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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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억~~ 끝났다.’ 절로 터지는 탄식 한마디를 내뱉고는, 냉큼 거울 앞으로 가서 초췌한 몰골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 한 자루를 입에 물고서는 신음을 뱉으며 대자로 뻗었다.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반응이다. 찌는 듯한 도시의 폭염 아래 굼뜨게 빌빌대는 뇌 때문에 몸만 늘어지게 되는 책이었달까.



‘얼마나 깊게 보느냐’에 따라 책에 대한 평이 판이해 질 수 있는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깊게 보는 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책이다. 그러나 나, 분수도 모르고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친 격이다. 전후 격동의 시기에 대한 관심이 좀 있다고 해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작품을 좀 읽어봤다고 해서 이 책이 술술 넘어가지는 않는다. 사르트르 전문가가 이 분야에 관한 자신의 모든 전문지식을 이 책에 정열적으로 쏟아 부었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의 기반이 잡혀있지 않다면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역사의 크고 작은 맥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2004년에 이 책이 출간될 당시 저자인 에런슨 ‘카뮈와 사르트르’라는 제목을 쓴 것으로 보이지만, 역자들은 “요즘은 세계적으로 ‘민주화’가 중요한 시점이므로 ‘사르트르’의 이름을 ‘카뮈’의 이름보다 앞에 두었다”고 말한다. (p. 8) 뭐하는 짓일까 싶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만 보자면, 이 책은 결단코 카뮈의 이름이 뒤에 놓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역자가 ‘사회적 이해’를 고려해서 이름의 순서를 바꿔 넣었다는 것에, 저자에 대한 월권을 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총 10장으로 되어있다. 이 책에 3장인 ‘전후의 참여’에 도달하는 동안 나는 이 책을 들고 5번은 졸았다. 처음부터 예상보다 지루하다. 이 책의 주요 특징 중에 하나는 ‘중복언급이 지나치다’는 것인데, 프롤로그와 1장 2장은 벌써부터 그런 조짐을 많이 내비치고 있다. 특별히 1장의 ‘첫 만남’은 말 그대로 첫 만남만 좀 다뤄주지, 주제에 맞지 않는 내용들로 장황하다. 2장까지는 그들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요약이 이루어진다. 이들 상황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거나 다 읽기 바쁜 이들은 그냥 3장부터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간단요약하자면, 카뮈와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운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문제는 해방이 되면서 시작된다. ‘폭력’.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폭력을 동반해야 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카뮈는 다른 문고리를 잡았다. 전쟁에는 ‘깨끗한 손’만 사용하고, 폭력은 최후의 수단으로써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 194) 그래서 카뮈의 ‘이상주의’는 고독한 자리에 앉았다.



사르트르는 폭력과 혁명의 선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노선에 들어선다. 공산주의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세계변화라는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의 악행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저자는 사르트르가 공산주의의 유혹에 굴복했던 주요한 이유는, 정확히 공산당이 노동자들을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p. 361)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은 사르트르를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여기에 사르트르는 삼류기자의 비판적인 서평으로 카뮈에게 응수했다. 이 사건은 둘을 반목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리고 둘을 침묵기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에 저자가 이 불화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이 책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대목이 되고 있다.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정치적 사유 체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던 폭력에 대해 자기기만적 태도 속에 빠져 있었다. (p. 469)



