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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제목은 그 책의 분야 혹은 장르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가령 예술에 대한 책과 예술을 위한 책은 제목에서부터 구분할 수 있는데, 대개 전자는 내용의 핵심어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고, 후자는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내보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책은 제목에서 벌써 반전을 만들고 있는데, 과학논문 주제 같은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혀 소설책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제목이어서 호기심이 일었다.
저자는 앤드루 포터. 197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 출생. 뉴욕의 바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워크숍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메릴랜드 대학에서 방문 작가 자리를 얻으면서 발표한 단편들이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아줄>은 스티븐 킹이 선정하는 녗미국우수단편선집’에 들어갔으며, <외출>은 푸시카트 상을 받았다. 현재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서 살면서 트리니티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책은 2008년에 출간한 처녀작으로 단편소설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했으며, 스티븐 터너상, 패터슨상, 프랭크 오코너상, 윌리엄 사로얀상 최종후보작으로 뽑혔다.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제 각각 다른 시대와 장소, 그리고 색다른 사건들로 이어나가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주인공이 지닌 성격 즉 본성적인 면에 있어서 그리 다르지 않은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고 있다.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고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벅찬 문제에 놓여버리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있으나 저자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심리는 크게 와 닿는다. 사실 경악스러울 정도로 공감이 가는 사실적인 심리 전개에, 또한 그 깊이를 문학적으로 술하게 감아놓는 터에 하나하나 매료되어 읽었다.
단편소설은 한편이 끝나고 곧바로 다음페이지에 시작되는 새로운 작품에서 독자들이 느끼는 괴리를 줄이는 작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은 각 작품마다에 뚜렷한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료하면서도 어린 여운이 감돌게끔 하는 독특한 마무리기법이 돋보인달까. 작가가 20대 중반 즈음 생계를 유지 때문에 힘든 세월을 겪었다고 하는데, 젊은 나이에 처녀작으로써 이런 작품을 써내기까지 저자가 얼마나 삶과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문학이다.
번역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중에서도 작가가 쉼 없이 찍어댔을 ‘콤마’의 호흡을 있는 그대로 거의 살려놓은 느낌의 번역이 참 인상 깊었다. 심리적 호흡에 맞춰나가는 템포, 저자만의 운율이 있는 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성격을 짐작하자면, 매우 침착하고 말수가 적고 배려심 많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다 그런 면들이 짙고, 생각이 많아서 대화보다는 사색하는 장면이 더 많고,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서서 잘 흥분하지 않는 면모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그려내는 인물들이 매력적이었고 그 인물들의 심리에서 비롯된 행동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독자의 심리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을 띨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굳이 뭘 나타내려는 인위성은 없다고 보인다. 그저 읽어가면서 조금 더 스스로의 인생에 성숙함을 안길 수 있는 촉매가 되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편은 단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었다. 나도 내 인생의 로버트를 만났고 이별했기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그때 그가 너무나 쉽게 나를 이해해버리는 것 같아화가 났지만 그가 훗날 내게 그랬다. (…) 그가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같았기 때문이다. (p. 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