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발신: Save the Children(전 세계의 빈곤아동을 돕는 국제 기구). 

 
아버지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와있다. 피식. 나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친다. 

 

우리 아버지는 저 구호단체를 통해 외국의 가난한 아이를 후원하고 계신다. 평소 "가난한 사람이 힘들지 않아야",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야"란 말씀을 종종 하시듯 착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 참 존경할 부분이라고? 그럼에도 난 그런 아버지의 선심을 늘 깎아내려 왔다.

아버지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희망을 걸며, 부패한 한 개신교 대형교회에 열정을 바치고 계신다. 아버지가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서민'을 말하며 대형교회의 '사랑'을 말씀하실 땐 난 너무 어지러워진다. 그 '서민'과 '사랑'이 실은 얼마나 반서민이며 반사랑인지.

아버지가 말하는 '서민'과 '사랑'을 온전히 인정할 수 없듯, 난 아버지의 빈곤아동 후원에도 박수를 치긴커녕 손사래를 쳐왔다. 가진 자의 심리적 자위행위, 빈곤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의 행위.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난 아버지의 기부활동을 무시하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내가 너무 거칠고 성급했던 건 아닐까.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생명이 덧없이 꺼져가는 이 세계, 정답은 '기부'

연못에 빠진 아이가 있다. 뛰어 들어가 구하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의하면 우리 아버지는 과감히 연못에 뛰어든 사람이다. 반면, 난 아이를 외면한 채 연못을 지나쳐간 사람이다. 
 

피터 싱어는 말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기부함으로써,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아마 신발 한 켤레를 사는 돈보다는 조금 많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별로 필요없는 일에 쓰는 돈, 즉 음료수, 외식, 옷, 영화, 콘서트, 휴가 여행, 새 자동차, 집꾸미기 등에 들이는 돈은 얼마인가? 그런 데 돈을 쓰면서 구호단체에 기부하지는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기부와 아이가 물에 빠진 상황을 직접 비교한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은가?"란 말엔 결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느 가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늘 아침 남자 아이가 하나 죽었어요. 홍역이었죠. 우리 모두 병원에 데려가면 나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 부모에게는 돈이 없었죠. 결국 그 아이는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습니다. 홍역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죽은 거죠."

 

이런 일이 매일, 2만7천 번이나 되풀이 된다고 한다. 피터 싱어는 "수천만 명의 생명이 매년 죽어가는 세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생명이 덧없이 꺼져가는 이 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를 썼다. 그는 이 책의 목표를 "절대 빈곤의 덫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책임을 일깨우고, 구체적 행동지침과 기준을 제시해 우리가 더 많은 기부를 하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책은 "기부를 망설이는, 회의하는 이들에게 내미는 실천논리"인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본격적인 실천논리를 논하기에 앞서 '기부를 거부할 때 우리가 내세우는 10가지 논리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기부를 주저하게 만드는 6가지 심리적인 요인들'을 분석한다.


앞서 언급했듯 내가 기부를 거부해온 주된 이유는 '가진 자의 심리적 자위', '가난의 구조는 고치지 못함'이었다. 나의 이런 논리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먼저 지적을 받아들인다.


"나의 입장을 우려하는 경우가 있는데, 부자들이 구호 단체에 약간의 돈을 보탬으로써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부익부 빈익빈을 가져오는 세계 경제 시스템에서 계속 이익을 챙기게 하리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빈곤의 원인을 연구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어떤 접근법이 최선인지를 고려해보면, 보다 혁명적인 변화가 절실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 문제며, 자신이 바라는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더 나은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솔직히 충분한 대답은 안됐음에도, 수긍하게 된다. 이렇듯 '기부를 거부할 때 우리가 내세우는 10가지 논리들'과 '기부를 주저하게 만드는 6가지 심리적인 요인들'은 기부에 대한 내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당신의 소비는 '부도덕'하다!"