책은 역사적 상황과 맞물린 두 철학자의 의식 흐름을 밀접하고 디테일하게 전개하고 있다. 배경에 대한 설명의 범위가 크고, 그 내용이 자세하다. 그리고 전문적이기에 읽다가 지칠 수도 있다. 두 철학자의 주요쟁점이었던 ‘폭력’이라는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폭력은 폭력을 양산할 뿐, 어떠한 명분으로도 폭력은 용인할 수 없는 제거 대상 그 자체라는 생각이다. 현재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바람이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지녔다고 해도, 그것이 무고한 생명의 가치 위에 있을 수 있나. 목적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수단 또한 정당해야 마땅한 것이고, 생명에 위협이 없는 한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함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맥을 잡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진 장 안에 구분점이 명확치 않게 설정되어있다는 점이다. 분명한 분류법으로 체계적인 정리를 해주었으면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이 책을 비전문인의 무지한 시각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두 철학자들의 서적이나 기고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식빵 한 조각 입에 구겨넣듯 입만 벌리고 꾸역꾸역 넘겼다. 그런 아쉬움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서적을 더 많이 접하고 그 시대에 관한 공부를 좀 더 깊게 함으로써 달래고 싶다.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는 더 많은 부분에서 저자와 공감하며 끄덕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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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팡 수난기 - 루이 14세에게 아내를 빼앗긴 한 남자의 이야기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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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문정의 문화 에세이인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를 읽었는데, 몽테스팡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그 서적에서의 언급이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의 귀족가문 여자들은 결혼여부와 관계없이 왕에게 선택되기를 바랐으며, 국왕의 관심을 받으면 도리어 남편이나 가족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태양왕’의 시절이 아닌가. 그러나 왕에게 후작부인을 뺏긴 우리의 몽테스팡 후작의 거동은 이러하였으니.

 

『젊은 혈기에 좌충우돌하면서 귀족들이 여는 문학 살롱과 공적인 장소에서도 자신의 아내와 루이 14세의 관계를 떠들어대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 심지어는 왕궁 무도회에서 아내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 中 p. 112)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는 루이 가(家)의 프랑스 왕정을 중심으로 베르사유궁의 자취를 더듬는 책이기에, 몽테스팡은 지나가는 에피소트로 등장한다. 그러니, 여기서 몽테스팡은 그저 오쟁이 진 남편의 안타까운 면모를 객관적이고 담백한 필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장 퇼레의 소설은 이 남자의 인생을 소재로 하여 한 편의 희극을 선사하고 있다.

 

장 퇼레가 이렇게 훌륭한 작가인 줄 난 미처 몰랐다.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시나리오도 쓰면서 희극배우,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는 그는 글쓰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랭보를 위한 무지개><오랜 고통><중력의 법칙><오 베를렌><자살가게>등 10여편의 저작이 있다. <나, 프랑수아 비용>은 ‘전기소설 상’를 수상했고, <달링>은 영화화되었다. 이 책으로는 ‘2008 메종 드 프레스상’을 수상했다.

 

열림원에서 그의 작품을 많이 출간했는데, 번역은 모두 성귀수씨가 맡았다. 열림원은 주요 작가마다 전문번역가가 한명씩 붙어있는 것 같다. 불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굵직한 책의 번역 편수도 많고, 실제로 시인으로 등단도 하신 글쟁이다. 이 책은 번역의 몫이 아주 컸는데, 그런 점에서 역자에게 고마울 만큼 그야말로 ‘역작(力作)’이다.

 

부부금술이 지나치게 좋은 몽테프팡 후작 부부, 흠이 있었다면 빚이 좀 과하게 많았다는 것, 더 문제는 이 후작이 돈 버는 수완은 없고, 어떻게든 한 몫 해보려고 자꾸 전쟁터에 나간다. 그런데 또 병력을 꾸리느라 빚져서 전쟁나가고 빈털터리 되어서 돌아오는 짓을 되풀이한다. 그 와중에 또 애는 낳아요.

 

몽테스팡 애편네는 특유의 입담으로 사교계에 입문하고, 공작부인 추천으로 왕비의 규방에 들어간다. 여색이 짙은 애편네는 자식과 남편은 나 몰라라 하고 궁궐에 가서 왕의 눈에 띄려고 몸을 사리지 않는다. 물론 이 얘기는 상식적이지만, 이 소설은 후작부인은 거의 다루지 않고, 후작의 상황과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꾸린다. 때문에 더 재밌을 수 있었던 부인의 행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는다.

