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산책 1 - 20세기, 유럽을 걷다
헤이르트 마크 지음, 강주헌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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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너무 많은 격동을 거쳤지만 한 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살아있는 역사’이다. 윗세대가 목도한 바로 그 일이 지금의 세대에게도 뚜렷한 기록으로 전해지며, 이것은 후대에게 숙명적인 과업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도 한다. 8월 28일 '극우파’쪽 인물인 노다가 일본 총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일관계에 악영향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의 기저에 바로 20세기 우리나라 역사가 망라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은 20세기의 유럽을 다룬다. 지난 세기를 어떤 말로 축약할 수 있을까. ‘전쟁’와 ‘개발’이 아닐까 한다. 이 책 1권은 1900년부터 1938년까지의 유럽정세를 다룬다. 맥락은 단 하나가 출현한다. 전쟁. 뭐, 그것밖에 더 있겠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650페이지를 할애하여 다뤄내고 있다.



저자가 직접 1999년도에 유럽여행을 한다. 그 당시의 유럽열강들을 방문하여 역사의 현장에서 느꼈던 나름의 현장 스케치와 관련인사들과의 대화를 당시의 역사와 엮어서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1946년 로이바르덴 출생.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법학과 사회학을 전공했고,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언론계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2009년에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대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를 받았다.



책은 당시 정세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기간별로 나누고, 국가별로 이동하며 자세히 다룬다. 실제로 저자의 여정을 지도로 표시하고, 독자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식으로 전개된다. 보통의 역사서는 ‘자료’를 담지만, 이 책은 저자가 찍은 지금의 사진들을 담는다. 또 유럽사 ‘산책’이다 보니까 저자의 목소리에 특유의 색깔이 많이 담겨있다.



모든 나라와 정치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역사를 쓰려 한다. 그들은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마치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초상화처럼 보이려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패배자들은 그 어떤 자화상도 그릴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단지 사라질 뿐이다. 동시에 그에 대한 이야기 또한 완전히 없어진다. (p. 377)



주제의 선정도 신선하고, 내용의 전개도 산발적이라서 보통 접하던 일반 역사서의 흐름과는 상당히 구별된다. 특히 큰 역사의 줄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데, 가령 소련과 관련하여 ‘발트3국’의 당한 수난의 누적과 거기에서 촉발된 반유대정서의 원인을 밝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국가 베텔 요양소가 나치 저항운동의 본보기가 아닌 나치 협력의 숨은 조력자였음을 새롭게 조명하는 부분도 있다.



세계대전에 깊이 연관된 국가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여정은 2차대전의 발발을 맛보기로 언급하면서 끝맺고 있다. 2권을 얼른 사라는 소리지 뭐. 동서진영의 대립을 중심으로 정치적 색깔에 따라 전쟁당사국을 중심으로 산책하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전쟁피해자인 약소국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하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약소국의 피해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는 면에서 ‘독자 개인의 공부량’을 던져주는 책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이 많이 드러난다. 흥미롭게 볼 점도 많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이탈리아에 ‘무솔리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이 많다는 점. 스페인 내전이 세계대전에 있어 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는 점. 여러 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또 이 책을 통해 봐야 할 도서의 수도 늘었다.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잠깐 내려놓기가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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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죄 죽이기 - 삶 속에서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개정판
존 오웬 지음, 김창대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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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책이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읽고자 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청교도적 신앙’의 색깔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수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앞에서 더 많이 깨질 수밖에 없다. 근래에는 한국에서 가장 청교도적인 설교를 하는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찾아서 듣는다. 심령을 후벼 파내는 영적 각성을 주고 말씀에 깊이를 체험하는 은혜에 많이 닿기 때문이다.



청교도적 신앙은 예수 믿어 잘되고 이런 저런 복 받아 살다가 편안히 천국 가는 삶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복음의 본질로 깊이 들어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확실히 믿고, 구원받은 삶에 요구되는 신자의 자세, 신앙의 성숙과 순수, 영적 싸움. 그리고 사명에 대한 순종 등 그야말로 ‘택함의 은혜를 얻은 믿는 자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가차 없이’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죄’다. 과거나 지금이나 시대의 타락을 목도하면서 또 겪으면서 사는 이 세대 성도에게 ‘죄’란 너무 무겁고 피하고 싶은 주제다. 죄가 만연한 시대이니 거기에 묻혀서 ‘세상 죄의 심각성’만 생각하고 정작 하나님 앞에서의 ‘내 죄’에 대하여는 무감각해지거나 무관심해지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다.



