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현대 성생활의 기원과 위험한 진실
크리스토퍼 라이언 & 카실다 제타 지음, 김해식 옮김 / 행복포럼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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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웬만하면 지하철에 들고 다니면서 시간 죽이기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어디 들고 나가기가 참 민망했다. 아니, 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라고 표지에 박아놓기는 했지만, ‘섹스’라는 단어 앞에 ‘헐~’ 하게 되는 시추에이션이 아닌가. 집에서도 ‘넌 뭐 그런 책을 읽냐’며 마치 포르노잡지라도 보고 있는 것 마냥 취급되는 이 경건한 가정에서,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해보기 위해 괜한 진땀을 뺐다.



어떤 책이냐.



먼저 진화론을 앞세운다.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책은 진행이 불가능하다. 나는 당연히 창조론쪽이기에, 이 책은 나한테 지식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서평에서 ‘진화론’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진화론은 베이스고 이 책은 그 베이스를 밟고 2루까지 뛰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에 입각하여, 인간은 유인원에서 갈라진 호모사피엔스 종이다. 여기서 하나 집자면, 인간은 저자가 말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따져준다고 해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다. 단어 하나지만 한끗 차이가 아니다. 둘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후자는 전자를 압도하는 능력을 지녔다. 저자가 언급한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도 포함한다.



보노보와 호모 사피엔스의 DNA 형질이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보노보는 사회성애적 행동과 유아 발달 형태가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다. 근데 이것들은 난교를 한다. 그래서 난교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역설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선사시대부터 수렵채집을 했던 모계 사회로서 부성 약화의 긍정측면을 강조하며 원시부족 난교파티의 성性적 효과를 좋게만 바라본다.



일부일처제가 도덕적이라는 관념을 일체 무시한다. 역사 속에서 일부일처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잔혹한 실태를 더듬으면서 지금의 문명국의 모든 문화적 교육을 전면 거부한다. 오히려 원시부족의 성적쾌락을 위해 하는 집단성교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고대가 남긴 인간본성의 측면이라고 확신한다. 왜 이걸 포기하고 문명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며 성적 스트레스를 받느냐는 것이다.



문화는 불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길들인다. 우리 행동과 성향의 특정한 면을 육성하고 촉진하면서, 방해되는 것은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p. 100)



쾌락을 위해 여러 파트너들과 섹스하는 것은 동물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것이다. (p. 103)



저자의 뉘앙스는 이것이다. “개인의 쾌락추구를 위해서 일부일처제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고, 난교를 활성화하면서 즐기는 인생을 살아라. 원시부족의 쾌락을 우리는 왜 못 누리면서 이렇게 한 부인에게 정조를 지킨다는 장막을 쳐놓고 지루하게 살아야 하나!”



지금이 씨족사회인가. 엄연한 국가를 지닌 체제아래서 법제도의 확립으로 질서를 지키면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할 책임을 지우는 사회가 아닌가. 인류의 질 자체가 다른데도 저자는 마치 인간의 행복추구의 핵심에는 섹스가 전부인 것처럼, 쾌락적 성생활이 영위가 안 되면 정신병자가 될 것처럼, 사회문화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처럼 떠들고 있다. 저자는 역설은, 지금의 인류가 일부일처제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으니 어떻게든 난교를 합리화하여 고대사회로라도 달려가서 성기 동하는 여성 몇 명 붙들고 놀아나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욕구충천의 지적승화로 들리기도 한다.



문명은 이미 발달했고, 그 문명을 이룩한 인류는 분명 선사시대 고대민족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원시부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된 삶을 살고 있다. 저자가 언급했듯 먹을거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는 원시부족은 남아도는 무료한 시간을 자손번성을 빙자한 성적 쾌락추구에 이바지했다. 본성에 충실한 미개한 방법으로 말이다. 난교를 하든, 계간을 하든 제재할 이유도 없고 지들 좋으면 그만 아닌가. 침팬지도 마찬가지고.



