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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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 그들은 진보인가?

한나라당이니 조중동이니 하는 세력의 대부분에게 그들은 분명 진보다. 아니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좌파다. 그런데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선 답들이 제각기 엇갈리는 듯하다. 그만큼 헷갈린다는 것.


그런데 이에 대한 김규항(어린이 진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의 답은 단호하다. 그에게 그들은 진보가 아닌 “가짜 진보”다. 물론 그들은 “다 좋은 분들이고, 이른바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분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진정한 변화를 막는” “치명적인 반동”이다. 그렇다면 왜?


답은 인터뷰집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에 실려 있다. 이 책을 통해 김규항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전문인터뷰어 지승호가 인터뷰했고 지난 3월말 출간됐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분기점, 신자유주의

그렇다면 왜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은 진보가 아닌 “치명적 반동”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라고 할 때는 상대적 개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규항에게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분기점은 ‘신자유주의’다.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수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보인 거죠. 한국은 다들 흔히 하는 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고요.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인 거죠.”

“모든 것의 구분은 신자유주의입니다. 반독재도 아니고, 정치적 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이 분명해져요.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모두 확실하게 구별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거죠.”


물론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데도, 반대하는 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기에 “보수라고 다 같은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고 다 같은 진보는 아니”지만 “큰 덩어리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의 진보성 및 “한나라당, 조중동 같은 세력과의 차이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그러나 엄연히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의 진보성이고 그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한다는 말이다. 김규항에게 그들은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지키는 세력”으로서 “인민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수호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명박 정권보다도 더 큰 반동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사회 비판의 대상이 그 사회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요.”

“누가 보기에도 진보적이지 않아 보이는 건 실제적인 반동성이 없다는 겁니다.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진보적이지 않은 게 우리를 미궁으로 몰아넣어요.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죠.”


그는 “개혁이라는 건 보수의 일부”라고 말한다.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보와 개혁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계급’도 좌우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제시한다. “우파적 관점은 시종일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로 나누어 보게”하지만 “좌파적 세계관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보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


“계급을 말하지 않을 때 좌파는 좌파 명찰을 단 자유주의일 뿐이죠.”


결국 진보를 위해서는 현 체제를 옹호하면서도 “인민들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의 삶에서 진보의 희망을 찾다

그럼 김규항은 우리 시대 진보의 희망을 어디서 찾고 있을까. 그에게 희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다. 그는 진보와 영성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영성이란 “사회변혁에 조응하는 ‘나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의 영성”이다.


그는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이라며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된다.


“예수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내면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봉착한 한계에 대해 비전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인류 사회의 진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이에요.”


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는 불과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사람들의 영혼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남보다 많이 갖거나 보통사람들과 격차를 벌이는 것에 대해 기뻐하는 사고방식”이 지배계급만이 아닌 서민 대중, 농민, 노동자의 사고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노골적인 시대인 만큼 그는 “오로지 지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회개란 ‘회심’ 즉 “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살라는 말, 즐거움을 바꾸라는 말”이라고 한다.


“어제까진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앞서고, 대개의 사람들과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즐겁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게 전혀 즐겁지 않은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덜 가진 사람을 보면 내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민망하고, 뒤처진 사람들이 눈에 밟혀 불편하고, 그런 격차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빼앗긴 권리와 인권을 위해 함께 싸우는 게 훨씬 마음 편하고 즐거워지는 거죠.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한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란 말이다.


“예수의 방식대로, 더 근본적인 질문만이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잘살고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좀 못살고 덜 행복하더라도 훌륭하게 살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잘 산다는 게, 행복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그런 삶의 실천의 한 구체적 예로 교육문제를 제시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흘러가고 있는 가치관이 아닌 다른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아이에게 손해가 아니라는 것, 부모의 별난 세계관으로 아이를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게 더 낫네, 내가 잘못 생각했네, 깨닫게 해야 하는 거죠.”


결국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사는 방식이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변혁’ 없이는 진보의 희망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바뀌는 순간 진보의 희망은 싹 튼다.


