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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레드 라인
제임스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희범 감수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전쟁에 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물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뭘까. 더 크게 한방 날리고, 터지는 수류탄 사이로 전진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피가 철철 나는 부상병이 소리소리 지르고, 날아오는 총알에 픽픽 쓰러지는 놈들을 보면서 느끼는 분리감이 아닐까. 저긴 저러고 있는데, 나는 영화관에서 팝콘에 콜라를 들고 실재했었던 죽음에 전율하고 있다 하는 느낌.
그래서 우리는 전쟁관련 문학에서도 ‘크헉’, ‘타다다다’, ‘쿠오오옥’, ‘콰아앙’와 같은 만화책 의성어가 난무하여 박진감을 의도하는 한 판을 기대할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전쟁문학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2차 대전 전문작가 레마르크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며 독보적이다. 제임스 존스의 이 소설 또한 소재의 사실성에 입각하여 최대한 영상미를 죽이고, 인물들의 심리 전개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다.
저자는 1921년 일리노이 주 로빈슨 출생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 육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이 경험이 저자의 작품 기조를 형성하는 가장 큰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어떤 사람들은 뛰어서 왔다>같은 작품들은 영화로 제작되었고, 1962년 발표된 <신 레드 라인>은 1998년에 조지 클루니, 우디 해럴슨, 숀펜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참여한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다.
배경은 남서태평양 솔로몬제도 남동부에 있는 섬인 과달카날. 세계2차대전 당시 아주 전설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작품 속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저자는 동시대를 보냈던 이들에게 특별한 느낌을 선사하고자 이 지역을 선택했다. 중심인물은 1연대 소속 C중대이며 특정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가 아닌 ‘중대원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160페이지가 다 되도록 그들이 전장에 들어서기까지를 다룬다. 그러니까 초반부부터 어떤 ‘액션’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자칫 책장 넘기기가 지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 뜨거운 정글을 걷고 기어가면서 서서히 맞닥뜨려오는 죽음에 관해 병사들은 ‘다 죽어 나자빠져도 나는 아니다’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이 전쟁이 ‘재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웰시 상사, 심신이 허약해서 발발 떠는 행정병 파이프, 아내의 불륜을 확신하고 거기서 촉발되는 심리로 움직이는 존 벨, 취사병을 뛰쳐나와 진급에 목숨 거는 보병 찰리 데일, 자신의 무운을 믿고 과감해 지는 돌. 웰시에게 밉보이고 방출되었지만 여전히 C중대를 찾아오는 위트 등. 전투에 들어가기 전 C중대는 너무나 인간성 짙은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서 광기어린 전투에 대한 흥분으로 살인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는 그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다룬다. 정글과 무더위에 지쳐가면서도 젊은이다운 건강함으로 서서히 적응해 나가듯, 부상병의 신음이나 시체에 에 대해서도 점점 무뎌졌고, 이내 살인 이후에 시체훼손으로 금니 같은 전리품을 취득하는 것이 정례가 되었다.
그들은 우위를 점했고 우세한 상황이었다. 온갖 도덕률에서 벗어나도 좋은 방학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미친 듯이 피를 보고 싶은 욕망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처벌받지 않고서 살인을 할 수 있었고, 그 기회를 즐기고 있었다. 어제의 진땀나는 공포와 고생, 후위에서 발각되지 않고 진격했다는 흥분, 정상에서 무방비 상태였던 열다섯 명의 일본군을 살해했던 일 모두가 이 열광적인 분위기에 일조했으며, 지쳐 떨어질 때까지 그들을 멈출 수 없었다. (p. 448)
이 작품에서는 정글에서 많은 이들이 남색을 했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성욕을 참지 못하는 상급 병사들이 진급을 빌미로 어린 병사들을 갖는 일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C중대에서도 여러 병사가 그런 성적 충동을 느낀다. 오지에서 죽음에 관한 공포와 스트레스로 적군을 죽이면서 젊은 혈기가 드글드글한 남자끼리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낸다고 하면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 싶다.
돌로 된 감옥에 갇혀있어야만 죄수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정부는 한 사람을 남태평양의 정글 섬에 가두고, 정부가 시킨 일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해낼 때까지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 살아남은 자들을 강인하고 잔인하며 완전히 냉소적인 보병으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마음속에서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씁쓸함. (p. 487)
“남들이 뭐라든 나는 기계의 나사가 아니야.” 그건 생각일 뿐 페인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맹렬히 느끼고, 믿고 싶었던 사실을 대변해 주었다. 그들은 그 말을 암기하고, 각자 자신의 상황에 적용했고 믿었다. 누가 뭐라든 그들은 기계의 나사가 아니었다. (p. 558)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중에 하나는, ‘리더십’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기 수하의 부하가 죽느냐 마느냐하는 시점에서 중대장의 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처음 C중대의 리더는 스타인이었다. 그는 인간적인 리더였고, 부하의 목숨이 상사의 명령보다 우선이었다. 그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부하 한명 한명을 챙겼으며, 자신의 중대에 ‘인간적’인 애정이 있었다.
인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시상황에서 그는 리더의 자질부족으로 물러났고, 새로운 리더 밴드가 C중대로 발령받는다. 그는 부대원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권위를 중시했으며 인간적인 면모로 부대원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며 진급에만 목을 맸다. 부하들은 그의 판단착오로 개고생을 하며 희생되었고, 그는 후에 해임된다.
정글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지나가야 하는 리더의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중대의 모습은 달라졌다. 위에 앉은 이의 지력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에서 병신 같은 리더를 모시는 부대원들은 딛는 걸음 자체가 절망이었다.
숨넘어갈 듯한 양상으로 긴박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거나, 죽음에 대한 오싹한 공포를 과장하지 않는 순도 있는 작품이다.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다. 죽을까봐 벌벌 떨면서, 죽이기 위해 눈을 번뜩이면서, 기계 속의 나사로, 총알받이로, 그렇게 자국을 위해 비명횡사했던 그들을 애도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전투에 대한 전략과 위치 언급이 많아서, 고지번호를 단 지형도가 하나 실려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치열했던 전투만큼이나 치열하게 갈등했던 그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전해준 작품, 제임스 존스의 <신 레드 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