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때였나 이 책을 문고판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접했다. 책 표지가 전체적으로 분홍색이었고, 출판사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아동문고는 계몽사가 제일 많았으니 그 출판사가 아니었을까싶다.

   화가인 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녀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친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상상해서 그린 엄마의 초상화가 실제 초상화와 많이 닮아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도움으로 딸은 화가로 성장해서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대충 이런 줄거리였는데, 정작 내 눈을 끌었던 건, 이야기에 등장하는 퇴락한 고성이었다. 그 성의 주인인 자손들도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고성. 마침 그 성을 지나가다 마차가 고장나서 아버지와 함께 성의 욕실에 자리를 마련하고 하룻밤 지내게 된다. 벽면을 메우는 섬세한 대리석 부조. 아마 아기천사 종류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것만으로도 쇠락하기 전에 성의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또, 주인공이 정원에선가 놀다가 공깃돌같은 돌을 튕겼는데, 부서지면서 그 안에서 자그마한 대리석 조각이 나왔었다.  손톱만한 크기의, 포도넝쿨 관을 쓴 바커스의 얼굴로 기억한다. 당시 이 책을 읽으면서 바커스의 얼굴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었다. 자그마하지만 장인이 얼마나 섬세하게 새겼을까? 이마에서 코를 거쳐 턱으로 내려가는 선이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울까? 전체 모습을 어땠을까? 원래 어디 있던 것일까? 등등. 생각해보면 최고의 미남자 얼굴을 그렸던 것 같다.

  나중에 성의 주인들이 성을 보수공사하고 들어와 살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섬세한 부조나 그림이 모두 가려졌던 것 같다. 주인공이 이 점을 안타까워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도 없다고 성 주인인 여자애한테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놨던 기억이 난다.

  부서지고 사라져가는 옛 것에 대한 그리움, 애잔함, 안타까움 등이 뒤섞인 감정.  내 이 책을 생각할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위의 책 표지 너무 촌스럽다. '나는 아동문고'라고 티를 팍팍내고 있는 듯. 차라리 옛날게 더 나을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에 읽은 책 중에서도 본의아니게 잃어버린 책들이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집에 놀러온 고모 친구가 빌려갔다가 돌려주지 않은 '펄벅의 대지1,2' , 중1때 학급문고로 냈다가 잃어버린 '포플라잎사귀보다도 더 작은 사랑', 초등학교 5학년땐가 6학년땐가 학교에서 단체구입해서 읽었던 '과학은 마술사' 등등. 지금 다시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포플라~'나 '과학은 마술사'처럼 절판된 것도 있어 아쉬움이 더 커지는 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책관리, 책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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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2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리고 나서 후회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ㅠ.ㅠ

여울이 2005-08-23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리고 나서 후회한다... 가슴 미어지게 '동감'입니다.
 
 전출처 : 인간아 > 눈과 시를 영혼으로 만나는 행복과 불행
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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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은 평생 한 번 우리의 꿈속에서도 내린다.


  눈이 아름다운 건 뜨거운 영혼으로는 받을 수 없는 파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그를 위해 체온을 낮추라. 하나의 눈송이는 완전한 우연으로 창조된다.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절대적인 하나의 결정.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온몸으로 눈을 받아낼 수 없는 비애를 가진 짐승이다. 날카로운 형상으로 온몸을 낭자하게 상처 낼 수 있는 눈이 내 마음을 깊이 있게 찌른다. 눈을 바라보는 건 눈이 아니고 영혼이다. 허공에서 태어나 대지에 맞닿자 죽어버리는 싹. 눈이 녹은 자리에 눈물이 질척거린다.


  4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망명지 독일에서 죽음처럼 방황하던 시인 카가 고향 카르스로 돌아온다. 거기서 그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 친구의 아내였던 여인 이펙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엄청난 폭설은 카르스를 외부로부터, 그리고 정부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킨다. 눈으로 갇혀버린 공간은 연극의 무대로 변신한다. 이제부터 카르스 안의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연극에 참여한다.


  위대한 터키의 영웅 아타튀르크가 되고 싶었던 연극배우 수나이 자임과 요염하고 정열적인 밸리 댄서 푼다 에세르는 모함과 누명을 쓰고 비참한 생활을 전전해오다가 오로지 ‘연극’을 하기 위해서, 친구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킨다. 히잡을 벗으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교리에 위배되는 자살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소녀들을 위한 연극「조국 혹은 히잡」을 공연하는 자리가 바로 쿠테타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무대에서 총을 쏴도 관객들은 움직일 줄 모른다. 움직이면 그 순간 표적이 된다. 완벽히 연극에, 쿠테타에 몰입하게 되는 순간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3일, 눈이 녹으면 모든 상황은 다시 꿈처럼 예전으로 돌아간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수나이 자임은 그의 소망대로 연극배우로 무대에서의 죽음을 계획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극「카르스의 비극」을 공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진정한 예술가의 죽음은 숭고한 비극이어야 한다.