그래서 더 이런 책은 꺼리게 된다. 주일 강단에서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죄에 대한 이야기. 무엇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 ‘죄에 대한 싸움’은 얼마나 많은 영적 소모전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설령 성령의 은혜로 가슴을 치는 통회의 기도를 올리고 자유함과 영적 회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라도 반복되는 죄를 향한 미끄러짐은 ‘답이 안 나오는’ 자신을 바라보며 체념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끔은 죄라는 인식을 아예 ‘외면’하면 하나님도 슬쩍 눈감아주지 않을까 하는 개념 없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순간적인 죄의 미혹이 나를 속이고 무너뜨리기에 내 신앙적 토대는 너무 간단·미약하다.



이 책은 죄를 정의하고, 죄를 죽여야 하는 성경의 명령들을 끄집어내고, 죄를 죽일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을 나누며 그것을 위한 성도의 의무와 자세를 전달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의 타겟이 ‘성도’라는 점이다. 어영부영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 아닌 진짜 신자들이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기에 거듭 ‘성도’라는 말로 독자층을 한정한다.



3가지 지침, 9가지 방법 이라는 타이틀로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있지만, 책은 그냥 쭉 읽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속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일단 ‘적극적’으로 죄와 싸울 마음을 얻게 된다. 계속적인 ‘적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죄의 속성이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독자 스스로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게 한다. 얼마나 많이 찔리고 걸리는지, 지금까지 ‘죄’에 대해 너무 안일했음을 절감한다.



그러면 죄로 인한 찔림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과 행동 양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죄의 덧에 걸려 괴로워하기 전 당신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과도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는가? 당신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옛 죄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죄를 짓도록 허락하시기도 한다.

너무 죄의 고통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 고통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은혜로 주신 기회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p. 131)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항상 그런 분노로 대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와 같은 식으로 다루어 당신의 양심으로 하여금 당신의 죄를 증거케 만들 때, 그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은 당신의 영혼에 매우 큰 고통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당신은 이미 강퍅함에 사로 잡혀 있다는 방증이다. (p. 141)



읽다보면, 성도로서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언어들이 발견된다. 이 책은 죄 때문에 밤새 울어도 보고, 가슴 찢기는 통곡도 해보아 회개를 경험한, ‘보혈의 은혜를 받은 성도’만이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 가득하다. 그리고 ‘믿는다는 오만함’으로 저지를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일일이 거론한다.



읽으면서 줄 칠 가르침들이 한바닥이었다. 특별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 아주 명료했다. (p. 165-173) 개인적으로 너무 적절한 시기에 죄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죄에 대한 어떤 타협도 용인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책이 가진 뉘앙스에는 조금의 ‘야들야들’한 융통성도 없다. 그저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17세기 초의 설파되었던,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확고한 청교도신앙의 색깔을 만났다. 그래서 더 많이 나를 깨지게 했던 책이다.



‘죄’를 죽이는 경지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만큼 신앙생활에 헌신적으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단순하지 않은’ 방법들을 여러 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헉’소리 절로 나는 신앙을 견지해야 ‘죄’를 분별하고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성령이 도우시는 은혜’만이 가능한 길이다. 구별되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 늘 죄를 죽이는 신앙을 펼쳐가야 하는 나에게는 지금, 십자가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달아야 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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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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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뚜렷하게 사형제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김길태나 조두순 같이 자기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사이코패스 아동성폭력살인범들에게도 이 사회가 생명권을 보장하면서 ‘살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린 생명의 비참한 죽음으로 온 사회에 비탄에 잠겨있는데도 정작 그들은 세금 걷어 만든 교도소에서 밥 먹고 눈뜨며 ‘생각’이란 걸 하고 평생 산다는 그 자체가 시원치 않았다.



철창 격리가 해결책의 전부라면, 차라리 어디 무인도 개간사업에 징용되어 땡볕에서 더럽고 힘든 일이나 평생 시켜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사회에 대한 악밖에 남지 않아 살인이 일종의 게임인 사이코패스에게 ‘인권존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무고한 인생의 인권을 묵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지금의 이 사회는 너무 ‘교화의 환상’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벤트 룬드. 전과가 화려한 사이코패스 아동성폭력범이다. 책의 첫 부분은 그가 두 아이를 유인하여 성폭행하고 날카로운 둔기를 항문과 질에 찔러 넣어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아이를 보는 시각은 일반인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어린 아이를 성폭행하고 죽이는 것에 나름의 ‘정당한 사유’가 있다.



