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누군가는 80년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군사독재권력과 민주운동 간의 피어린 대결이 숨 막히게 진행된 저 80년대.” 

  그래, 고개가 끄덕여지다가 순간, 세차게 의문이 돋는다. 그런데 그 시절을 과연 ‘피어린 대결’, ‘숨 막힌 진행’으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저들의 피흘림, 숨막힘과 이들의 피흘림, 숨막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무언가 부당하지 않은가. 부당하다. 부당하다. 시뻘건 피의 분한 비린내를 아프게 맡아야만 했고 잔인한 어둠 속에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 죽여만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언제나, 늘, 누구였던가. 

  “지난 새천년 봄에 출간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작과 비평)은 1980년대를 ‘관념, 시대, 역사’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현실, 개인, 일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바라본 걸작”이란 호평처럼 <오래된 정원>은 어두운 시대를 끊임없이 몸으로 부대끼며 견뎌내고 이겨내야만 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현실, 개인, 일상을 치열하게 그리고 있으며 또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끊임없이 진솔한 글로 버무려온 황석영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이기에 한층 각별하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민주활동가 오현우. 17년이란 긴 시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형을 마친 그는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교도소를 나선다. 세월을 따라 변해 버린 가족과 사회의 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허나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늘 함께했던 한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 며칠 후, 현우의 누나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혹시 누님...... 한선생 주소 아세요?
  내가 말했지? 편지 갖구 있다구. 너, 괜찮겠지......
  누님은 내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주 오래 있다가 얘기해줄려구 그랬는데...... 그 사람, 죽었어.
  나는 숨을 두 번에 걸쳐 나누어서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17년 동안 그려왔던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1980년, 군부로부터 도피생활을 하던 오현우는 그를 숨겨줄 사람으로 한윤희를 소개받는다. 이제 막 봄의 문턱, 포근하고 흙냄새 풍기는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갈뫼,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윤희. 현우는 윤희와의 갈뫼 생활 속에서 마치 딴 세상에라도 온 듯한 따스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며, 시대적 사명감과 평온한 현실안주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우는 결국 갈뫼를 떠나, 아니 윤희를 떠나 새로운 활동을 펼칠 결심을 한다. 윤희는 그를 잡고 싶지만 잡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고 17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다. 한 명은 감옥이란 ‘그 안’에서 한 명은 ‘이쪽 밖’에서. 다시 현재. 윤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갈뫼를 찾아간 현우. 그는 윤희가 남겨둔 일기, 그림과 함께 17년 전의 과거로 빠져든다. 과연,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꿈꾸었던 그들의 오래된 정원을 찾을 수 있을까?

  80년대에 태어난 나는 그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지나왔던가. 물론, 아무런 어두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 시대의 어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앞서 나는 어떤 어둠도 인식조차 못했었다. 난 그저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80년대를 동심에 한껏 즐거웠음으로만 기억할 뿐 80년대의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다. 공교육의 기간을 거치면서도 누구 하나, 어느 교과서 하나 80년대의 사회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에 그 시대와 나와의 단절은 공고하게 지속됐다. 아니, 남 탓만해서는 어찌하랴. 한 때는 시험 성적이, 한 때는 군대가, 한 때는 취직만이 인생의 거진 유일한 초점이었기에 80년대의 사회는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지금 역시. 

  너무도 어렸기에 인식조차 못했던 80년대의 어두움. 나이 스물이 훌쩍 넘고 어른이란 표딱지를 달고 있는 지금, 여전히 8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 이 2000년대의 어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너무 어리기’때문일까?

  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80년 광주에 빚진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그때 거기서 죽어간 사람들이 흘린 피 값으로 대신 사준 것이다. 하기야 우리가 빚진 것이 어디 80년 광주뿐이겠는가? 멀리는 전봉준에게서부터 가까이는 전태일까지 자유를 향한 고통스런 장정에 자기를 바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타인의 죽음에 빚진 것이며, 우리의 풍요는 타인의 가난에 힘입은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잔디밭에서 음악실에서 또는 다방에서 빈둥거리던 바로 그 시간에 똥물세례를 받으며 구사대의 발길에 차이던 동일방직 여공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무엇이었겠으며 또 무엇이 되었겠는가? 그들이 노동하며 흘린 땀으로 내 몸은 자랐고, 그들이 입술을 깨물며 흘렸던 눈물로 내 영혼이 성숙했다. 그들의 슬픔과 눈물은 내 존재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고통의 빚을 지고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티없는 행복을 짓밟고 서 있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우리와 피부색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의 비참한 빈곤 위에 터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나는 김상봉의 이 말이 왜 우리가 우리와 상관도 없던 과거와 관계를 맺어야하며, 왜 황석영이 굳이 한 시대의 진실을 600여 페이지 분량의 글로 애써 써내려갔는지에 대한 현답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어렸을 때는 ‘너무 어려도’ 되었지만 아직까지 ‘너무 어리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체험과 기억이 직접적으로 없는 경우일지라도 우리는 문학을 통해, 영화를 통해, 음악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하늘을 날아보았고 맨발로 바다를 건너보았으며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으며 비극적인 사랑에도 빠져봤다. 경험은 간접적이되 감각은 비교적 생생하다. 상상력의 힘을 10억 모으기, 메이커 아파트 구매, 귀족적 문화의 향유, 로또 1등 당첨 등에 모두 쏟아버리지 말고 <오래된 정원>에 한번 ‘투자’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80년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80년대생들이여! 80년대 당시엔 지금의 나, 당신,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인 20대였을 오현우와 한윤희. 우리들의 부모님, 삼촌, 이모와 같은 세대의 또래로서 동시대를 살았을 오현우와 한윤희. 어째서 서로 사랑했던 현우와 윤희는 서로의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그토록 긴 시간을 이별해야만 했는가? 내가 연인과 떨어져 소식도 모른 채 17년을 감옥에 가있을 수 있을까? 현우와 윤희를 이별하고 고뇌하게 만든 80년대에 우리 부모님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그 80년대엔 우리 부모님의 연애 또한 힘겨웠을까? 나와 나의 애인이 80년대에 연애를 했다면 어떤 장면들이 가능할까? 부디, 상상력의 힘을 뻗쳐보자. 부디, 오현우와 한윤희의 슬픔과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윤희의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누님에게서 전달받은 마지막 편지는 구십육년 여름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네의 마지막 글귀를 기억한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눈물이 떨어진다. 가슴 속 파장이 퍼지고 퍼진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6-3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건,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을거라 믿는 근거가 되죠.^^
가슴 아픈 우리 역사~~~ 80년 광주에 빚진, 산자의 죄의식도 갖고 있어요.
영화는 광주에서조차 한주만에 내려서 못 봤어요.ㅜㅜ

Arm 2008-07-01 23:30   좋아요 0 | URL
역시나 황석영 선생님의 냄새가 배어있는 책이 영화보다 많이 더 좋았어요!
책이 영화화되면 그 둘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 같아요-
순오기님이 바라시면 영화파일 보내드릴게요! ^^
아, 그런데 광주에 사시는군요- 아, 광주...

순오기 2008-07-02 00:0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광주댁'으로도 통한다죠.
결혼 후 왔으니까 올해 20년째...자칭 '광주홍보대사'로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