어떤 동물도 그 본성과 조화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 (p. 117)



어떤 동물이 그 본성과 조화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 동물본성에 끼어들어서 조화되려고 하고, 일부다처제라는 법적 틀을 동물본성이라는 도구를 앞세워 비방거리로 삼는 저자의 인식나부랭이가 웃길 따름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고려할 때 난교는 반드시 장려되어야 할 하나의 성적 지표다. 또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남성보다 여성의 성적 욕구가 더 강하다는 점과 여자는 난교를 하기 위한 징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세히 다룬다.



실험을 비롯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인정할 부분도 더러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성적 본능이 유인원과 같고, 원시인과 같아서 혼외 관계를 하면 더 행복해진다. 괜히 결혼이라는 족쇄 때문에 얽매이지 말고, 누구하고나 성관계를 맺는 시스템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 난교의 열매를 맺어보자.” 이건가?



많이 배웠다는 사람의 주장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인류가 국가를 이룩하고, 문명의 제도아래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그 문화와 교육이라는 큰 흐름을 창조해낸 것은 난교파티에 눈이 먼 족속으로서 해낸 것이 아니다. 농업사회로의 이행이 대부분의 개인에게 사실상의 재앙이었다(p. 100)고 말하는 저자의 입장은 아주 편협하다. 인류가 두뇌를 이용한 지속적인 발전 없이 낮잠이나 자면서 이집 저집 성관계나 맺으러 돌아다녔다면 지금의 저자는 그 정도의 사고력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2개의 챕터를 통해 많은 말을 했고, 나도 책에다가 이런 저런 반박들을 수도 없이 적었지만, 각설하고 이런 얘길 해본다면. 사회는 이미 성적으로 갈 데까지 간 상태다. 난교를 안 하나, 스와핑이 없나, 계간을 안 하나, 청소년 임신이 없나. 말 그대로 할 놈들은 다 하고 산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난교의 당위를 제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개한 생각이다.



절제는 미덕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도 자유지만, 할 수 있어도 안하고 사는 것 또한 자유의 근본이다. 그리고 안하고 싶은 사람을 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역시 사회의 역할이다.



일례로 학생들에게 흡연을 금지시키면, 필 놈은 몰래 지 혼자 숨어서 핀다. 담배에 부정적인 인식을 교육시켜 놓으면 담배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담배의 해로움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흡연을 허용하는 학교는 어떻게 될까. 안하는 놈이 병신취급당하고, 따 되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원시인의 사회에서도, 난교가 열리면 무조건적으로 여자는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성적인 질서가 난교로 잡혀있다. 안 하고 싶은 여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만약 우리 사회가 혼전 관계를 인정하는 데도 혼전순결을 지키는 여자가 있다면 그는 보호받지 못할 대상, 혹은 세상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녕 저자가 인식하는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인가. 만약 어느 한 쪽이 사회의 비주류로써 부정적인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문명국은 당연히 사회적 질서를 깨뜨리는 저자의 팔로워들을 택할 것이다. 일부 일처제와 같은 사회적 관념이나 법 질서 또한 발기부전 유부남들이 질투심에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사회에 살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문화가 설정한 제도의 근본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원숭이 같은 짓거리를 하고 살자고 인류의 제도를 폄하하는 이와 같은 발언들은 대체로 인정할 수 없다. 많은 쾌락을 추구하고 성욕해소에 전력을 다하라고 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인류가 살아가는 목적도 후대에게 더 좋은 사회를 공헌하고자 하는 보다 큰 목적을 품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침팬지의 난교를 들먹이며, 개인의 성적 욕망을 사회적 가치 위에 두는 것은 ‘그렇게 사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의문이 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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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꼭 가봐야 할 100곳 - 언젠가 한 번쯤 그곳으로
스테파니 엘리존도 그리스트 지음, 오세원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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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현재 영국에서 폭동사태가 나흘째 계속되면서 전 세계적인 뉴스로 전해지고 있다. 런던에서 시작한 사소한 소요가 런던 중부와 웨일즈 지역까지 번지면서 순식간에 천백여명이 체포되고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저 조용하고 점잖던 나라가 순식간에 무법천지의 삼엄한 도시로 변모하면서, 한국의 런던 여행객도 강도에게 물품을 빼앗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영혼의 원기회복을 위해 떠난 혼자만의 여행에서 저런 불상사를 만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다시 한 번 여행에 발붙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로서 한 번쯤 떠나야 할 곳이 있을까. 저자는 100곳을 소개하고 있다. 아이고, 언제 다 가 볼 수나 있을까 싶지만, 100여개의 국가가 아닌 100여개의 장소이다. 20여 개 국의 나라와 네 개의 주를 제외한 미국 전역을 돌면서 저자가 소개하고 싶은 곳을 자유분방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여행가이며, 세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여행에 있어서는 자부심이 대단한 듯, 타고난 여행가라고 자칭한다. 여행 칼럼니스트로서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라티나 매거진>등에 기고를 하고 있고, 저서로는 가 있다.