화창한 날이다. 6월의 어느 목요일, 무럽고 햇살이 따가운 그런 날. 음탕한 꼬마 창녀 둘이 앞장서서 공원의 오솔길을 걷고 있다. 밤색 머리 계집은 누구든 건드릴 수 있는 창녀. 키 작고 약간 통통한 금발 머리 계집은 남자만의 창녀. 음탕한 계집들. 창녀들. 화냥년들. 긴 머리며, 얇은 외투, 딱 달라붙는 바지까지. 용두질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p. 25)



경찰에 잡혔고, 교도소에서 정신병원으로 호송되는 중에 탈옥한다. 그리고 그날 프레드리크 딸이 유치원에서 그에게 유인되어 범행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딸아이의 장례식 날 경찰은 프레드리크에게 범인이 자살하기 전까지는 그 범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드리크는 범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또 한 번의 범행대상을 물색하는 장소에서 총으로 쏴 죽인다.



프레드리크는 이 일로 법정에 선다. 온 나라의 이목이 이 사건에 집중되었고, ‘법과 정의’가 어느 편에 서야 정당한 것인지 관련인물들의 흑백으로 나뉜 시각을 내비친다. 그리고 독자에게 더 깊은 사고력을 요하는 후속결과들을 다양하게 조명하고 있다. 이 소설은 살인범 ‘벤트 룬드’와 살인범 ‘프레드리크’를 보는 시각을 달리하면서도 단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열린 사고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소설이다.




프레드리크가 맞이한 인생의 결말은 참 아이러니했다. 그러나 그 재판의 과정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사회가 책임지지 못한 범인을 해결한 영웅’으로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로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과 갈등, 혼란과 무기력감. 그런 것들이 더 크게다가 왔던 작품이다.



조금 더 장편이었으면 어땠을까. 마무리에 보여주는 반전의 기술이 어설펐고(초반부터 티가 확 난다) 교도소라는 장소, 특별감호구역 책임자 렌나트라는 인물에 대한 접근이 비교적 얕아서 아쉬웠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의 팩트, 그것이 잘 살아있었고 독자에게 보다 다양하고 깊은 생각을 부여했다. ‘근본적으로 짐승 같은 인간들을 배출해내지 않는 사회가 되기 위해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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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 여섯 개의 도로가 말하는 길의 사회학
테드 코노버 지음, 박혜원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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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크면서 ‘해라’ 보다 ‘하지 마라’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자란다. 그러니까 ‘안 된다’하는 세뇌에 너무 일찍 노출되고, 오히려 그 때문에 반항기의 정도가 더 심각한 수준이 되어간다. 커서 철들고 나야, 혹은 자기도 애 낳아서 길러봐야 그 때 왜 ‘안 된다’가 그렇게 많았는지 끄덕이게 되고, 지 애한테도 ‘안 돼’하는 게 속속 생긴다. ‘로드’란 책을 읽고 났는데, 서두부터 뭔 자다가 봉창일까. 이 책에서 나는 저자를 이런 포커스로 좀 건드리고 싶었다.



저자. 테드 코노버.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여러 유력매체에 기고하고 있는 논픽션 작가다. <뉴잭>이라는 책으로 2001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고, 2000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2003 구겐하임 펠로우십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다른 저서로는 <화이트오웃><코요테들><정처 없이 떠돌기>등이 있다.



책은 세계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고 그것이 ‘길’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몸소 겪은 체험기다. 형식은 그 ‘길’을 따라 동행한 일반적인 기행문이다. 주제는 6가지로 보다 장기간에 걸쳐 저자가 다녀온 길들을 소개하고 있다.



마호가니의 유통을 다루기 위해 페루 고산지대의 깊은 숲속까지 들어가서 직접 나무 베는 이들과 동행한 여정. 인도 잔스카르에서 교육을 위해 얼음길을 나서는 이들과 동행한 여정. 거기서 개발의 폐혜를 막기 위해 길을 닦지 않는 정부의 입장과 개발이 없으니 빈곤의 수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국민들과의 대립된 입장차를 만난다.