“변화는 조금씩이라도 눈에 띄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계단처럼 툭 튀어 오르기도 하죠.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한건 변화가 일어난다는 건데요. 변화가 내 눈 앞에서 목도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희일비할 건 아닙니다. 당연히 절망할 것도 없어요. (...) 회개하면 바로 천국입니다.”


책에는 위에서 언급된 ‘한국 사회의 진보’, ‘예수에게 묻는 이 시대의 진보’에 관한 내용 외에도 ‘페미니즘, 영화로 우리 사회 엿보기, 촛불과 노대통령 추모, 미래세대 교육’ 등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말대로 “형명과 영성의 조화를 얘기하는 유쾌한 급진주의자 김규항의 얘기를 다 듣고 나면 어쩌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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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의 정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기만의 정권 - 탈세와 부정으로 얼룩진 오바마 정권의 이면
미셸 말킨 지음, 김태훈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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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오바마의 탈세, 부정, 패거리 정치를 파헤친다. 오바마를 둘러싼 지나친 열광에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들은 오바마에게 속고 있다고 말한다. 오바마 정권의 인사, 영부인, 후원자 등 주로 오바마의 주변사람들 그리고 오바마와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맺음을 폭로한다.  

맞다. 오바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열망이 가히 뜨겁긴 했다. 지금은 다소 식었다해도, 그가 당선될 당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달뜨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런 희망이 과하긴 과했을 것이다. 어떤 정치인도 순백의 성자일리는 없으며, 어떤 권력도 진정 약자들의 편에 설 수는 없는 것. 오바마도 어디까지나 한 정치인이자 권력의 정점일 뿐.  

따라서 오바마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저자의 의견엔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어느 권력이든 진정 정의롭고 진정 정직하고 진정 '착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 덜 나쁘고 누가 덜 오염됐나를 따지는 게 맞는 걸 수도 있겐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자가 오바마의 진정성을 의심하듯, 저자에게도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 즉, 정말 권력의 비리와 부도덕에 대한 분노와 그를 바로 잡으려는 정의감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을까?  

저자 미셸 말킨. 그는 아주 보수적인 폭스 뉴스의 논평가로 활약했다. 폭스 뉴스는 오바마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독설을 퍼붓는 등 오바마에게 칼날을 세워왔다. 오바마 당선 이후 폭스뉴스 시청률이 급상승 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바마에 대한 반감의 결집이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유명 보수주의 블로그 두 개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게으름과 부족함으로 저자에 대한 조사는 깊이있게 하지 못했다. 그가 썼다는 전작들의 내용도 알아보지 않았고(국내엔 번역되지 않음) 그의 논평과 블로그 글 등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폭스 뉴스 논평가' 타이틀을 뼈대로 놓고 생각을 해보면, 물론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그의 블로그와 저작들의 방향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오바마를 어떻게든 까고 싶던 저자의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탈세와 부정과 같이 기본을 벗어남에 대한 분노보다는 오바마의 결점을 어떻게든 잡아보려는 의도가 앞선 것이 아닐까. 물론 책에서 다룬 오바마의 탈세, 부정 등이 일정부분 엄연한 사실이겠지만 그렇다라도 그 지적은 그 자체 '목적'이 아닌 오바마 죽이기의 '수단'일 뿐인 듯.   

 

그래. 저자가 거품을 물고 얘기하듯 오바마 정권도 탈세와 부정이 있는 정권일 것이다. 그러니 오바마에 세계의 희망을 걸고 시대의 영웅처럼 떠받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한단 말이리라.  

그렇지만 이 책은 과연 그런 진솔한 성찰의 결과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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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m > <예수전>을 출간한 ‘B급 좌파’ 김규항과의 만남!

