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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약간 지난 시간, 해는 내 정수리 부근에 있습니다. 나는 잘 어울리지 않는 녹색 모자를 쓰고 있어요. 보드라운 도시의 신은 사실 이 길에선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3번 국도 우회도로 공사가 한 창인 언덕을 넘습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종일 뻐꾸기가 울고, 길가엔 보라색 엉겅퀴가 피어 있어요. 언덕을 오를 때마다 몸이 불은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쉽니다. 내리막에선 발끝부터 살살 걸어요. 이럴 땐 인간이 직립을 선택한 게 실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남자가 낮잠을 자던 화단엔 작약이 시들고 노란 아이리스가 피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가난했던 걸까요. 벽은 기울고 좁고 어둡습니다. 탁해진 유리창 안쪽에 해가 들면 먼지가 뿌옇게 쌓인 이국의 조화가 보이고, 흙 묻은 속옷이 평상 의자에 함부로 걸쳐 있어요. 어둑한 뒤란엔 노모가 가끔 내다 버리는 소주병이 쌓여있을게 분명합니다. 매일 그 집 앞을 지납니다.

엊그제는 신문의 연재소설을 읽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무덤 속의 여자’ 같은, 약간 우스운 제목이었는데, 우울과 몽상을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플러스 펜을 갈겨쓰면 그런 색입니다. ‘poe’의 표지색깔. 언제 아버지가 술에 취해 걷어찼던 도둑고양이의 눈동자의 색. 작은 고양이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그 작은 배를 오르락내리락 힘겨운 숨을 쉬면서 동그란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어요. 나는 그 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화단에서 잠을 자던 남자의 발끝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아카시아가 핀 한적한 숲길을 걸으며 내 발소리에 놀라고, 여러 번 뒤를 돌아 본 것도 그 남자 때문입니다. 저를 노려보는 고양이를 만나면 사나운 눈을 하고 고양이를 걷어찰 것 같은 가난한 남자를 보아서 그래요. 그래, 소주병으로 방을 장식하는 사람이 몇 떠오른 겁니다.

이웃집 빅토리아의 금색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피부를 검게 하고 금방 지치게 하는 오월의 바람이 부는 곳. 도시의 외곽, 골짜기. 녹색먼지가  내 방안까지 날마다 쌓이는 이 집에서 오랜만에 편지를 적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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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폭우처럼 내립니다. 창에 노트를 기대어 놓고 척척한 눈이 쌓여 무거워진 소나무 가지나 희게 변한 자동차를 봅니다. 검은 우산을 쓴 남자가 큰 발자국을 찍으며 지나가고 나는 잘 나오지 않는 펜을 몇 번 흔들어 봅니다. 지난밤에 받아 놓은 해금-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올 때까지-을 듣습니다. 뒤 따라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가수가 부른 사랑의 슬픔을 듣고 보고싶다, 나 사랑합니다, 도 듣습니다. 얼마만의 눈인지. 은행잎이 노랗게 거릴 덮었던 11월의 토요일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영화를 보러 갔었습니다. 동시상영을 하는 영화관에서 레인맨을 봤어요. 그 날 첫눈이 내렸습니다. 영화관의 원형계단을 내려오다 자동차에 쌓인 싸락눈을 봤습니다. 포커패의 순서를 다 외우던 더스틴 호프만과 검은 안경을 쓴 잘 생긴 톰 크루즈가 아버지에게서 농담처럼 물려받은 스포츠카가 눈에 선합니다. 70밀리 영화가 나오면 소란스럽던 시기였어요. 벌써 십 몇 년 전의 얘기입니다. 그 날 대천에서 장항까지 한번에 가는 직행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우린 그때 문 앞에 겨우 서서 사람들이 신발에 적셔 나른 더러워진 눈 녹은 물과, 누군가의 구두에 달라붙어 내 발치의 계단에 달라붙어 있는 샛노란 은행잎을 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었어요. 아주 조용했습니다. 창은 금새 습기로 뿌옇게 변해버렸고 더운 입김들 사이 와이퍼 모양으로 작게 젖어서 짙어진 풍경들이 보였습니다. 아침에 시간이 돼서 영화를 보고 밖엘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고 3의 토요일이 떠올랐습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호박떡을 사다 먹었습니다. 