이스라엘 ‘웨스트뱅크’주변의 검문소들을 거치면서 권력이 장악한 도로 내 만행들을 목격한다. 케냐의 화물트럭에 동승하여 ‘에이즈를 퍼뜨리는 길’을 다니고,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앰뷸런스에 올라 가난의 처참한 비극을 본다. 이것은 또 하나의 주제인 중국의 신흥 고속도로의 부의 편중과 대치된다.



여러 가지 시각이 나올 수 있는 사회학적 접근인데, 정작 저자는 보고서를 내민다. ‘이런 상황이었고, 뭘 봤고, 그곳 주민들은 이런 얘기를 하더라.’ 정도? 더 나아가 저자 자신이 취하는 입장이나 주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더 기행문 정도로만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때의 문제점은 단순한 기행으로서의 전개라 쳐도 이 책은 재미가 없다. 눈앞에서 겪은 세계적인 중대 사안을 가지고도 흐리멍덩한 경험들을 풀거나 단편적인 사람들만 모아놓은 흥미롭지 않은 얘기만 이어나간달까.



그래도 아주 은연중에 내비치는 저자의 입장이라는 것은 이렇다.

‘미국은 개발의 정점을 찍었고, 자국에는 더 이상 좋은 나무가 없어서 마호가니를 수입하는 주제에, 빈곤한 국민들이 떼로 드글거리는 페루의 경제는 아랑곳 않고 환경조약에 서명시키고, 환경수호에 협조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나’.

‘미국은 길이라는 길은 다 닦아서 기반시설 다 확충해놓고 인도에는 길 닦아서 누릴 발전보다 환경보호가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나’,

‘미국은 자동차산업을 이만큼이나 벌려놓고 몇 억대의 차를 굴리면서도 중국에게는 미국을 본받지 말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세계가 환경문제를 화두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나선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린피스가 1971년도에 출범했고, 우리나라는 1996년에 와서야 환경의 날을 지정했다. 그리고도 한동안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경제적 개발’의지에 밀려 뒷전이었다. 세계 각국은 이제야 발등에 불이 붙은 것 마냥 ‘환경 보호’하자고 난리버거지를 치고 있다. 얼음이 녹는 속도를, 이상기후의 변화를, 바다의 조류와 대기오염의 정도를 실제로 경험하면서 그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제야 ‘개발’의 단맛이 보겠다고 ‘길 닦자는’ 후진국들의 그 후진 생각이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물론 그들의 극에 달한 가난과 도저히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사회구조적·정치적·종교적 문제.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환경보호가 먼저 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진국들이 그들에게 환경을 논하기에 무자격인 이유가 ‘내가 먼저 개발했으니까 할 말 없는 처지’라고? 그건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가르치는 부모에게 아이가 ‘엄마도 거짓말하잖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론, 엄마가 거짓말을 안 하고 살았다면 가장 좋은 본이 되겠지만, 해봤기 때문에 그 결과를 아니까 자기 자식에게는 ‘하지 말라’고 교훈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계속 강수량이 줄어서 걱정인데, 아마존 유역을 개발하고, 그 세계적인 산맥들을 다 북한산 둘레길처럼 깎아서 ‘등산객 산불조심’이나 써 붙여 놓으면 대단히도 후회 없는 개발이겠다.



자동차 그만큼만 굴려도 중국은 그 많은 공장 때문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다른 나라를 압도하고 있는데, 고속도로 길이로 미국을 따라잡아서 무슨 큰 업적을 세울 거라고 자국의 현 환경 오염도를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말만 들으면 그 나라의 인구 절반 이상이 자동차 굴려대는 날을 목표로 삼았다는데, (안 그래도 미친 듯이 수입하는) 석유량을 앞으로 또 어디에서 다 감당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중국은 지금 고속도로 뿐만 아니라 고속철도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그야말로 개발의 온상이다.



개발, 발전만 가능하다면 한 나라가 먹고 사는데 그것만큼 쉽고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환경의 소중함과 그 보존의 중요성을 절실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의 미래가 달린 그 문제는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타협할 소지가 전혀 없다. 고속도로? 산을 깎아? 그거 한 나라들은 지금 잔인한 환경재해를 계속적으로 만나고 있고, 개발이 얼마나 허망하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