책은 총 9개의 낭만적인 테마를 가지고 여남은 개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저자가 여행한 장소들을 담고 있지만, 간행이 아닌 소개 서적이다. 같은 국가라도 특정 장소에 따라 저자가 추천하는 이유가 다르고, 한 가지 주제에 여러 나라의 비슷한 장소를 소개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내용이 잡지에서 장소 홍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간결함은 있으나 자세함이 없고, 그냥 간략한 소개책자의 문구와 홍보 이미지를 접하게 되는 정도로써만 작용한다. 어떤 감성을 느끼기보다 정보적으로 ‘이런 곳이 있구나’, ‘이런 축제도 있구나’ 하고 느끼면 바로 다음 여행지로 넘어간다. 대체로 한 챕터에 3~4페이지가 할당되어있다.



각 챕터마다 information이라는 섹션을 마련, 그 장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어느 웹사이트를 방문해야 되는지, 누구에게 메일을 보내면 되는지’ 간략한 주소를 적어 준다. 물론 여행을 계획한 이들에게는 저자의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가 이때까지 어느 정도 여행을 했고, 어디를 찍고 돌아다녔는지 기록해 둔 것 같고, 그저 차 한 잔 마시면서 ‘거기? 그런 데잖아~’ 하고 한 마디 해놓은 것 같다. 서적으로는 텍스트의 질이 많이 빈약했다.



책에 사용된 제지의 질감이 좋고, 넉넉하게 채워진 풍경이나 그 고장 특유의 분위기를 담은 사진 수록이 좋았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여자로서 여행가기 앞서 살펴야 할 주의사항’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런 부분은 참 유용하고, 저자만큼이나 여행에 내공이 있으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가보고 싶은 곳은 있었으나, 글 자체에서 독자에게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많이 부각시키지는 못하는 서적이라는 느낌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여자라서 가봐야 하는 곳’이라는 느낌보다는 자연에의 모험을 즐기는 여행자라면 누구에게나 동경이 될 만한 곳을 많이 추천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행에 자부심 넘치는 여행가로서 얄팍한 소개서보다는 좀 더 독창적이고 재밌는 여행이야기로 독자들을 이끌지 않았다는 점에 아쉬움이 깃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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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희정 옮김 / 지혜정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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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이 죄냐!’. 글쎄, 시대가 많이 변해서 이제는 이런 얘기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얘기가 되었다. ‘이혼녀’라는 타이틀이 재수 없게 느껴지는 건, 굳이 ‘이혼’자를 붙여서 사람을 수식하는 게 그 자체로 촌스럽고 천박한 느낌을 준달까. 나이를 막론한 이혼이 많아졌고, 한집 걸러 한집으로 ‘이혼’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이왕 할 거면 부끄러움도 머뭇거림도 없는 ‘쿨한 자태’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놓치는 게 있다면, 이혼하는 당사자들의 아픔이다. 이혼은 ‘손해보고 안 살 것들이’, ‘자식 놓고도 사랑 타령이나 하는 것들이’ 내미는 삶의 카드 한 장 정도로 그 심각성이 격하되었다. 가정의 파탄이라는 절망이 만연하게 가득 찬 이 사회는 ‘너만 군대 갔다 왔냐’는 식으로 간단명료하게 서류나 정리하라고 조언한다. 당장에 어느 연예인 부부가 이혼했다는 기사에도 ‘그리 될 줄 알았다’는 댓글이 도배되는 참으로 ‘이성적인’ 사회니까 말이다.