  

 

 

 

 

 

 

 

예수의 삶에서 진보의 희망을 찾다 


예수로 읽는 한국사회, ‘B급 좌파’ 김규항의 <예수전>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또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위해 책 <예수전>을 내놓았다. 그는 주로 칼럼을 통해 이야기를 해왔었는데, 이 책은 그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다.
2005년부터 진행된 ‘예수전’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에는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진정한 목소리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김규항의 고민과 답이 담겨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코복음을 인용하여 예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독자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는 교리 속에 화석화된 예수를 되살려 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전> 출간을 맞아 지난 5월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벼레별씨 카페에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까페는 5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고, 저녁 7시30분부터 2시간가량 계획됐던 만남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10시 반경까지 계속됐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독자의 질문에 작가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긴 만남의 모든 내용을 전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일부나마 중계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다   

Q.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은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관련하여 선생님의 비폭력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예수의 행적 중에선 상당히 과격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상 좀 엎은 게 그렇게 큰 일 입니까? 우리는 보통 평화란 뭔가 조용하고 온순하고 차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사회적 불의와 모순을 덮는 나쁜 의도로 많이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세상 사이에 깨진 조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습니다.
세상엔 사실 폭력주의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주요한 사람들도 공식적으로는 다 비폭력주의자이지요. 폭력을 미화하고 폭력이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폭력으로 돌아가고 불의할까요. 그래서 ‘폭력은 나쁘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비폭력주의라는 것은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자식이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된다’고 말할 때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러나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 1년 내내 파출소 한번 갈 일 없는 사람이 ‘저항으로서의 폭력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겐 가해자의 폭력보다 끔찍한 폭력이 됩니다. 이건 폭력, 비폭력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염치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폭력이란 것은 항상 이론, 논평, 구경으로서의 얘기였습니다. 비폭력주의를 얘기하려면 자신을 폭력의 현장에 위치시키고 자신을 폭력에 충분히 노출시킨 후에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비폭력주의자들은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 있었고 바로 그 폭력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Q. 한국 기독교의 부패, 비리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이 제게 고통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뭔가 외람된 것 같고 꺼려진다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먼저 물으라고 물어봅니다. 십자가를 달고 교회란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지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이든지 아니면 더 나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목사의 재정비리, 교회 세습 등 워낙 타락해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없애면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준이 낮아져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 그건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을 갖추는 일이지 진정한 교회를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의 성전이란 현대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성전을 바라보며 벽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폭언을 합니다. 저는 예수가 성전 앞에서 보인 이런 당당한 태도를 교회, 기독교 문제로 고뇌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는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  


Q. 책에서 바리사이인 얘기를 하시면서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 등이 진정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이라고 하셨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
A.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사회운동 주류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기존의 민중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민중운동을 배제한 것이기도 하지요. 노동자, 농민 기반 운동은 이제 옛날의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90년대 이후 진행된 개혁운동, 개혁정치들에 의해 배제된 것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일상에서 가장 나쁜 세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가장 나쁜 세력은 그 나쁨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어 우리가 특별히 영향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얻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위험하지요. 그래서 예수는 바리사이인들과 그렇게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NGO, 개혁운동’ 등의 표현을 빼야하나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순수하고 정의로운 활동가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고 해야 할 말이 더 많습니다.  

 

예수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Q. 어떻게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A.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혁명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상상력과 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사람들의 노력의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건 이미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나 현상이 이미 우리 안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을 우리는 새롭고 어려운 것을 이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꼴을 갖추고 사람과 사람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러한 것이 중요한 혁명의 씨앗입니다.
결국은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이 사회의 반영, 거울인 이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내면은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지요. 신자유주의, 이명박을 비판하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도 계속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면에서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은 들여다 볼 수 있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 종교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싸우면서도 늘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혁명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결과가 반영되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때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평생 해녀 물질로만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지요.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이 할머니가 제주도 해녀 좌파 연합의 회장은 아닙니다.(웃음) 그런 정서가 수천년 동안 정직하게 일하면서 먹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요. 지금은 그 사람들의 정서가 오히려 특별하고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인간의 욕망일 수 있지만 더 가진 게 뭔가 불편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것, 결국은 자기 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 내면이 변해야 한다’ 이분법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였지요. 예수한테는 기도하는 것과 싸우는 것이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미 잉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표현대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했고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하면 됩니다. 물론 떵떵거리고 배불리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고 눈물짓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초대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로부터 현재 공황 상태에 이른 혁명, 다음 세상, 진보에 대한 상상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의 삶으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이야기를 끝으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이 외에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 작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말들이 오갔다.
김규항은 그가 기존에 가진 모든 종교적 지식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진지하고 순정한 묵상을 통해 예수의 삶을 해석하려 했으며, 그러한 예수의 삶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묵상한 예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다. 그는 이 책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수많은 ‘나의 예수전’은 결국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으로부터 얻는 진보의 희망, 김규항은 우리 안에 숨겨진 새로운 세상의 씨앗을 건드리고 있다.