결국 이 책에서 피터 싱어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우리가 "그것에 상당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가 아닌 한, 고통과 죽음을 막기 위해 구호 단체에 기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쓰는" 우리를 "부도덕하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맵시 나는 옷을 입고, 훌륭한 음식을 먹고, 고급 스테레오로 음악을 듣는 일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기 기쁨에 반대하지 않는다. 같은 값이면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 (...) 그러나 나의 주장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데도 그런 '가치 있는 것들'에 돈을 쓰는 일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일 수 있고, 삶을 향상시키는 경험일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스테레오를 산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목표나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을 다른 사람의 생사보다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윤리적인가? 그것은 인간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말을 공염불로 만드는 게 아닐까?"


 

물론 '상당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와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의 판단기준은 개개인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 기준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기에 피터 싱어의 주장이 명확하게 꽂히진 않는다. 어찌보면 너무 반듯하고 착한 말이기에 하나마나한 주장 같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에게 지고있는 의무"를 얘기하며 우리의 소비에 대해 "비윤리적이야"라고 외치는 모습이 '꼰대'같기도 하다.


하지만 난 그의 주장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만 원짜리 스파게티 접시 앞에서 면을 말고 있을 때도, 9천 원을 내고 보지 않아도 될 영화를 보고 있을 때도 자꾸만 그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결코 물에 빠진 아이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믿음에도, 그것이 정말 나의 정제된 생각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합리화인지 고민된다. 



수만 번의 생각보다도 하나의 행동

코웃음 쳤던 아버지의 우편물을 다시금 바라본다. Save the Children.


심리적 자위이든, 가난의 구조 외면이든 어떤 추상적 논리를 이야기하건 이것 한 가지는 너무도 구체적인 사실이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저개발국의 한 아이에게 의약품과 안전한 식수, 학업의 기회를 주고 계시고 난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


저개발국의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나의 어떠한 성찰, 어떠한 공부, 어떠한 고민, 어떠한 바른 말도 아니다. 그 아이가 미소를 안고 살아가게 돕는 건 우리 아버지의 작은 기부이다. 기부의 문맥이란 행위 이전에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매일 2만7천 명의 아이들이 가난으로 죽어가는 이때에는 수만 번의 생각보다도 하나의 행동이 당장 가치 있다.


여전히 난 아버지가 말하는 한나라당의 '서민'과 개신교 대형교회의 '사랑'에는 극구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기부활동에 코웃음을 치진 못할 것 같다. 아버지의 우편물 앞에서 난 괜스레 숙연해진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을 건네 봐야겠다. 아버지가 결연을 맺고 있는 아이는 어느 나라의 친구냐고, 내게도 그 아이의 사진을 보여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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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터 - 집으로 쓴 시!, 건축 본능을 일깨우는 손수 지은 집 개론서 로이드 칸의 셸터 시리즈 1
로이드 칸 지음, 이한중 옮김 / 시골생활(도솔)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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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8년, 국내에 '행복한 집구경'이 출간되며 손수 집짓기를 꿈꾸는 사람들의 환호를 얻었던 목수 작가 로이드 칸. 2009년, 그의 책이 또 하나 발간됐다. '행복한 집구경'보다 앞서 발간됐던 '셸터'이다.   

'셸터'는 자기 손으로 직접 집을 짓되 효율적이고 생태적이며 예술적으로 짓는 방법을 다루기도 하고, 손수 집을 짓는 사람들의 목소리르 담아내기도 하며, 다른 책이나 TV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집들을 소개한다. 그야말로 세계 전역, 인류사 전체의 주거를 개괄하는 큼지막한 개론서로 불릴만하다. 
 

'셸터'에는 1천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과 250장이 넘는 그림이 담겨있다. 칼라풀한 '행복한 집구경'과는 달리 사진과 그림들은 흑백이다.1973년도에 첫 출간됐던 책이기에 소개되는 사진도 옛냄새가 나고 건축물들도 더 단순하고 소박하다. '행복한 집구경'의 출간과 30년 차이를 갖고 있으니 '셸터'에 실린 집들이 얼마나 더 옛스러운지 짐작이 갈 것이다.   

