가식의 글을 끝맺는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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