어떤 작품에든 ‘사랑과 배신’이라는 주제를 갖다 쓰기에는 시대적으로 너무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 거기다 요즘 유부녀들은 맞바람으로 복수를 할지언정 질질 짜고 매달리면서 분을 삭이고만 있지는 않는다. 유럽,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남편에게 집착하고 기다리고 애원하고 미쳐가는 상황으로 치닫도록 그려냈다는 것이 특이했다.



남편이 바람났다. 그것도 미성년자랑. 그 미성년자 성인될 때까지 5년을 기다리며 그의 가정과 아내를 기만했다. 때가 되니 미련 없이 홀연 떠났고 소설은 이 여자가 어디까지 미칠 지경이 되어 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사건을 그리지 않고, 이 여자의 내면을 그린다. 독자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여자를 이해할 수 있는 준비.



처음에는 분노로 치를 떤다. 남편과 그년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려서 잠이 안 오고 입에서는 욕만 줄줄 새고 정신은 온전히 남편 생각으로 멎어버린다. 남매 둘을 키우는데, 스스로 통제가 안 된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없다. 무엇을 했는지, 하고 있는 건지 어디 있는 건지 정신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상황은 나빠진다. 얼마나 그녀가 남편을 의지하고 살았는지, 그를 얼마나 믿고 사랑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당연히 아이들도 엄마의 이상 징후에 따라 알아서 조심하며 눈치를 많이 본다. 위기의 가정은 본인들만큼이나 아이들에게도 심리적 불안감과 인생의 불행함을 유발한다. 아이가 심하게 아파 누워 앓고 있어도 가만히 앉아서 돌보기가 힘들 정도로 그녀는 정신이 늘 딴 곳에 가 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다.



나는 용감하게 지금상황에 맞서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일상생활에 필요한 활동이나 생각을 방해하는 무력감이 두려웠다. 그리고 나도 삐딱한 말과 행동이 거침없이 튀어나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 마리오는 세상을 가져가지 않았다. 단지 그 정신만을 가져갔다. 난 30년 전의 어린애가 아니다. 나는의 나다. 오늘을 살고 있다. 역행하지 말자. 정신을 잃지 않고 바짝 챙기자. (p. 77)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기 위한 자기 합리화식 사유가 시작된다. 사람은 아플 때 제대로 아파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아픔을 정면으로 맞아가며 모조리 다 아프면서 겪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정리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주인공의 사유 중 내 마음에 울리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사랑이란 결국 한 육체에 어떠한 의미들을 부여하는 것일 테니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긴 여정에서, 당신은 그가 인생에 기쁨을 안겨줄 유일한 남자라 여기고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는 허깨비일 뿐이다. 당신은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 모르며 그 역시 자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 성적 욕망을 취우고자 한 남자는 그 기회를 잡고, 우리는 여럿 중에서 선택받았다는 기쁨으로 인생을 소모하고 낭비한다. 오직 우리를 향한 그 친절에 보답고자 평범한 섹스의 욕망을 교환한다. 그의 성적 욕구를 사랑하며, 그 욕구는 바로 우리와, 오직 우리와 같이 나누는 욕망이라 생각할 만큼 우리는 맹목적이다. (p. 102)



그녀의 집착적인 사랑은 남편이 키우던 개가 죽음과 동시에 끝났다. 개가 죽을 때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며 자신의 고통이 비현실적으로 과장되어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런 개가 죽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린다. 그리고 눈물이 마름과 동시에 그녀의 사랑도 말랐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일상도 회복된다. 끝내는 사랑의 감정까지도.



그리고 마지막에 남자의 외형적인 변화를 언급하면서 조강지처의 마음을 짓밟고 선택한 사랑역시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 자체가 워낙 주인공의 심리 안에 갇혀있게 함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운이 깊다. 사랑이라는 것과 결혼이라는 것을 따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가여운 애들이 철없는 애들이 되어감으로 주인공의 상처를 후벼 파는 장면에서는 ‘정말 인생 답 안 나온다’ 싶었다.