1970년대에 조망한 집들이니 너무 낡은 것들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가장 중요한 기본은 변하지 않는 법. '셸터'에 소개되는 집들은 더 옛스럽기에 독자에게 다가가는 장점을 지닌다. '셸터'는 '행복한 집구경'에 비해 세세한 부분에서 그 방법을 그림과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고 더 기본에 닿는만큼 집을 손수 짓고자하는 독자들에게 더 직접적인 도움을 주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로이드 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요에 의해서건 결단에 의해서건 앞으로는 자기 손으로 하는 일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에겐 충분한 능력이 있다. 타고났지만 숨어있는 그런 재능이야말로 앞으로는 가장 귀한 자원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간단한 집, 자연에서 구한 자재,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다루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발견, 땀 흘려 하는 작업, 자족의 기쁨,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셸터는 단순히 비를 가리는 집 그 이상의 무엇이다."   

땀, 자족, 그 기쁨, 해방. 그렇다. 로이드 칸은 단순히 집짓기의 기술적인 면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이런 삶의 가치를 담고자 했다. 그런만큼 이 책은 독자의 건축본능을 불어일으키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에 대해 "집으로 쓴 시"라고 내린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  

비록 지금의 나는 서울 도심의 꽉 막힌 환경에서 끙끙이며 살고 있고, 어느 세월에 맑은 자연과 벗하며 손수 작은 헛간이라도 지어보게 될지 기약이 없다. 하지만 '셸터'의 책장을 찬찬히 넘겨나가며 달콤하며 상쾌한 상상에 빠질 수 있었다.  

주먹을 불끈쥐며 미래를 기약한다. "직접 하시라, 게으름뱅이들이여!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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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m > <예수전>을 출간한 ‘B급 좌파’ 김규항과의 만남!

  

 

 

 

 

 

 

 

예수의 삶에서 진보의 희망을 찾다 


예수로 읽는 한국사회, ‘B급 좌파’ 김규항의 <예수전>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또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위해 책 <예수전>을 내놓았다. 그는 주로 칼럼을 통해 이야기를 해왔었는데, 이 책은 그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다.
2005년부터 진행된 ‘예수전’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에는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진정한 목소리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김규항의 고민과 답이 담겨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코복음을 인용하여 예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독자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는 교리 속에 화석화된 예수를 되살려 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전> 출간을 맞아 지난 5월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벼레별씨 카페에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까페는 5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고, 저녁 7시30분부터 2시간가량 계획됐던 만남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10시 반경까지 계속됐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독자의 질문에 작가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긴 만남의 모든 내용을 전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일부나마 중계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다   

Q.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은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관련하여 선생님의 비폭력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예수의 행적 중에선 상당히 과격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상 좀 엎은 게 그렇게 큰 일 입니까? 우리는 보통 평화란 뭔가 조용하고 온순하고 차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사회적 불의와 모순을 덮는 나쁜 의도로 많이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세상 사이에 깨진 조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습니다.
세상엔 사실 폭력주의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주요한 사람들도 공식적으로는 다 비폭력주의자이지요. 폭력을 미화하고 폭력이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폭력으로 돌아가고 불의할까요. 그래서 ‘폭력은 나쁘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비폭력주의라는 것은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자식이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된다’고 말할 때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러나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 1년 내내 파출소 한번 갈 일 없는 사람이 ‘저항으로서의 폭력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겐 가해자의 폭력보다 끔찍한 폭력이 됩니다. 이건 폭력, 비폭력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염치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폭력이란 것은 항상 이론, 논평, 구경으로서의 얘기였습니다. 비폭력주의를 얘기하려면 자신을 폭력의 현장에 위치시키고 자신을 폭력에 충분히 노출시킨 후에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비폭력주의자들은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 있었고 바로 그 폭력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Q. 한국 기독교의 부패, 비리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이 제게 고통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뭔가 외람된 것 같고 꺼려진다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먼저 물으라고 물어봅니다. 십자가를 달고 교회란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지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이든지 아니면 더 나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목사의 재정비리, 교회 세습 등 워낙 타락해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없애면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준이 낮아져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 그건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을 갖추는 일이지 진정한 교회를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의 성전이란 현대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성전을 바라보며 벽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폭언을 합니다. 저는 예수가 성전 앞에서 보인 이런 당당한 태도를 교회, 기독교 문제로 고뇌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는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  


