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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눈과 시를 영혼으로 만나는 행복과 불행
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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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은 평생 한 번 우리의 꿈속에서도 내린다.


  눈이 아름다운 건 뜨거운 영혼으로는 받을 수 없는 파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그를 위해 체온을 낮추라. 하나의 눈송이는 완전한 우연으로 창조된다.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절대적인 하나의 결정.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온몸으로 눈을 받아낼 수 없는 비애를 가진 짐승이다. 날카로운 형상으로 온몸을 낭자하게 상처 낼 수 있는 눈이 내 마음을 깊이 있게 찌른다. 눈을 바라보는 건 눈이 아니고 영혼이다. 허공에서 태어나 대지에 맞닿자 죽어버리는 싹. 눈이 녹은 자리에 눈물이 질척거린다.


  4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망명지 독일에서 죽음처럼 방황하던 시인 카가 고향 카르스로 돌아온다. 거기서 그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 친구의 아내였던 여인 이펙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엄청난 폭설은 카르스를 외부로부터, 그리고 정부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킨다. 눈으로 갇혀버린 공간은 연극의 무대로 변신한다. 이제부터 카르스 안의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연극에 참여한다.


  위대한 터키의 영웅 아타튀르크가 되고 싶었던 연극배우 수나이 자임과 요염하고 정열적인 밸리 댄서 푼다 에세르는 모함과 누명을 쓰고 비참한 생활을 전전해오다가 오로지 ‘연극’을 하기 위해서, 친구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킨다. 히잡을 벗으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교리에 위배되는 자살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소녀들을 위한 연극「조국 혹은 히잡」을 공연하는 자리가 바로 쿠테타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무대에서 총을 쏴도 관객들은 움직일 줄 모른다. 움직이면 그 순간 표적이 된다. 완벽히 연극에, 쿠테타에 몰입하게 되는 순간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3일, 눈이 녹으면 모든 상황은 다시 꿈처럼 예전으로 돌아간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수나이 자임은 그의 소망대로 연극배우로 무대에서의 죽음을 계획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극「카르스의 비극」을 공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진정한 예술가의 죽음은 숭고한 비극이어야 한다.


  행복하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고통과 불행을 나는 안다. 이 고통과 불행은 결코 함께 나눌 수가 없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흐타르는 쿠테타 이후 자신을 고문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고통이 자신을 속죄하게 하며 죄를 덜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카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불안과 고통과 불행을 느낀다. 라지베르트는 순교로써 전설이 되길 원하며, 수나이 자임은 연극무대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고자 한다. 터키 정부는 순교자나 영웅이 죽을 때마다 성지가 생기는 걸 두려워해 시체를 바다에 몰래 던져버린다.


  눈이 영혼에 맞닿는 기적처럼, 독일을 헤매며 포르노가게를 기웃거리던 잊혀진 시인 카에게 시가 찾아온다. 단 3일 동안 그는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망명지 독일에서 누리게 될 생활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시인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카에게 시가 찾아왔기 때문에, 시의 부름에 행복하게 응답하는 시인이 될 수 있었기에 그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가 온 순간의 행복은 곧 시가 떠나버리는 불행과 같은 몸이다. 카는 시인, 시인의 숙명으로 시는 찾아오자마자 떠나기 때문에 궁극의 행복과 죽음에 이르는 비탄이 동시에 그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시는 제 행복의 체온에 놀라 스스로 사라져 녹아버린다.


  시인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야만 한다. 그가 행복을 꿈꾸는 순간 죽음은 그에게 찾아들고 시는 날아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시가 떠난 시인의 영혼에게 죽음은 평안을 주는 축복이다. 시는, 행복한 영혼 위에서는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이다. 시가 찾아드는 영혼은 고독과 고통으로 불행하다. 시인에게 불행이 숙명인 이유는 시의 결정을 온전히 받아 드러내기 위해서다. 카는 자신이 쓴 시를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놀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을 수 있었기 떄문에 그 시가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의 소재들이, 자신의 인생이 놀랍게 여겨졌다. 시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고 자문한다.