 

몽테스팡은 점점 미쳐간다. 믿었던 애편네의 배신과 쪼들리는 가난, 거기에 왕이 가하는 압박과 세상의 조롱. 모든 것이 그를 못 살게 굴지만, 그에게 정녕 힘든 것은 어쩌지 못할 부인에 대한 사랑이다. 애들은 또 어떤가. 큰 딸은 엄마의 빈자리에 시름시름 알아가고, 아들놈은 지아비와 다르게 신분의 격을 따져가면서 안하무인이 된다.

 

‘아주 지랄 똥을 싼다’고 할 만큼, 후작의 남다른 행동거지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리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스페인으로 도망을 가, 몇 년을 지내고 다시 돌아온다. 부인은 여전히 궁에서 애를 줄줄이 낳고 룰루랄라지만, 곧 루이14세가 그 여인에게 싫증을 느낀다. 후작은 그에게 부인이 돌아올 것을 기대함으로 마지막으로 그녀를 위해 또 빚을 지고 집을 꾸민다.

 

그러나 곧, 죽을병에 걸리는 후작. 세상만사는 왜 그에게 다 요지경인지. 그러고 나니, 후작부인은 수도원으로 쫓겨나 후작에게 빌빌대기 시작하고 그는 차갑게 거절한 후, 생을 마감한다. 후작의 마지막은 안타깝게 그려내고 있으나, 후작 부인의 생 마감 장면은 그야말로 ‘개나 물어갈’ 장면으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 재밌다. 콩트이며 시트콤 같다. 장이 넘어갈 때마다 ‘와우~와우~와우~와웅~’ 하면서 스스로 배경음악을 깔게 된다.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부인에게 유린당함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왕에게만 대적할 만큼 소중하게 여겼던 그의 아내와 가정,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수순이었고, 주인공은 무식하고 무능력한데다 무모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터져나오는 재밌는 장면들이 가히 압권인 책이다.

 

비극적인 사랑을 희극적인 필체로 두드러지는 웃음과 함께 전달한 저자의 능력을 높이 산다. 꿀꺽꿀꺽 잘 넘어가고, 다음 내용을 보지 않고는 잠이 안 올 정도로 재밌었다. 가끔 도를 넘는 그의 유머는 몰입된 독자를 끙끙거리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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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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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를 제대로 그려낸 최고의 작품성있는 소설,빨리 읽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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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13명의 유명 저널리스트들이 하나의 주제를 맡아 각자의 시선으로 경제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워낙 굵직굵직한 저자들이기도 하고, 담아놓은 주제 또한 포괄적이기에 읽으면서 세계경제 이슈들에 대한 시각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이리라.  

 

 

 

 

 

  

2. 중국 역사를 더듬어 권력자들의 권력쟁탈과 외교적인 처세를 논하는 책이다.  

일단 책이 가진 발상에서부터 참신하고, 고전역사로부터 따오는 교훈에 기대감이 크다. 중국 역사의 리더십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3.  저자 김영걸 교수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트위터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내용이 쉽고, 주제가 아주 실용적으로 잡혀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CRM에 대한 지식을 유용하게 얻어낼 수 있는 책이라고 본다.   

 

 

 

  

 

 

 

 

 

 4.  실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가 사장으로서 말 못할 속내를 시원하게 내놓고 있는 책이다. 그저 사장으로서 할 말만 하는 책은 아닌 것이,  심리학적 분석이 녹아있다고 한다.  

사장의 본심은 직원들이라면 꼭 알고 싶은 내용일진대, 이 책은 아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사장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다. 재미도 있겠고, 배우는 점도 많을 것이다.

 

 

 

 

 

 5.  요즘 기업들은 문화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추세이다. 어째서 이런 기업들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고 있는지 중요한 대목을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본다.  