Q. 책에서 바리사이인 얘기를 하시면서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 등이 진정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이라고 하셨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
A.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사회운동 주류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기존의 민중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민중운동을 배제한 것이기도 하지요. 노동자, 농민 기반 운동은 이제 옛날의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90년대 이후 진행된 개혁운동, 개혁정치들에 의해 배제된 것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일상에서 가장 나쁜 세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가장 나쁜 세력은 그 나쁨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어 우리가 특별히 영향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얻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위험하지요. 그래서 예수는 바리사이인들과 그렇게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NGO, 개혁운동’ 등의 표현을 빼야하나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순수하고 정의로운 활동가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고 해야 할 말이 더 많습니다.  

 

예수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Q. 어떻게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A.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혁명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상상력과 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사람들의 노력의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건 이미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나 현상이 이미 우리 안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을 우리는 새롭고 어려운 것을 이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꼴을 갖추고 사람과 사람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러한 것이 중요한 혁명의 씨앗입니다.
결국은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이 사회의 반영, 거울인 이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내면은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지요. 신자유주의, 이명박을 비판하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도 계속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면에서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은 들여다 볼 수 있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 종교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싸우면서도 늘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혁명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결과가 반영되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때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평생 해녀 물질로만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지요.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이 할머니가 제주도 해녀 좌파 연합의 회장은 아닙니다.(웃음) 그런 정서가 수천년 동안 정직하게 일하면서 먹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요. 지금은 그 사람들의 정서가 오히려 특별하고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인간의 욕망일 수 있지만 더 가진 게 뭔가 불편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것, 결국은 자기 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 내면이 변해야 한다’ 이분법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였지요. 예수한테는 기도하는 것과 싸우는 것이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미 잉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표현대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했고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하면 됩니다. 물론 떵떵거리고 배불리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고 눈물짓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초대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로부터 현재 공황 상태에 이른 혁명, 다음 세상, 진보에 대한 상상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의 삶으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이야기를 끝으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이 외에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 작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말들이 오갔다.
김규항은 그가 기존에 가진 모든 종교적 지식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진지하고 순정한 묵상을 통해 예수의 삶을 해석하려 했으며, 그러한 예수의 삶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묵상한 예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다. 그는 이 책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수많은 ‘나의 예수전’은 결국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으로부터 얻는 진보의 희망, 김규항은 우리 안에 숨겨진 새로운 세상의 씨앗을 건드리고 있다.

 

*초대해주신 알라딘 관계자 및 돌베게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특히 김희진 편집자님 멋지세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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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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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경 할머님. 일본에서 위안부가 되어 악몽 속을 걷다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와 식당일, 가정부 등의 일을하며 결혼하지 않고 내내 혼자 살았다. 1992년 다시 위안부란 굴레를 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증언했고 폐암으로 쓰러질 때까지 투쟁했다.   

책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위안부 강덕경 할머님에 관한 다큐멘터리 에세이다. 위안부 할머님의 삶을 다룬 TV다큐멘터리는 간혹 접했지만 책으로 접하는 건 처음이다. 책을 통해 그 삶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은 새롭고 반갑다.  

또한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대필작가로 살아온 유령작가 배홍진 씨가 저술했다는 사실이다. 일생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온 강덕경 할머님의 유령 같은 삶, 그리고 그 삶을 차분히 따라가는 유령작가. 유령과 유령의 만남.  

책은 크게 '1부 위안부 소녀의 생'과 '2부 위안부 할머니의 생'으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서는 강덕경 할머님의 어린시절을, 할머님의 고백을 통한 사료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소설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할머님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부터 위안부로 강제지용되던 사연, 그리고 그 안에서 겪었던 그늘진 기억들. 이 많은 사연들이 때로는 할머님의 시점으로, 때로는 할머님이 그린 그림 설명을 통해, 때로는 작가의 감상으로, 때로는 일본군 고바야시의 시점으로 표현된다. 다양한 표현의 방법이 혼란을 줄 수도 있겠지만, 특이했다. 특히나 일본군 고바야시의 시점에서 바라본 위안부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악몽의 시간, 그 후 오십 년이 지나 세상이 버려진 위안부들을 찾기 시작할 때까지, 어리둥절하게도 위안부 소녀에서 어느날 문득 위안부 할머니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할머님은 독거했고 전국을 떠돌았다.  