  눈은 상처로 서로를 찌르면서 거대한 장벽으로 쌓인다. 이 때의 풍경은 모든 것을 뒤덮는 거대한 순수 자체다. 눈이 쌓여도, 눈이 녹아도 터키는 변하지 않는다. “카르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 절 넣으신다면, 저는 독자들에게 당신이 저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 누구도 멀리서 우리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 “자신들이 우리보다 영리하고, 우리보다 우위에 있고, 우리보다 인간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를 웃기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야 하지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방금 한 말을 책에 넣으신다면 그들 머리에 의혹이 남아 있게 되겠죠.” 2부 본문 299쪽에서 파즐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소설 <눈>을 통해 알게 되는 터키는 완전한 오해다. 행복이 불행이 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어기고 자살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하고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고 자신을 살해한다.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행복하게 웃으며 목표물을 향해 달려는 무슬림은 지금 신을 만나러 가는 걸까.


시인 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후 시를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귤을 사려다가 뒤에서 총을 맞고 죽음의 행복을 만난다. 나는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에게 죽음은 시의 현현이기도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오르한 파묵을 정말로 좋아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이전 그의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알게 되었으나 잘 알지 못했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낸 느낌이다. 이 소설은 시인 카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조국 ‘터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카와 이펙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서사구조로 보자면 너무나 한심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이고 유치한 관계 속에 성스러운 신은 존재의 그림자를 보여주시고, 시는 이러한 통속 속에서 강림한다. 그를 통해 나는 터키를 오해한다. 이 오해가 쌓여 결국은 눈처럼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는 새하얀 길이 되리라.


  작가 오르한 파묵이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도 소설의 특이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편지로 알게 된 시인 카의 시 - 카르스에서 보낸 3일 동안 쓴 시 19편으로 제목은, ‘눈’, ‘은밀한 균형’, ‘별들의 우정’, ‘초콜릿 상자’, ‘신이 없는 곳’, ‘혁명의 밤’, ‘꿈의 거리’, ‘자살과 권력’, ‘속수무책과 곤경’, ‘나는 카’, ‘난 행복할 거야’, ‘천국’, ‘모든 인류와 별들’, ‘총에 맞아 죽다’, ‘체스’, ‘사랑’, ‘개’, ‘질투’, ‘세상이 끝나는 곳’이다. - 가 적힌 푸른색 노트를 찾으려 애를 쓰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시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났으나 발견되지 않는 시는 전설이 된다. 카의 시는 읽을 수 없지만 그 감동은 충분히 오르한 파묵의 소설로 전달된다. 시의 감동을 전해주는 소설이라는 모순,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이것보다도 자신의 조국 이야기가 먼저였으리라고 확신한다.


  눈은 나리고 쌓이고 죽음을 맞이하고 쌓이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터키 북부의 외진 도시 카르스는 눈에 의해 환상의 연극 무대가 되었다가 눈이 녹은 뒤 다시 터키라는 현실로 돌아갔다. 시가 머물고 떠난 자리처럼, 시가 찾아왔다가 떠난 영혼으로 고통받는 시인처럼 카르스도, 터키도 결국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감히 어떠한 감상이나 이해를 쌓지 않기로 한다. 나는 오르한 파묵의 글을 녹지 않게 영혼으로 받아, 카가 썼던 시를 읽어볼 뿐이다. 허공을 부유하는 눈처럼 존재하지 않는, 불행한 영혼으로만 읽어볼 수 있는 시인의 뜨거운 시를!


  눈 속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풍경을 길로 만들 수 있다.



   * 등장인물 (내 마음대로의 느낌이므로 다른 인물일수도 있다.)

  카 - 독일로 망명했다가 고향 카르스로 돌아온 시인. 단 3일 동안 그의 인생이 뒤바뀌는 사랑과 사건을 경험한다. 무신론자였다가 후에 ‘무엇’으로 변한다.

  오르한 파묵 - 이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 친구인 카의 죽음 이후 그의 시가 담긴 초록색 노트를 찾기 위해 그의 행적과 카르스를 좇는다.

  무흐타르 - 시인 카의 옛 친구. 순수한 꿈이 있었으나 정치적 욕망의 길을 선택한다.

  이펙 - 시인 카의 친구이자 무흐타르의 아내였던 아름다운 여인, 짧은 시간동안 카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과거로 말미암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카르스에 남게 된다.

  카디페 - 이펙의 여동생이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라지베르트를 구하기 위해 연극무대에서 히잡을 벗는다.

  라지베르트 - 신실한 무슬림이자 카디페의 연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투르굿 - 이펙과 카디페의 아버지로 감옥에서 오랜 고통을 당하고 난 뒤 호텔에서 생활한다.

