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 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층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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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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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껏 한번도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연애사건에 대하여 관용을 베푼 적이 없다. 그들의 연약함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들이 무지개끝에 있는 남자를 찾는 것을 안다. 그들이 아이를 낳고 실버 크로스제로열 블루 유모차를 사서 봄 햇살 속에 강둑을 걸으면서 짐짓 겸손한 체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본다. 불쌍한 스밀라, 자기한테 없는 게 뭔지도 모른다니까. 우리처럼 아이도 있고 결혼 증명서도 있는 여자들의 삶이 어떤지 모르지. 네 달 뒤 옛 임산부 친목회가 열리는 날, 다시 나쁜 병이 재발하여 거울 앞에 마약 주사를 죽 늘어놓던 사랑하는 남편 페르디난드가 급기야 욕실에서 행복한 엄마 중의 한 사람과 놀아나고 있는 모습을 목도하는 순간, 10억분의 1초만에 그녀는 위대하고, 자부심 강하며, 최상이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어머니의 위치에서 난쟁이 요정으로 격하된다. 한방에 내 수준 이하로 굴러 떨어져 곤충, 벌레, 지네가 되어버린다.
-250쪽

그렇게 되면 그 여자들은 오랜만에 내 생각을 하고 연락을 해온다. 그러면 나는 이혼 후의 독신모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스테레오를 나눠갖기 위해서 어떤 싸움을 했는지, 애들 때문에 청춘이 어떻게 날아가버렸는지, 애들은 자기를 이용해 먹고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는 기계라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그럼 대체 네가 원하는게 뭔데?"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251쪽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굉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사랑에 압도될 수는 있다. 지난 몇 주간 나는 매일 밤 몇 분씩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 허락해 주었다. 나는 내 마음에 승낙을 내려놓고 내 몸이 그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나는 그의 고독을 안다. 더듬거리던 습관, 포옹, 개성의 거대한 핵심에 대한 깨달음을 기억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갈망을 발산하기 시작하면 나는 이들을 잘라버린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련한다.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본다.-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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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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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셸 투르니에의 매력을 이제야 알아 버렸다.

일기는 보통 초등학생의 그림일기가 아닌 다음에는 자신의 내면을 적어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 적어가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발맞추어 여기저기 끄적거려놓은 메모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상의 관찰, 삶에 대한 유머러스함, 죽음을 받아들이는 유쾌한 태도가 곳곳에서 보여지고 그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한다. 80을 훌쩍 넘긴 나이.. 에는 인생의 앞날을 기약할 수가 없다. 갑작스런 심장의 통증에도 이게 내 죽음일지 모른다고 그는 유쾌하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76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자신도 그때까지만 살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던 그는 오히려 지금 죽음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요즘 평균 수명이 여자는 80이 훨씬 넘는 다는데 그 나이에 이렇게 유쾌하게 조심스럽게 작게 가볍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나는 생각해 본다. 뒷부분에 번역가 김화영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인터뷰를 읽으며 미셸 투르니에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어린이를 굉장히 좋아하고 어린이를 위한 철학책들도 여러권 썼다고 한다. 나이에서 나오는 여유, 잘 늙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 입니다.
...... 중략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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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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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비셰프는 러시아의 유명한 곤충학자라고 한다. 82살동안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끊임없이 계획하고 기록하여 마치 자신의 생 동안 이루어야할 사명을 알고 태어난것처럼 살았다고 한다. 26세의 나이부터 자신의 생활을 시간기록하였는데  내면세계나 감정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만을 건조하게 나열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데 드는 시간을 기록했다고 한다. 면도하는 시간, 휴식하는 시간, 신문을 읽는 시간처럼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자투리 시간까지도 기록하여 연간단위로 통계를 내고 5년뒤에 공부할 내용까지 계획을 세울수 있었다고 한다. 그 통계가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한편의 논문을 작성하는데 얼만큼의 시간을 소요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 이렇게 살았던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엇하나 하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류비셰프의 생활 방식은 획기적이었다. 하루에 잠도 10시간정도로 매우 충분히 잤고,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도 있었으며 평소에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유롭게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학문세계를 탄탄히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니 보통사람이 갖기 어려운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던게 틀림없다.

또 그 관심의 분야가 대단했는데 생물수리학(?)이 그의 전공이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 역사, 음악 과 같이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까지 관심을 보였는데 단순한 취미차원의 관심이 아니라 논문을 낼 정도의 열정이었다고 한다. 칸트가 궁금하면 그와 관련한 책을 독파하고 논문까지 낼 정도였다니.. 왕성한 호기심이 그의 인생을 이끌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살면서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까.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죽어야만 할까. 그래야 남들이 나를 인정하니까? 인정받아서 뭐하려고?
류비셰프의 생활방식이 대단한건 알겠지만 이렇게 까지 살아야하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그의 정신력과 추진력은 감탄해 마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지 말아야겠다. 결국은 의지 부족의 문제 아니겠는가.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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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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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해리포터를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환타지 소설이어서 그랬나 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줄거리는 분량에 비해 간단하다.  사실 주인공이 지하세계로 내려간 순간의 중반부터는 조금 지루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책을 좋아하다 못해 집착 증세를 보이는 책벌레들을 위한 책과 관련된 상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을 쓰는 기계, 음식물 대신 책을 읽어서 배부름을 느끼는 상황, 작가나 시인들이 내뱉어 내는 말들, 책사냥꾼들의 이야기, 도서관... 이 도시는 온통 책과 관련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덧붙여 책속에 등장하는 삽화가 글읽기의 즐거움을 더하여 준다. 해야 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모든 책임들로 부터 다 벗어나 책만 읽는 생활을 한달만 해봤으면 좋겠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어도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은 줄어들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 그렇게 책을 사랑하는 것일까. 읽을수록 왜 더 허기지는 것일까.

이 책은 나같이 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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