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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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에는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대한 저자의 의문이 계속된다. 그는 왜 죽었을까? 도대체 왜..

이성적인 사람, 증인으로서 살아갈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람, 항상 삶을 긍정하던 사람, 조용한 낙관주의자 프리모 레비.. 이러한 수식어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의문점들만을 증폭시킨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항상 삶을 긍정하던 이라는 수식어 앞에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허무함이 느껴졌다.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도 살아났으면서 심지어 그 안에서 앞으로 인간으로서 살면서 누리는 그 모든 것을 더 간절히 원했으면서..

'이해' 란 무엇인가. 저자 서경식이 또 그 책을 읽고있는 나는 프리모 레비에게 어떤 '이해'를 바랐던 것일까. 힘들지만 삶은 계속 되어야 하고 그래서 긍정해야 하고 그런 것만이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있고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던 나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저자의 말처럼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의 침묵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고뇌할 것이다.

결국, 저자는 프리모 레비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그의 묘비와 생가를 찾아보았지만 그 죽음의 연유를 밝혀내지는 못한다. 책의 마지막까지 도대체 왜 그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는가 라는 답없는 질문만 메아리치고 있다. 서경식의 고통의 가족사를 생각해보면 프리모 레비의 자살에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몰입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얻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어떤 신념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이며 그 경계는 무엇이고 가치의 경중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지는 밤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는 왜 자살한 걸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저 죽은 자가 남긴 침묵에는 먼저 의연하게 머리를 숙여야 할 뿐이다. " (p. 270 )

답은 없지만, 있더라도 그 답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러한 질문을 한번쯤 내 자신에게 던져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어쩌면 죽음이란 더군다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의 경우에 그 죽음에 대해 아무도 섣불리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그 사람의 주변인들이 그 사람의 평소행동은 어땠고 평소에 생각이 어땠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그의 모든 것이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죽음앞에 머리숙일 수 있는 일 그것만이 살아남은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닐까.

사족: 서경식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번역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프리모 레비가 아닌 '쁘리모 레비', 이탈리아가 아니고 '이딸리아', '르네쌍쓰' 등등.. 왜 그의 책은 죄다 이런 식으로 번역되는 것인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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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2007-10-1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돌배개쪽 책은 번역이 그렇지 않거든요. 삼인에서 나온 단절의 시대 증언의 시대의 경우에는 원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일본에서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두고 번역자 주를 넣기는 했지만. 창비에서 나온 이분의 책은 서양미술만봤는데 그랬던가? <- 먼가 아련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파피필름 2007-10-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마다 번역이 좀 다른가보군요. 제가 읽은 서경식씨 책 세권은 다 그랬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