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이라고 듣는 순간 내가 생각한 거라고는 알타리 무였다;;
알타이는 몽골의 어디쯤인 데 저자가 3주간 그 곳에서 머물면서 쓴 여행에세이다. 그곳에 가게 된 이유는 어떤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 였다고 한다. 한페이지에 인용된 그 책을 나도 읽어보고 싶었으나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인지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동행인 마리아, 한스에 대한 묘사였다. 낯선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 또한 새로운 곳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과 같은 여행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해 묘사한 부분을 유심히 읽고 옮겨보았다.
마리아는 인생의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매우 근본주의적이었다. 사랑의 대상이 가진 모든면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고, 좋아하는 일을 향해 나갈 때는 다른 방향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고요한 과격함이 있었다. 그 점이 처음에는 나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그렇다. 마리아에게는 유럽 여인치고는 아주 드물게도 매우 아시아적인 어떤 요소, 아시아적인 느림과 고집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특히 동아시아적인 내성적 요소가 강했으며, 그 경향이 외모에서도 강하게 느껴졌다. p.116
오페라를 정말 좋아해서 일주일에 세번이나 입석으로 본다는 마리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쓰여졌다는 것을 알까, 아마도 알겠지? 달달한 다른 여행기와 다른 책을 읽고싶으신 분에게 추천.
<실내인간>은 읽지 않았고 <보통의 존재>는 재밌게 읽었다.
저자는 글을 계속 쓰기로 한 모양인데 창작의 고통(?)에 대해 책의 상당부분에서 언급한 점이 흥미로웠다. 글을 쓰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꽤 힘든 작업이었나 보다.
아주 재밌어서 이틀만에 다 읽었다. 하룻밤에 절반을 읽고 그 다음날 절반을 읽었다. 정말 소설같기도 한 남의 연애사가 이렇게 재밌기는 또 오랜만이다. 외로움의 절절함, 사랑하면서 느끼는 불안감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스토리가 아니어도 담담하게 누군가를 위로해주었던 <보통의 존재>가 훨씬 좋았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무엇인지는 책의 뒷부분에 나온다.
나도 그 말이 참 좋다.
<사는 게 뭐라고>에 이어 이 책도 읽었다. 중간에 뇌수술을 집도한 의사와 나누는 인터뷰가 인상깊었다. 나와 상관없는 3인칭의 죽음, 나와 가까운 사람 2인칭의 죽음, 나 자신인 1인칭의 죽음.. 의사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으면 의사는 2.5인칭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 고통이 너무 심해서 호스피스 병원에 2주 정도 머무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사노에게 찾아온 어느 여인의 말에 사노 요코는 마음의 평정을 찾은 당신이야말로 몸이 아닌 영혼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런 사실을 알려준 당신을 만난 것이 곧 구원받은 것이라고 한다. 서글프면서도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한 책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연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꽃이 필 무렵에만 눈을 빼앗겼다가 시들면 금방 잊어버렸다. 벚꽃은 1년에 한 번만 떠올렸다.
꽃이 지면 벚나무의 존재조차 까먹었다. 왕성하고 바지런히 일했던 시기에는 꽃집에서 꽃을 사기도 했고, 정원의 조팝나무가 폭포수처럼 꽃피울 때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비친 산의 단풍은 어딘가 이상했다. 고흐의 그림 속 빛나는 터치는 그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눈에 보였던 광경이 아닌가. 정신병으로 세상을 뜬 고흐는 죽음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처럼 불타듯 보였던 게 아닐까.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