  행복하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고통과 불행을 나는 안다. 이 고통과 불행은 결코 함께 나눌 수가 없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흐타르는 쿠테타 이후 자신을 고문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고통이 자신을 속죄하게 하며 죄를 덜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카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불안과 고통과 불행을 느낀다. 라지베르트는 순교로써 전설이 되길 원하며, 수나이 자임은 연극무대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고자 한다. 터키 정부는 순교자나 영웅이 죽을 때마다 성지가 생기는 걸 두려워해 시체를 바다에 몰래 던져버린다.


  눈이 영혼에 맞닿는 기적처럼, 독일을 헤매며 포르노가게를 기웃거리던 잊혀진 시인 카에게 시가 찾아온다. 단 3일 동안 그는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망명지 독일에서 누리게 될 생활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시인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카에게 시가 찾아왔기 때문에, 시의 부름에 행복하게 응답하는 시인이 될 수 있었기에 그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가 온 순간의 행복은 곧 시가 떠나버리는 불행과 같은 몸이다. 카는 시인, 시인의 숙명으로 시는 찾아오자마자 떠나기 때문에 궁극의 행복과 죽음에 이르는 비탄이 동시에 그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시는 제 행복의 체온에 놀라 스스로 사라져 녹아버린다.


  시인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야만 한다. 그가 행복을 꿈꾸는 순간 죽음은 그에게 찾아들고 시는 날아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시가 떠난 시인의 영혼에게 죽음은 평안을 주는 축복이다. 시는, 행복한 영혼 위에서는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이다. 시가 찾아드는 영혼은 고독과 고통으로 불행하다. 시인에게 불행이 숙명인 이유는 시의 결정을 온전히 받아 드러내기 위해서다. 카는 자신이 쓴 시를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놀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을 수 있었기 떄문에 그 시가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의 소재들이, 자신의 인생이 놀랍게 여겨졌다. 시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고 자문한다.


  눈은 상처로 서로를 찌르면서 거대한 장벽으로 쌓인다. 이 때의 풍경은 모든 것을 뒤덮는 거대한 순수 자체다. 눈이 쌓여도, 눈이 녹아도 터키는 변하지 않는다. “카르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절 넣으신다면, 저는 독자들에게 당신이 저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 누구도 멀리서 우리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 “자신들이 우리보다 영리하고, 우리보다 우위에 있고, 우리보다 인간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를 웃기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야 하지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방금 한 말을 책에 넣으신다면 그들 머리에 의혹이 남아 있게 되겠죠.” 2부 본문 299쪽에서 파즐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소설 <눈>을 통해 알게 되는 터키는 완전한 오해다. 행복이 불행이 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어기고 자살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하고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고 자신을 살해한다.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행복하게 웃으며 목표물을 향해 달려는 무슬림은 지금 신을 만나러 가는 걸까.


시인 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후 시를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귤을 사려다가 뒤에서 총을 맞고 죽음의 행복을 만난다. 나는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에게 죽음은 시의 현현이기도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오르한 파묵을 정말로 좋아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이전 그의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알게 되었으나 잘 알지 못했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낸 느낌이다. 이 소설은 시인 카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조국 ‘터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카와 이펙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서사구조로 보자면 너무나 한심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이고 유치한 관계 속에 성스러운 신은 존재의 그림자를 보여주시고, 시는 이러한 통속 속에서 강림한다. 그를 통해 나는 터키를 오해한다. 이 오해가 쌓여 결국은 눈처럼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는 새하얀 길이 되리라.


  작가 오르한 파묵이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도 소설의 특이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편지로 알게 된 시인 카의 시 - 카르스에서 보낸 3일 동안 쓴 시 19편으로 제목은, ‘눈’, ‘은밀한 균형’, ‘별들의 우정’, ‘초콜릿 상자’, ‘신이 없는 곳’, ‘혁명의 밤’, ‘꿈의 거리’, ‘자살과 권력’, ‘속수무책과 곤경’, ‘나는 카’, ‘난 행복할 거야’, ‘천국’, ‘모든 인류와 별들’, ‘총에 맞아 죽다’, ‘체스’, ‘사랑’, ‘개’, ‘질투’, ‘세상이 끝나는 곳’이다. - 가 적힌 푸른색 노트를 찾으려 애를 쓰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시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났으나 발견되지 않는 시는 전설이 된다. 카의 시는 읽을 수 없지만 그 감동은 충분히 오르한 파묵의 소설로 전달된다. 시의 감동을 전해주는 소설이라는 모순,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이것보다도 자신의 조국 이야기가 먼저였으리라고 확신한다.