미련할 정도로 사랑에 매여 그 고통에 허우적거렸던 여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그 아픔의 분노와 절망감이 다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더 현실적인 마무리를 기대했다. 막판에 좋은 남자를 투입시키지 말고, 저 여자 온전히 혼자 서는 모습을 그려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사랑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진부함이 이 여자의 깊이 있는 사유를 퇴색케 하는 듯도 했다. 여자의 인생이 홀로 서지기까지, 진하게 아픈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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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간이
체탄 바갓 지음, 정승원 옮김 / 북스퀘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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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로스퍼스의 <바람의 이름>이라는 판타지 소설에는 크보스라는 주인공 소년이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면서 특별한 지능으로 대학에 들어간다. 이름하야, 신비대학. 판타지가 판치는 대학에서 그는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낸다. 바람의 이름 2권에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가 자세하게 펼쳐지는데, 읽는 독자의 숨이 막힐 정도로 방대한 학습량이었다. 공부때문에 질식할것 같은 대학 환경은 사람을 어디까지 만들어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했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실제로 인도 최고의 명문대인 IIT대학을 배경으로 하여, 세 명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들이 대학 안에서 느끼는 시스템적인 부조리와 어마어마한 학습량 때문에 생기는 정서적 불안감, 그리고 학생 평가기준에 따른 인간적 상실감 등을 진지하게 보이면서도 캐릭터 안에 내재한 코믹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를 기대했다.



작가는 체탄 바갓. ‘뉴욕 타임스’에서 체탄 바갓을 인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영어 소설의 작가“로 소개했고, 타임지가 선정한 100인에 들기도 했다. 인도에서 태어나 델리 인도 공과대학과 아마다바드 인도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래서 저자가 IIT대학 생활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나 싶다. <콜 센터에서의 하룻밤><내 인생의 세 가지 실수> 등의 작품이 있으며, 책 <세 얼간이>는 한국에서 영화 개봉 날짜 한 달 앞서 발간되었다.



세 얼간이는 입학 첫날부터 선배에게 기합을 받다가 친구가 된다. 부유한 집에 외모도 완벽한 라이언, 뚱보 하리, 뚱보에 울보 알록. 주인공은 하리다. 수업 첫날부터 신입생들은 수업과 과제의 양이 살벌하다는 것을 느끼고 돌발퀴즈나 구술시험 등의 관문이 곳곳에 자리하여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시스템에 겁을 먹는다.



가장 태평한 인간은 라이언. 그는 학교생활이 이래서는 안 된다며 공부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두 친구를 꼬드긴다. 그렇게 놀면서 우정으로 얻은 학점이 셋 다 5점대. 알록은 가난한 형편에 부모는 아프고 지참금 없어 시집못가는 누이에 대한 부담감으로 학점에 매달려 좋은 직장에 가야 하는 형편이다. 우정에 금이 간 상태로 1년을 보내지만, 다시 원상 복귀되는 세 명.



하리는 엄한 체리안 교수의 딸 네하와 연애와 연애를 하고, 체리안 교수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자 시험문제를 빼돌릴 결심으로 네하를 이용한다. 세 명은 작전에 돌입한다. 교수실에서 적발되어 엄청난 패널티를 받아야 하는 위기, 알록은 견디지 못하고 옥상에서 투신. 주인공들은 공황상태가 된다. 베라교수의 도움으로 진행된 라이언의 프로젝트가 한 몫을 했고, 하리가 체리안 교수 아들의 유서를 전하는 것이 사건해결의 실마리가 된다.



소설이 내포하는 사회적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가치를 따질 때 그닥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캐릭터 설정, 사건들이 갖는 개연적 구성, 전개에서 보여주는 흥미로운 필치 모든 것에서 미적지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코믹적인 요소도 떨어지는 편이고, 독자를 흡입시키지도 못한다.



소재나 배경에 비해 별 얘기 아닌 것이 소설화되었다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 대다수가 대학이 가진 시스템적인 문제나 평가요소의 부조리함이나 대학에서의 인간성 상실 등 많은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런 대학이 가진 문제를 풀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찌질이들의 일상, 얼간이들의 대화, 바보스러운 결정과 저능아스러운 행동등이 부각되어 진행될 뿐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라도 제대로였다면 웃기기라도 했을 것이다. 생각보다는 얕고 탁해서 개운하기 힘든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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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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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스릴러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요 네스뵈의 소설이다. 가장 잘 나가는 작가답게 사진발도 잘 받는다. ‘이런 작품을 내기에는 너무 동안 아니십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처음 만나본 그의 작품은 굉장하다. 노르웨이에서만 150만부 팔렸고, 에드거 상 최종후보에도 오른 전력이 있다. 록 밴드에서 보컬로도 활동한다고 하니, 요 작가. 심하게 멋있다.