 

*초대해주신 알라딘 관계자 및 돌베게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특히 김희진 편집자님 멋지세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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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m > 법학자 김두식... 그가 말하는 한국 교회!

 

"외형적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날이 영향력을 잃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반성하고, 교회와 세상의 올바른 관계를 모색해본 책입니다"

지난 1월, 한국 교회를 "애통한 마음"으로 꼬집은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선보인 법학자 김두식 교수. 그는 출간 후 굉장히 바빠졌다고 한다. 독자들로부터 이메일과 전화가 폭주한다는 것. 독자들의 열띤 부름을 받은 김 교수가 지난 22일 밤 서울 명동 '청아람 아카데미'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가장 먼저 그는 이 책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만 그치는 건 아닐까란 고민을 털어놨다. 책이 호응과 공감을 얻고 있지만 "우리끼리,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조그만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 책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란 의문도 떠오른다고. "예수님도 시작은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나"란 생각을 하면서도 힘이 쭉 빠진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찻잔 속의 태풍"을 넘어서서 "어떻게 이 범위를 넓힐 수 있을까란 생각을 같이 해주길" 부탁했다. 
 


목사님께 선물하고 싶은, 하지만 못하는 책
그가 독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은 말은 바로 "이 책을 목사님께 선물하고 싶다"라고 한다. 하지만 "선물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고. "선물하고 싶기는 하지만 선물하지는 않는 책"이 된 것이다. 목사님께 책을 드리게 되면 "교회 내에서 전혀 좋을 게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의 덫은 독자만이 아닌 저자에게도 해당되는 듯하다. 그 역시 목사님들께 책을 드리기가 조심스럽고 목사님들의 눈빛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고 한다. 독자들과 만남에서 눈치를 보게 되고, 악성댓글에 무서움을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제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책입니다"란 저자의 말이 겹쳐진다.

"이것이 이 책을 쓰면서 제 마음에 있는 공포, 자기검열입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요? 이 정도 책을 가지고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해코지를 당하면 어떡할까란 두려움. 이런 공포는 어디서 왔을까요? 함께 나누고 싶은 고민입니다."

그는 이 책이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일 뿐이라고 한다. "대단히 특별한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똑같이 고민하는 내용, 평소 생각했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책의 독자나 저자나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 교회에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현실. 그는 여기서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 한국 기독교"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아주 보수적인 교단보다도 보수적인 면이 있다.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만들고, 말을 못하게 만듭니다. 아주 상식적인, 기본적인 이야기도 자신 있게 못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억압적인 사고 구조 안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같은 이유로, 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회자들도 한국에 오면 배워온 내용들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신학자가 아닌 김 교수가 '감히' 이런 책을 쓰게 것이다.

"오죽하면 저 같은 사람이 나서서 이랬겠습니까. 이런 무식한 사람이 나서서 떠들도록 그냥 놔둔, 이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방치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해야 하지요."

이렇듯 지금과 같은 한국 기독교 현실에선 반드시 '써야만 하는' 책이었기에, 거꾸로 말하면 결코 "내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은 아니었기에 저자는 "이 책의 인세는 높은뜻푸른교회, 열매나눔재단을 통해 전액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꿈꾸는 교회...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그렇다면 김 교수가 꿈꾸고 있는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돌봄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강조했다.

"한 장로님이 사정이 어려운 어떤 학생한테 다달이 돈을 대주는 얘기를 들으면 어떠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가 2100억 원짜리 건물을 짓는다, 가슴이 따뜻해지는가? 안 따뜻해져요, 이상하게. 아까는 100만 원, 200만 원짜리 얘기고 이건 2100억 원짜리 얘긴데 왜 가슴이 따뜻해지질 않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는 교회가 할 일을 보험회사와 국가에 내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예를 들어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딸린 한 교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경우, 교회가 단순히 교인의 장례를 집전하는 것에서만 그칠 게 아니라 남겨진 가족의 생계문제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이렇게 서로 돌보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면 많이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고. 실제 초대교회를 보면 전도보다 훨씬 중요한 게 갑자기 몰려오는 밥만 먹으러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거였어요. 그런 모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권력, 정치, 돈과 거리를 두는 교회"가 되지 못했기 때문.

