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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
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김정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담비사 모요의 <미국이 파산하는 날>이라는 책을 읽었다. 역자가 ‘How The West Was Lost’ 라는 원제를 중심내용에 맞게 변역한 제목이다. 이 책에서 모요는 미국이 어떻게 하다가 ‘그 지경’까지 왔는지 주식, 부채, 주택, 연금, 소비, 기술 등 여러 분야의 현주소를 분석해낸다. 또 중국의 무서운 성장세를 다루며 4가지의 향후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녀의 책엔 ‘직설’이 가득했다.
이 책은 그녀의 스승, 니얼퍼거슨의 책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그 명성은 가히 현존최고라 자부한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하버드대학교 비즈니스스쿨 교수, 런던정경대학교 교수, 옥스퍼드대학교 선임연구원,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모요의 저서와 같은 맥락의 주제를 띤 이 저서는 제자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스승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아니면 제자를 발리게 만드는 개구진 스승의 장난기이거나. 암튼, 이 책을 읽어가는 모요는 문득 자신의 저서에 대해 ‘씨빌라이제이션!’ 하고 외치게 되지는 않을까.
책은 서양의 문명을 꽉 잡고 있다. 서양이 세계패권을 쥐락펴락하며 반백년을 호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 서양의 그 우위가 넘어가고 있으니까. 어디로? 짱깨들의 나라로.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가 두 번의 전쟁으로 처칠이 처치 곤란한 빚더미에 앉은 지 오래니, 태양의 왕이 통치했던 나라라고 별 수 있으랴. 요즘은 그저 여기저기서 ‘재정 위기’로 빌빌대고들 있다.
‘경쟁’에서 원정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시기에 중국이 유럽보다 부강했지만, 끝내 ‘항해’와 그에 부가되는 ‘무역’에서 우위를 잃었다. 유럽열강은 항해를 시작하여 식민국 의 발판을 마련한다. ‘과학’에서는 유럽의 순수과학, 지구과학, 사회과학, 응용과학 등의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나열한다. ‘재산권’에서는 스페인의 배가 남미로, 영국 배가 북미로 들어가서 이뤘던 정착방식의 대조를 조명하고, 노예제의 관행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다.
북아메리카가 남아메리카보다 잘살게 된 단순한 이유는 다수에게 분배된 재산권과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영국 정책 모델이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한 스페인 모델보다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노예제도와 인종 분리정책은 미국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고, 그 유산이 아직도 남아 10대 임신, 저조한 교육 성취도, 약물 남용, 부당한 투옥 같은 고질적인 문제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p. 237-8)
‘의학’에서는 서구의 ‘전쟁사’를 훑으며 나치의 역사까지 훑어 ‘의학발전의 수치스러운 단면’을 보인다. ‘소비’에서는 ‘서양의 의복사’를 산업혁명부터 20세기전반에 걸쳐 살펴본다. 물론 여기서도 전쟁이 빠질 수 없다. ‘20세기니까’. 직업에서는 ‘서양의 종교’를 다룬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현재 타락한(종교적 입장) 서구와 선교의 결실이 피어나고 있는 중국을 들춘다.
책이 뭐 기대만큼이나 깊이 있는 조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 일련의 주제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역사적 시각으로 봤을 때 잃어버린 많은 우위로 스스로 저물고 있음을 느끼는 서구, 그 잘나갔던 문명이 최후의 현상으로 막 내리기 전에 ‘좀 잘해보자’는 것이다. 중국이 문제가 아니고, 서구가 쌓았던 우월한 문명의 패키지가 지속적인 건재함으로 리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책이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이야기들 때문에 재밌고, 저자의 사고를 엮어내는 문장력 때문에 더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를 담고 있는데, 그 초점이 심플하고 핵심위주이기에 차근히 읽다보면 ‘뭘 위해 읽지 않아도’ 술술 읽히는 책이다. 내용 그 자체만으로도 배우는 점이 많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서 교훈을 얻기도 한다.
서구에 초점을 맞추지만, 서구의 시각은 아니다. 열강의 위업을 드러내기도 하고, 제국의 치부를 꺼내기도 한다. 서구가 이끌어온 온 역사의 핵심을 짚으면서 독자에게 건강한 시선을 심어주는 세계적인 석학다운 좋은 책이다. 삽입된 사진 자료도 좋고, 군더더기 없는 번역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니얼 퍼거슨의 깊이 있는 역사해석을 만날 수 있는 재밌는 서적이었다. 서구의 미래? 알아서 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