책 뒷면에 보면, ‘직업 사냥꾼, 그림 사냥꾼, 사람 사냥꾼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라는 문구가 가장 윗줄에 쓰여 있다. 주인공의 신분과 사건연결을 순차적이고도 가장 핵심적으로 전달하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굵직한 사건 하나를 중심으로 계속 꼬여내며 진행되지만, 나는 책의 내용을 저 세 가지의 측면에서 정리하고 싶다.



주인공은 헤드헌터다. 그 중에서도 굴지 기업의 임원직 인물들을 주로 추천하는 자리에 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주인공은 사람을 면접할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하고, 어느 정도까지 사람을 파악해 낼 수 있으며, 그 면접에서 노리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상세히 말해 준다.



주인공은 머리가 제대로 비상하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줄 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영리한 캐릭터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낯선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개방적이고 순수한 미소, 소위 말하는 ‘천박한’ 미소가 아니었다. 나의 미소는 정중하지만 온기가 반밖에 없는, 그러니까 면접 기술을 다루는 전문성 일명 ‘면접관의 전문성과 객관성 그리고 분석적 접근’을 보여 주는 미소다. 그렇다. 이렇게 감정 표출을 자제하는 것이야 말로 지원자들이 면접관의 실력을 믿게 만드는 비결이다. (p. 12)



이런 주인공에게도 콤플렉스가 있다. 168센티미터. 부인 디아나가 너무나 완벽해서 오는 불안감이 그를 지배한다. 임신을 했을 때 중절수술을 강요했는데, 여러 가지 심리 언급에서 주인공은 부인 사랑에 대한 자존감이 부족함을 내비친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는 데 대한 보상으로 부인에게 화랑을 차려주며, 거대한 집을 선사하며 돈을 물 쓰듯 쓴다.



여기에 그림 사냥꾼이 된 이유가 있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그녀가 떠날 수 없는 재력을 갖추고서 아이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 자신의 콤플렉스를 돈으로 보완하려는 생각. 안정적인 재정이 있다면 그녀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자신의 고객들 집에 있는 명화를 전문적으로 사냥한다.



루벤스*만 손에 넣으면 나는 비로소 디아나가 말한 사자, 맹수의 제왕 이 될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체 불가능한 가장 말이다. 그렇다고 전에는 디아나가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디아나라면 누려야 할 그런 안락한 둥지를 내 힘으로 만들고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내 약점을 보지 못하는 그녀의 희한한 눈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진짜 모습을, 내 전부를 봐도 괜찮았다. (p. 115)



*루벤스? 그의 고객이 된 그레베 씨의 집에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이라는 그림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주인공이 그의 집에서 그림을 훔치는 와중에 아내와 그레베 씨의 불륜을 직감하는 단서를 얻는다. 그리고서 일이 꼬이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이제부터 진정한 사람 사냥꾼으로서의 엄청난 모험을 겪는다.



실상 소설의 재미는 본격적으로 이 부분부터이다. 그리고 저자가 얼마나 독자를 몸서리치게 만드는지, 소설의 내용을 몇 겹으로 베베 꼬아서 정신없게 만드는지 모른다. 반전의 반전은 마지막까지 독자의 진을 빼놓을 정도로 진행된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라고 되뇔 정도로.



이 소설은 여러 가지의 재미를 담고 있다. 가히 상상초월인 소설이다. 사건 자체와 그 전개는 거칠고 투박하다. 주인공의 심리나 시선은 섬세한 필치로 그리고 있는 반면 그 외 인물들에게서는 풍기는 매력이 좀 덜했다. 주인공 위주로만 굴러가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바, 알고 있는 것을 발설하는 모든 톤에서 농익은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고상하고 충실한 사람들은 종종 인간 중에서도 최악의 부류에게 조차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p. 249)



지독한 소설이었다. 특히 중반부에 주인공이 겪어나가는 죽음의 위기들 앞에서의 그의 행위들은 독자의 숨을 멎게도 만든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이 소설을 두고는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아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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