그는 먼저 어린 시절 소망교회에서 목격했던 한 장면을 회상했다.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소리가 울려 퍼질 듯한 아주 고요한 예배당, 그 안에서 엄숙히 깔리는 목사님의 설교. 그때 갑자기 예배당 한 구석에서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순간 목사님의 일그러지는 표정. 울음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며 설교를 멈춘다. 아기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져 아이를 안고 예배당을 급히 빠져나간다. 김 교수는 이를 "고상한 폭력"이라고 부른다.

"아주 품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폭력적인, 제가 목격했던 소망교회의 고상한 폭력. 그 특성이 이명박 정부로 그대로 옮겨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품위 있게 진행되지만 사람이 죽어나가고, 검찰이 조용히 사람을 잡아가 불구속 상태에서 아주 편안하게 수사를 하고, 사회적 생명을 끊고. 굉장히 위험한 식으로 운영되고 있지요. 상당히 위험한 기초 위에 쌓인 기독교 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대통령이 배출됐지만 이는 굉장히 위험한, 교회와 권력·정치가 결합한 결정적 악례일 뿐이란 말이다. 이외에도 돈과 거리를 두는 문제도 남아 있다. 그는 "국가보다 위험할 수 있는 세력"인 '삼성'을 언급하며 교회와 돈의 문제를 지적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입을 닫아버린 언론에 대해 그는 "도둑이 들면 개가 짖어야 되는데 짖지 않는 상황"이라며 교회는 과연 이와 얼마나 다른지 되물었다.

"신문사는 먹고살기 위해 그랬다,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혹시 교회에서 삼성에 대해 설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나요? 삼성이 교회에 광고 안 내거나 할 일도 없지요. 아무 제약이 없는데도 교회에서는 돈에 대해서, 돈의 위협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섹스의 위협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얘기해댑니다. 뭐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얘기하신 게 훨씬 많은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한다는 거죠."

이렇듯 지금과 같이 권력, 정치, 돈과 결합한 교회라면, 그 위험함에 깨어 있지 못한 교회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돌봄의 공동체"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안은 '제시되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은 무엇인가. 김 교수는 "책의 대안 제시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질문·지적을 많이 받지만, 부족한 대안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탁탁탁 하면 탁 되는 해결책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대안이 별로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은 같이 고민해야지요."

"설교 끝난 후 질문 받기, 지정헌금제도 등 새로운 실험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공동체부터 실험을 해보는 거죠. 되든 안 되든, 우리 교회가 정말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한 아이디어를 논의해보는 것만으로도 교회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는 "오늘 당장 교회에서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줄 것을 부탁했다. "교회의 현실에 절망"하고 절망하더라도 "재도전의 용기"를 품어줄 것을, '감히' 부탁했다.

"물론 치밀한 기획 없이 시작하면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실험도 우선은 누군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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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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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명박이 집권한지 2년. 오마이갓.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이 책을 보며 지난 2년이 주마등처럼 싹 스쳐간다.

이 정권이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읽히지 않겠지만, 이 정권의 행태들에 크고 작은 분노를 느껴온 사람이라면 분명 손호철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옳다고, 너무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이 집권한 우리 현실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얻고, 생각을 진전시킬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레시안, 한국일보 등에 실었던 칼럼들을 모아둔 책이므로 한 권의 책으로서는 구성이 성긴 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그만큼 언제라도, 어느 쪽을 펼쳐 읽어아도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책 전체를 통독하지 않고 몇몇 칼럼을 꼽아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리란 것이다.  

개인적으론 민주당의 한계에 대한 매서운 지적, 지금은 '맛이 간' 김문수에게 보내는 옛우정이 담긴 편지, 진보진영에 대한 분석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통해 지난 2년간의 한국 정치를 곱씹어보고, 남은 3년을 깨어난 채 살아가는 법, 3년 후 지금의 이 현실을 때려부술 수 있는 법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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