최고문화경영자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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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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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험프리의 <위대한 명연설>이란 책에 소개되었던 많은 명사 중에 기억에 오래 남았던 인물이 있다. 쇼니족 추장으로 당대 가장 위대한 미국 원주민 지도자였던 테쿰세. 그는 원주민의 영토권을 주장하며 미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싸웠고, 템스전투에 전사하였다.테쿰세의 연설들은 역사의 뒷길로 비참하게 사라진 그 시절 원주민들의 목소리와 그 사양과정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 땅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명연설 中 p. 39>



『한때 이들 인디언은 행복한 종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쳐들어오는 백인들 때문에 비참해졌습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자신은 그 누구와의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당신들의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 백인을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명연설 中 p. 40>



테쿰세의 원주민 저항시기를 타고 한 50년 이상 더 내려가면 이 소설의 배경시점이 된다. 그때까지 미국은 원주민에 대한 정책은커녕 눈초리도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 오히려 원주민세력의 더 극성스러운 압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시절이다.



샤이엔족의 족장이 직접 워싱턴을 방문하여 천명의 백인 신부를 천 마리의 말과 바꾸자고 제안했다. 원주민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질병으로 종족의 대가 끊일 위기를 두고 결연한 마음으로 왔다. 미국은 발칵 뒤집혔지만, 곧 기득권의 정치적인 이득을 챙기고자 정신병원이나 공장에 있는 우울한 인생들의 자발적 동의서를 받아 여러 가지 포장을 통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메이 도드. 부잣집 처녀가 낮은 신분의 청년과 사랑에 빠져 동거하고 애 둘 낳고 살다가 어느 날 부모의 강력한 조처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원주민과 결혼이라는 이 제안을 받았을 때 그녀는 무조건적인 자유만을 갈망하며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기차에 올라 군대의 호송을 받는 중, 버크대위와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지고 여정의 마지막날밤 정을 통한다.



그리고 샤이엔족의 족장에게 발탁되어 그의 신부로 미개인의 생활에 동화되어 살아간다. 힘들고 역겨운 생활이지만 서서히 그 종족만의 특성과 문화를 존중할 수 있게 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사람을 죽이고 난 뒤의 시체처리 부분의 잔인성, 그것이다.



중간에 미국정부의 입장이 애매하게 돌아간다. 원주민 땅에서 엄청난 금광이 있다는 소문으로 그들을 다 몰아내려는 수작이 생기고 여기서 미국여성은 철저하게 원주민과 동일시된다.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미국여성이 해산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샤이엔족은 다른 부족을 침탈하고 그 부족 아기들의 오른손을 베어버린다. 그들의 잔혹성에 미국여성은 치를 떤다. 그리고 그 잔혹성이 저주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 일어난다. 미국의 큰 병력이 들이닥쳐서 샤이엔 부족을 쓸어버리는 일.



소설은 구성을 남다르게 했다. 훗날 여주인공의 자손이 그녀의 삶을 추적하여 일기를 얻게 되는 형식이다. 그래서 소설은 여주인공의 일기형식이 주를 이루고 초반부에 그녀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도 포함되어있다. 일기라는 형식상 아주 적나라하고 거침없는 휘지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몰입도를 가중시킨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다.



원주민의 삶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시대에 원주민들이 처했던 미국과의 대치상황도 실제적으로 잘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남편이 족장으로서는 ‘테쿰세'를 연상케해서 더 흥미로웠고, 원주민 못지않는 특색 있는 캐릭터로 미국여성들을 그렸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유머가 판을 쳤다.



원주민이라고 하면 무식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짐승 같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 마치 부시맨의 포학함만을 생각하면 될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런 면을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았기에 더 사실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원주민의 문화는 그저 미개할 뿐이고, 문명인이라는 우리의 문화는 다 우월성만 존재하느냐’는 물음에는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침을 놓고 싶어지게 했다.



인권과 자유는 마치 프랑스 국민들이 쟁취한 문명국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은 차별의 울타리를 쳐놓고 흑인노예를 부리는 인간들이 평등을 외치던 백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의 펜대는 늘 백인들 손에 있었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의 고난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신앙을 찾아 피를 흘려가며 미국 땅으로 건너온 백인들이, 보다 안락한 정착을 위해 원주민들의 생명과 자유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점은 그들 자신이야말로 가장 미개한 족속임을 역사 앞에 반증하는 일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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