  눈은 나리고 쌓이고 죽음을 맞이하고 쌓이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터키 북부의 외진 도시 카르스는 눈에 의해 환상의 연극 무대가 되었다가 눈이 녹은 뒤 다시 터키라는 현실로 돌아갔다. 시가 머물고 떠난 자리처럼, 시가 찾아왔다가 떠난 영혼으로 고통받는 시인처럼 카르스도, 터키도 결국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감히 어떠한 감상이나 이해를 쌓지 않기로 한다. 나는 오르한 파묵의 글을 녹지 않게 영혼으로 받아, 카가 썼던 시를 읽어볼 뿐이다. 허공을 부유하는 눈처럼 존재하지 않는, 불행한 영혼으로만 읽어볼 수 있는 시인의 뜨거운 시를!


  눈 속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풍경을 길로 만들 수 있다.



   * 등장인물 (내 마음대로의 느낌이므로 다른 인물일수도 있다.)

  카 - 독일로 망명했다가 고향 카르스로 돌아온 시인. 단 3일 동안 그의 인생이 뒤바뀌는 사랑과 사건을 경험한다. 무신론자였다가 후에 ‘무엇’으로 변한다.

  오르한 파묵 - 이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 친구인 카의 죽음 이후 그의 시가 담긴 초록색 노트를 찾기 위해 그의 행적과 카르스를 좇는다.

  무흐타르 - 시인 카의 옛 친구. 순수한 꿈이 있었으나 정치적 욕망의 길을 선택한다.

  이펙 - 시인 카의 친구이자 무흐타르의 아내였던 아름다운 여인, 짧은 시간동안 카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과거로 말미암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카르스에 남게 된다.

  카디페 - 이펙의 여동생이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라지베르트를 구하기 위해 연극무대에서 히잡을 벗는다.

  라지베르트 - 신실한 무슬림이자 카디페의 연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투르굿 - 이펙과 카디페의 아버지로 감옥에서 오랜 고통을 당하고 난 뒤 호텔에서 생활한다.

  세르다르 - 판매부수 320부의 <국경 도시 신문>의 발행인. 내일의 기사를 쓰는데 예언처럼 맞아떨어지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단지 우리가 미리 기사를 썼기 때문에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이거야말로 현대적인 저널리즘이지요.’ 라는 그의 말은 무엇보다도 지금의 현실에 걸맞는 풍자다.

  쿠르드인 교주 사데띤 에펜디 - 무신론자 카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만든다.

  예니 하얏 제과점 - ‘새로운 인생’이라는 뜻의 제과점. 오르한 파묵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카와 이펙이 카르스에서 처음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 ‘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타튀르크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이다. 국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1934년에 국회가 그에게 부여한 성이다. 그는 터키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종래의 이슬람 전통을 크게 탈피한 서구적 근대화 개혁 작업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다.

  네집 - 무슬림 학생, 밀렛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조국 혹은 히잡」을 보다가 일어난 쿠테타의 총알에 맞아 죽음에 이른다. ‘무신론자(atheist)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athos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단어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을 의미한답니다. 그러니 사람은 절대 무신론자가 될 수 없지요. 신은 우릴 버리지 않으니까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인이 되어야 해요.’라는 말을 하던 순수한 이슬람 믿음 내면에 도사린 무신론의 회의로 고통 받는다. ‘히즈란’으로 알려진 카티페를 사랑한다.

  파즐 - 무슬림 학생, 자살한 여학생 테스메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친구 네집이 죽은 후 네집의 영혼에 잠식당하게 되고 자신 내면의 믿음을 시험당한다. 훗날 카티페와 결혼해서 외메르잔을 얻는다.

  메숫 - 무슬림 학생

  테스리메 - 히잡을 벗고 등교하라는 정부의 지시와 가족, 친구들의 압박 속에서 교리를 위반하고 자살을 선택함으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낸 여학생.

  Z. 데미르콜 - 신문기자이자 경호원이었으나 쿠테타 이후 대학 기숙사, 신학고등학교, 정당들을 습격하는 살인자로 활동한다.

  타르쿳 웰춘 - 프랑크푸르트에 온 초기 이민자. 이 글의 작가이자 카의 친구인 오르한 파묵이 독일에서 카의 행적을 찾을 때 도와준다.