  세르다르 - 판매부수 320부의 <국경 도시 신문>의 발행인. 내일의 기사를 쓰는데 예언처럼 맞아떨어지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단지 우리가 미리 기사를 썼기 때문에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이거야말로 현대적인 저널리즘이지요.’ 라는 그의 말은 무엇보다도 지금의 현실에 걸맞는 풍자다.

  쿠르드인 교주 사데띤 에펜디 - 무신론자 카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만든다.

  예니 하얏 제과점 - ‘새로운 인생’이라는 뜻의 제과점. 오르한 파묵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카와 이펙이 카르스에서 처음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 ‘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타튀르크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이다. 국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1934년에 국회가 그에게 부여한 성이다. 그는 터키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종래의 이슬람 전통을 크게 탈피한 서구적 근대화 개혁 작업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인물이다.

  네집 - 무슬림 학생, 밀렛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조국 혹은 히잡」을 보다가 일어난 쿠테타의 총알에 맞아 죽음에 이른다. ‘무신론자(atheist)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athos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단어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을 의미한답니다. 그러니 사람은 절대 무신론자가 될 수 없지요. 신은 우릴 버리지 않으니까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양인이 되어야 해요.’라는 말을 하던 순수한 이슬람 믿음 내면에 도사린 무신론의 회의로 고통 받는다. ‘히즈란’으로 알려진 카티페를 사랑한다.

  파즐 - 무슬림 학생, 자살한 여학생 테스메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친구 네집이 죽은 후 네집의 영혼에 잠식당하게 되고 자신 내면의 믿음을 시험당한다. 훗날 카티페와 결혼해서 외메르잔을 얻는다.

  메숫 - 무슬림 학생

  테스리메 - 히잡을 벗고 등교하라는 정부의 지시와 가족, 친구들의 압박 속에서 교리를 위반하고 자살을 선택함으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낸 여학생.

  Z. 데미르콜 - 신문기자이자 경호원이었으나 쿠테타 이후 대학 기숙사, 신학고등학교, 정당들을 습격하는 살인자로 활동한다.

  타르쿳 웰춘 - 프랑크푸르트에 온 초기 이민자. 이 글의 작가이자 카의 친구인 오르한 파묵이 독일에서 카의 행적을 찾을 때 도와준다.

 

  * 오타

  1권

  24쪽 11째 줄 : 그를 -> 그는

  108쪽  6째 줄 : 이사이 -> 이 사이

  2권

  132쪽 4째 줄 : 그리고 자신이 붙여준 두 명의 경호원이 카의 곁에 꼭 붙어 있을 테고 말했다.  (문장이 이상하다.)

  141쪽 23째 줄 : 예상치 못하게서로를 -> 예상치 못하게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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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달팽이 >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피워올린 꽃
꽃들의 웃음판 -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정민 지음, 김점선 그림 / 사계절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한시는 한자로 쓰여진 시다.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한시가 주는 느낌을 최대한 살려내어야 비로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표현언어가 다름으로써 생기는 미세한 맛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번역문을 실어놓았다 하더라도 원문을 따로 실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한자로 쓰여진 시는 우리말로 옮긴 것보다 더욱 간결하고 운율이 살아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따라서 한시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한문에 빨리 익숙해지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한시를 읽으면서 시와 한문 둘 모두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욕심만큼 책을 덮고 난 후 만족스럽지는 않다. 아직 문맥속에서의 한자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고 있고 옛 사람들이 자연을 보고 대하며 느낀 시정 역시 단번에 내 가슴을 파고 들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룩들지는 않았다. 비록 수백년 수천년 전의 시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가슴속에서 느꼈던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봄꽃이 만발한 숲에서 한잎 한잎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느낀 감정들, 바람불어 잎새는 떨고 있는데 대지위로 무수히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느끼는 가슴떨림은 비록 그것이 언어적 표현으로 바뀌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이전의 가슴떨림의 기억으로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과 행복함을 어찌 다 말로 하랴. 늘 그대로 있던 세상이 어느 순간 별안간 내 마음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의 느낌을 어찌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가슴떨림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는 해도 어찌 글조차 남겨두지 않고 떠나보낼 수가 있겠는가?