개발의 쓴맛으로 죽어나가는 것들은 살릴 방도가 없다. 개발의 도상 중인 나라들을 마냥 장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개발을 꿈꾸는 나라들이 자체적으로 살아갈 방도까지 논하기에는 앞서 너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다. 지금 당장 배고파서 허덕거리는 이들에게 환경문제는 엿이나 먹으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큰 눈, 장기적 안목으로 봤을 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중대사임에는 틀림없다. 때문에 저자가 본 처참함에 대한 연민으로 그 같은 시각을 내놓는 것은 ‘미래를 제쳐두고 일단 이 세대만큼은 책임지고 먹이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모처럼, 저자의 지루하고 긴 여정 속에서 빈민사회의 심각성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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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 문화여행자 박종호의 오스트리아 빈 예술견문록
박종호 지음 / 김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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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 되면 KBS1에서는 KBS 신년음악회가 아닌 빈 필의 공연을 방영한다. 올해도 본 기억이 난다. 빈 필은 특유의 비엔나틱한 색깔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독보적인 색깔, 어느 지휘자를 만나도 변하지 않는 전통을 참 좋아한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요한 스트라우스 등 전설의 음악가들이 사랑한 음악의 도시라고만 생각해서 가면 비엔나 왈츠나 실컷 추다 올 것만 같았던 빈.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 문화의 메카일 줄이야.



저자는 박종호. 엇! 이런 책을 의사가 썼네? 정신과 전문의로 한양의대와 한림의대 외래교수를 하다가 프로이트를 본받아 개업의가 된 그는 오페라와 예술 전반에 관한 칼럼과 해설을 쓰는 오페라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고, 이 책과 같은 예술 도시 여행 저술가로도 활동 중이다. 풍월당 설립자이다. 이야, 무슨 의사가 클래식 서적만 7개째냐. 멋있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닌 저자다.



빈은 세계가 인정한 예술의 도시다. 음악, 문학, 철학, 미술, 연극, 무용, 건축 등 모든 예술이 망라되어 총체적으로 빛나고 있는 도시. 거기서 저자가 만난 예술은 꼭 어디를 들어가서 돈 주고 보는 예술뿐만이 아니라 걸어 다니면서 눈에 걸리는 모든 것이 예술 그 자체였다.



책은 예비여행자들을 타겟으로 했다. 예술의 장르나 예술가로 묶지 않고, 돌아다니는 구획으로서 나눈다. 19세기 말에 빈 정부는 근대식 전쟁에 대비하여 성곽해체를 결심하고, 그 자리에 넓은 도로를 건설한다. 이것을 ‘링 슈트라세’라고 한다. 빈의 모든 문화, 교육, 정치는 이 ‘링’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저자 또한 빈에 처음 간다면 이 링부터 한 바퀴 돌아야 한다고 추천한다.



저자 또한 이 링을 중심으로 나눈 구획으로 주제를 정하고, 그 구획 안에서 볼 수 있는 건물과 담긴 예술, 예술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된 예술 관련 건물들에 대한 사진이 실려 있는데, 빈의 뛰어난 건축술과 그 안에 담겨진 혹은 담아내는 예술작품의 세계적인 수준이 당장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감탄 외에 무엇을 더 하겠나. 도시 안에 내재된 예술의 경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예술의 문화도시는 당시 정치체제나 사회 관념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간 신 예술파들의 등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빈의 시각을 담당했던 오토 바그너나 클림트의 무리들의 영향력이 지금의 빈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빈 필의 존재가 좀 약소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빈은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나라다. 다음은 클림트의 자리를 넘보았던 '에곤 실레'를 두고 저자가 한 말인데, 인상적이었다.



천재란 결별이며, 기존 것과의 결별 없는 천재는 있을 수 없다. (P. 269)



빈의 ‘커피’가 이렇게 대단한지 미처 몰랐다. ‘빈이 곧 카페’임을 절감하게 하는 그의 ‘카페소개’가 책에 중심부를 장악하면서 독자에게 포트에 물 올리게 하고 있다. 마지막은 음악가 베토벤의 지역과 화가 겸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의 지역을 다룸으로써 나의 사랑 모차르트님을 조금 서운하게 하고 있다.



딱딱하지 않은 문체에 흥미로운 소개들로 가득찬 이 도서는 그야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빈’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능력만 된다면야 이민도 고려해보고 싶은 예술로 꽉 찬 도시다. 아쉬움은 독서광의 나라 오스트리아인들이 찾는 대형 ‘서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빈에서 책을 파는 곳들의 건축과 그 분위기도 알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빈의 현대예술들을 맛보게 해주고,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어 빈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책이다. 이 책만 들고 가도 빈에서 빈둥댈 일은 없는, 보는 것만으로도 나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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