 

  * 오타

  1권

  24쪽 11째 줄 : 그를 -> 그는

  108쪽  6째 줄 : 이사이 -> 이 사이

  2권

  132쪽 4째 줄 : 그리고 자신이 붙여준 두 명의 경호원이 카의 곁에 꼭 붙어 있을 테고 말했다.  (문장이 이상하다.)

  141쪽 23째 줄 : 예상치 못하게서로를 -> 예상치 못하게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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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 2
조정육 지음 / 고래실 / 2002년 7월
품절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은 그 기상이 마치 산의 높고 중후함이나 물이 통하여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것에 부합되기 때문에 좋아할 뿐입니다. 언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 연후에 어진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 관아재 조영석 -212쪽

모름지기 그림은 서릿발 같은 사대부의 기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가슴 밑바닥에 아무리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해도 그 피를 차갑게 식혀야 한다. 몸이 병들었다 해서 죽는 소리를 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해서 울분을 토로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림이 아니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절제해서 표현하는 것. 그것이 그림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시선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붓을 들면서 자신이 먼저 순화되고 정리되어야 한다.
- 능호관 이인상-259쪽

"메뚜기가 가을 풀잎에서 떨고 있구나!"
5~6월에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메뚜기는 가을이 되면 알을 낳고 죽는 곤충이다. 그런데 어느 가을 날 바위 틈에서 자란 풀잎을 보니 메뚜기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그때 심사정은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름의 싱싱한 풀 위가 아닌 찬 이슬 내리는 가을 풀 위에 힘겹게 앉아 있는 메뚜기가 왠지 자신의 모습 같았다. 풀잎에 곧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모습, 그것은 그림 하나로 이 험한 세상에서 떨어져 내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신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 현재 심사정-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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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 2
조정육 지음 / 고래실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1권인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책이 무척 맘에 들어서 2권도 사서 읽었다. 1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달음에 읽혔다. 미술교과서에 실려서 눈에 익은 김명국의 ‘달마’, 윤두서의 ‘자화상’, 정선의 ‘금강전도’를 비롯해 좋은 그림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하필 표지그림과 제목을 이렇게 했을까 좀 궁금했는데, 책을 읽고 알았다. 내 개인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그림은 그 메뚜기 그림이 아닌 다른 것들이지만, 은근히 내 가슴 한구석을 시리게 만들고 뒤돌아보게 하는 건 그 ‘풀잎 위의 메뚜기’ 그림이었다. 한 평생 불우하게 살다 간 심사정의 분신인양 가을 풀잎위에서 떨고 있는 메뚜기. 험한 세상의 세파인양 가을 바람이, 이슬이 얼마나 찼을까? 메뚜기 한 마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나타낸 심사정의 필력이 놀랍다.

  그리고 새삼 느끼는 거지만, 화가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참 정성스럽게 재구성해서 이야기로 풀었다. 그들에게 애정이 없다면, 수박겉핥기 식으로 밖에 모른다면 절대 이런 글이 나올 수 없을 듯 하다.

  벌써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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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 1
조정육 지음 / 고래실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아마 7월 중순 정도였을 것이다. 간만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고르는데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동양화쪽은 영 까막눈인지라 읽고 싶은 마음과 함께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랬는데...... 별로 한가하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틈틈히 읽은 것이 어느새 하루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들의 삶과 작품세계가 나같은 까막눈에게도 쏙쏙 들어오게 참 쉽게 잘 썼다. 그 전엔 동양화를 봐도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고, 서양화에 길들여진 내 눈에 '이게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동양사람인 내가 서양화보다 동양화에 거리감을 더 느끼다니.... 생각해 보니 좀 씁쓸하기도 하다.

 맨 처음 '안견'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조속'이야기까지 한달음에 읽고 난 후, 그 중에서도 내내 탄은 이정의 '대나무 그림'이 떠올랐다. 바람을 맞고 있는 '풍죽'그림이........ 탄은이 풍죽을 그릴 때와 지금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일까? 모사품이라도 하나 구해서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을 끄는 그림이다.

  요전에 정민 선생님이 쓴 ‘꽃들의 웃음판’으로 한시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었는데, 이번엔 이 책으로 인해 우리 옛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말 고맙고도 귀한, 소중히 간직할 책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이 탐나서 결국 사고 말았다. 좋은 책은 역시 내 서가에 꽂혀 있어야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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