  모든 대상은 마음 속으로 반영되고 그 마음의 빛깔을 통해 다시 가슴 속으로 들어간다. 가슴 속으로 들어가서 이루어진 일들은 때로 다시 어떤 마음을 만들어내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언어로 표현되기도 하며 음악과 그림 등 예술적 형태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마음에 있다. 우리가 격물하는 순간의 마음포착이 이후의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온갖 감정들과 느낌들이 빚어내는 결과물로서의 세상을 대하면서 우리는 다시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내 젊은 날의 마음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변하지 않은 정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감, 즐거움에서 느끼는 가슴떨림도 물론 좋지만 쓸쓸함과 외로움이 가슴 속에서 애잔하게 울리는 떨림을 더욱 선호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새디스트나 매조키스트가 아니다. 쓸쓸함과 애처로움이 그 자체만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의 작용이 내 가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쓸쓸함과 고독함이 방울방울 혈관을 타고 굴러 내 온몸을 그것으로 채우는 동안에도 그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의 내성은 삶의 슬픔 밑바닥에서부터 깨닫게 되는 삶의 비밀의 문을 찾게 한다.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여유와 지혜를 추구하게 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누구나가 꼭 거쳐야만 하는 그 문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목표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게 됨을 알게 된다.

  한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뼛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슬픔, 눈물없이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을 울리는 문학양식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 존재의 심연 그 보이지 않는 바닥에는 어쩌면 슬픔의 강이 흘러 그 물로써 삶의 기쁨과 행복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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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미네르바 > 무겁다, 그러나...
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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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터키를 서양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이라고 해야 하나? 유럽과 아시아 경계에 있어 어디에도 소속되기 힘들어하는 나라. 그래서 그럴까? 터키는 그만큼 자기들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나라다. 유럽의 변방, 아시아의 변방인 터키. 대부분 유럽 국가의 종교는 기독교가 많지만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이 책은 그런 이슬람 문화와, 세밀화라는 예술, 남자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의 사랑이 얽혀있는 추리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소설은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가 말을 한다. 작품의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다. 죽은 자뿐만이 아니다. 말(馬)이 이야기를 하고, 나무가 이야기를 하고, 죽음이, 금화가, 빨강색이, 개까지 나와서 말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화자가 되어서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니,(그렇게 시점이 바뀌다 보니) 처음엔 누가 얘기하는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읽다보니 몰입하는데 힘겨웠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지식의 폭이 깊지 못한 데서 오는 힘겨움이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살인사건의 원인은 사랑으로 인한 치정사건도 아니고, 돈이나 명예 때문도 아닌,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동양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 가치관의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다. 16세기, 터키의 전통 화풍인 이슬람 세밀화가 서양의 화풍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슬람 세밀화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즉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예술이어서 인간의 시각인 원근법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서양의 화법은 이들에게는 위험한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들은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신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신성을 모독하면서까지 예술이 우위일까? 아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가장 위대한 세밀화가는 자신이 일생을 걸고 얻은 화풍과 기법을 새 주인이 된 샤의 권력이나, 새 왕자의 기분, 혹은 다른 시대의 감각에 복종하려고 포기하는 일이 없다고 했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림의 화풍이나 기법을 바꾸지 않으려고 스스로 용감하게 눈을 멀게 한다고 했네...”(p255)
그들은 자신의 화풍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 것조차 거리낌없이 행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에니시테는, 술탄에게 서양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종용한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술탄의 세계를 서양화풍으로 그릴 것을 명을 받은 밀서제작 책임자인 에니시테는 궁정화원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 넷을 뽑아 일을 착수한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네 명의 세밀화가, 엘레강스, 황새, 나비, 올리브는 서양화풍에 흔들리게 되고 여기서 갈등과 불안을 느낀다. 결국 그 갈등은 살인 사건으로 이르게 된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에까지 확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이 책은 세밀화뿐만 아니라 밀서제작책임자인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와 살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12년 만에 고향에 온 카라와의 사랑이야기에도 흥미를 더해준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세큐레는 세상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남편이 전쟁에 나가 4년째 돌아오지 않은 미망인이다.(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세큐레를 열렬히 사랑하는 시동생 하산, 12년동안이나 한시도 잊지 못했던 카라. 이 두사람의 사이를 저울질하는 세큐레는 자기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남자 카라를 택하고, 카라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살인 사건의 중심에 빨려 들어간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대대적인 광고 때문에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각 언론에서도 이 책에 대한 찬사는 뜨거웠다. “오스만 제국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고 정밀하게 재현해 낸 이 시대의 고전(미국/ 로스엔젤레스 타임지)” “현기증이 일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운 세계문학의 진수(독일/프랑크푸프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 문학적 묘미와 재미를 결합시킨 완벽한 소설(영국/데일리 텔레크래프)”라고 하며 격찬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나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에서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격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일단 터키에 대한 문화적 이해도 부족하고, 예술에 대한(특히 세밀화) 지식도 부족한 탓일 것이다. 참 힘들게, 어렵게, 오래 오래 읽은 책이다. 그러나 읽는 것만으로도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들 정도로 무게 있는, 값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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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한편의 이슬람 세밀화!!!
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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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품은 책이 아니다. 그림이다. 그림을 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읽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이슬람 세계와 먼 거리를 유지했는지도 느끼게 되어 더 어렵다. 한 작품을 편견 없는 눈으로 작가가 쓴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화자가 따로 없고 각 단락마다 그 단락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작품이 이어진다.