2부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로서의 삶이 그려진다. 세상에서 '버려진' 시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고생길이 담담하겨 그려지고, 어떻게해서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할머님이 겪은 변화는 어떠한 것인지 이야기된다. 또한 위안부 할머님들의 대일본 보상활동 및 공동체생활을 하며 서로를 위안해가는 삶의 모습도 소개된다.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는 1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할머님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더욱 많고, 위안부 할머님들이 모여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도 녹취록처럼 소개된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이 책은 흡입력이랄지 완결성이랄지 통일성이랄지, 하나의 작품으로서는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에 진심으로 아파하며 할머님들과 같이 울고 할머님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길 바라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조용하게 독자에게로 전해진다. 결코 훌륭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훌륭한 책. 유령작가의 진실된 마음이 유령의 삶을 살아온 할머님을 위로한다. 유령과 유령의 만남이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위안부 할머님의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진심이 따스하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우리의 역사에 마음 아파할 수 있는 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간다. (...)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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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5-3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덕경 할머니 이름은 익히 들었는데 대필작가의 글로 나왔군요.
전에 그림책으로 나온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이 책일까요?

2009-06-08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맛살라 인디아]의 서평을 보내주세요.
맛살라 인디아 - 현직 외교관의 생생한 인도 보고서
김승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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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 '맛살라 인디아'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저자는 맛살라가 인도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징하는 안성맞춤의 단어라고 말한다. 맛살라는 원래 인도의 향신료에서 나온 말로서 수많은,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맛살라는 단순히 향신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인종, 종교, 문화에도 적용되어 인도의 참모습을 알게하는 핵심 용어가 된 것이다.  

저자는 2006년 2월부터 인도 주재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으로 근무하면서 인도 땅을 밟으며 인도의 공기를 호흡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인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란 화두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내놓았다.  

인도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책에 적힌, 인도에 대한 표현만도 아주 다양하다.

미사일을 만들어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싣고 가는 나라,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나라, 첨단과 고속 성장 그리고 극심한 빈곤과 카스트 차별이라는 명암이 공존하는 나라, 양파처럼 까도 까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나라, 영적인 위대함과 형이상학적인 문명을 가진 나라,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나라   

이렇듯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도는, 더군다나 인도를 신비주의적 시각으로 그린 수많은 책들에 의해 그 이해는 그저 희미하고 아득하기만 할뿐이었다.  

그러함 속에서 인도의 산업, 경제, 정치, 교육 등 아주 현실적인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은 남다른 빛을 뿜는다. 책이 담고있는 인도의 현실상에 대해 세세히 소개해보면  

자동차 시장은 소형차가 주도/ 인도 IT, BT 도약을 준비/ 인도가 중국을 앞설 수 있는 까닭/ 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가/ 유인 우주선 발사 예정/ 인도 부동산 시장/ 일본의 인도 챙기기/ 아시안 게임 유치 경쟁  

이와 같이 다른 책, 자료를 통해서는 접할 수 없었던 인도의 현실적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인도의 이모저모'라는 장을 통해 개인적인 감상을 섞어 인도의 역사와 종교, 요리, 여행, 영화 등을 소개하고  '인도에서 한국을 만나다'라는 장을 통해서는 한류, 한국전쟁 포로, 한국기업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도의 현실적 모습을 다양한 주제별로 보여준다는 이 책의 특징은 분명히 기존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어떤 인도관련 책자들도 갖지 못했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도의 현실을 알려줄 이 책의 일독을 권해본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기존의 인도관련 서적과는 차별되게, 인도의 현실상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인도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인도를 신비주의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한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인도는 미사일을 만들어 소가 끄는 달구지에 싣고 가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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