하나의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어느 시대의 풍경화다. 그림 안에는 사람이 있고 개가 있고 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숨결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본다고 치자. 한 남자를 살펴보고, 그 옆의 여자를 살펴보고, 앉아 있는 개와 달리는 말과 나무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화가를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평가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슬람 국가가 쇄락하기 바로 전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과 전통을 벗어나려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러면서 그런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간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고 그 시대에 묵묵히 서 있던 나무와 함께 살았던 개와 말과 그림에 칠해지던 색의 이야기이다.

아주 세밀하게 읽지 않으면 쉽게 지치게 되는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나면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다. 공들여 읽으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야 할 것이다. 책 한 권을 이렇게 오래 읽은 적도 없었고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좌절한 적도 없었다. 나의 무지가 이 작품을 읽는 동안처럼 슬펐던 적도 없었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앞장부터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을 느낀 적도 없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진가는 읽는 사람 개개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책이다. 차라리 한 장의 그림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을 뿐...

더 할 수 없는 글은 책 내용으로 대신하고 싶다. 1권 320쪽의 내용이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수천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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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녀물고기 > 어느 날, 인간은 신을 버리고 스스로 신이 되었다
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이성적 행위라 보고, 모든 인간은 알기 원하고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 수염 텁수룩한 선생님은 ‘원근법’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였다. 검정 일색이었던 옷차림과, 표현주의파의 시를 읽는 것 같은 감흥 운운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전혜린 광신도’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눈치챈 것은 반에서 몇몇 아이들 뿐이었으므로, 그 몇몇이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밀회를 나누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이른 바 ‘문학소녀’들의 얼치기 자긍심이었던 셈이다.

선생님은, 원근법은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변환을 의미하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르네상스의 이념을 예술의 분야에 적용한 가장 뚜렷한 실례라고 하였다. 그러고선 평면적인 중세의 그림과 초기원근법이 사용된 그림 몇 점을 걸어놓으시고는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으셨다. 봐라, 새로운 화법을 대면하고 중세인이 겪었을 가치관의 혼란이 느껴지느냐. 1분단에서부터 5분단까지를 느린 화면으로 흐르는 시선이 귀엽기는 하였으나, 아메리카 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들떠있는 선생님의 홍조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치관의 혼란이라니, 내겐 그저 화풍의 변화나 기껏해야 무지의 타파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당시 선생의 소년스러운 자부심을 환기시킨다.

오르한 파묵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시대와 시대의 틈새에서, 새로움에 대한 매혹과 죄의식 사이에서 번민하는 터키인들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밀화가는 언어의 기록을 그림의 기록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신의 말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인물과 사물을 완전하게 묘사하는 것이 온당했고, 때문에 그들이 묘사하는 것들은 같은 공간에 같은 크기로 놓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갑갑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신의 음성,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 상징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원근법)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원근법은 신이 구축한 평면의 화면에 잃어버린 3차원을 재현하려는 인간의 욕구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본 외적인 실체를 그리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회의 시녀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으며 신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신에게 속한 만물을 인간의 영토에 끌어들이는 일, 그것은 신의 신성함을 인간의 시간으로 지우는 일이고 인간성마저 종교의 한 속성이라 여기던 그들에게 신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외치는, 우상 숭배의 표징이었으니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문명의 충돌은 가치관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러한, 세계관과 이념에 고정적 법칙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 오르한 파묵은 진중함과 엄숙함 사이에 살인사건과 로맨스를 배치해 둠으로써 지루함의 혐의에서 벗어난다. 또 챕터마다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의 언어로 자분대게 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내 이름은 빨강』에 속독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장 좋은 독법은 연상법이다. 화가의 눈으로 보고 화가의 손으로 그려갈 때라야 독서는 완성된다. 그만큼 오르한 파묵의 묘사는 세밀하다. 책을 읽으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 느리게 걸으며 파묵의 풍광을 음미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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