문자를 열 몇 명에게 보냈는데 답을 보낸 사람은 둘 뿐이고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동네는 우리 집 근처뿐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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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이 달린 정사각형의 쇼올을 두 번 접어 무릎을 덮고 두꺼운 외투로 어깨를 감싼 채 한 나절을 보냅니다. 오늘은 유난히 추워서 히터가 있는 창가에서 꼼짝없이 책만 읽습니다. 어제 내가 살짝 눈을 쥐어 눈사람을 만들어 닿을 듯 붙여 놓았던 그 자리입니다. 음지쪽에 얼마간의 눈이 남아 있을 뿐 그제의 낭만적이고 신비스러운 기후는 이제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 날은 고층아파트 베란다의 까치집에도 눈이 쌓였었습니다. 나는 두 잔 째 차를 마시고 있고 집에서 가져온 花樣年華를 듣고 있습니다. 안쪽 강의실에서는 서예를 하는 어르신 몇 분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계시고 회의실은 비어 있습니다. 매일의 일과가 같습니다. 그제는 평소와 다르게 아침 눈이 내려줘서 우산에 싸륵싸륵 눈 떨어지는 소릴 들을 수 있어 특별했습니다. '하루쯤 눈을 그냥 보는 것도 좋아.' 그럼요, 정말 그렇습니다. 편지 반가웠습니다. 눈이 오고 난 다음 날이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천천히 의자의 개수를 셉니다. 한켠에 세워둔 의자까지 모두 셉니다. 열 아홉, 여덟.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 불빛에 반짝입니다. 때론 의자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큰 소리로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비어 있는 채로 이고, 가끔은 의자 같은 자신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매일 비어있는 의자들을 닦고 히터 가까이에 앉아서 한나절을 보냅니다. 그제는 눈이 내렸고 그 한나절이 참 좋았습니다. 어쩌면 봄이 되기 전에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눈 내리던 어스름의 아침이 제 花樣年華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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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억새풀 숲에서 썬크림을 바르던 여자가 저에요. 주차를 하다 숙소 주차장의 큰 항아리를 깬 것도 저구요. 새벽에 창을 열었을 때 밀려든 산국 냄새가 좋다고 하아, 하고 중얼거리던 여자가 접니다. 새벽호수에 물안개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도 저고, 일찍 수퍼로 달려나가 가스를 사오고,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인 사람도 접니다. 큰 배낭을 매고 집 현관에 들어서자 경비 아저씨에게서 소포를 건네 받던 여자가 접니다. 내가 뒤돌아서 얼굴을 찡그렸던 건 아저씨 때문이 아니라 꼭, 일상의 내용증명 같기만 한 소포꾸러미 때문이었죠. 코가 시린 게 벌써 겨울인가요. 미친 듯 발을 저어야만 앞으로 가던 오리 보트 같은 가을은 없을까요. 멈춰도 보고, 흔들리게 그냥 두어도 보고, 은 비늘 속으로도, 누가 던져 넣은 낙엽 속으로도 마음대로 방향을 돌려도 보는 그리고 가끔은 뒤로도 가보는 가을 말이죠. 딱히 되돌려 놓을 만한 거대한 운명 같은 것도 없으면서 이 계절이 참 아쉽습니다. 그래도 산국 핀 가을로 여행을 다녀왔지요.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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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눈이 내렸어요. 소나무에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습 니다. 언제 보았던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겨울풍경> 속, 전나무 가지 에 내린 눈과 닮아 있습니다. 다시 봄빛처럼 밝은 빛이 들어오고 집안 은 따스합니다. 눈의 박자처럼 들리던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좀 시끄 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던 일을 미루고 성탄인사를 적어보려고 앉 았는데, 아직 닦지 않은 이가 불편하고 부스스 한 머리칼이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작은 아이가 깨어서 내 허리만큼 오는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선 한참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눈이 오니까 참 좋다, 이러면서 요. 나는 늦게 잠이 들었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깨우는 게 미 안 했지만 잠을 자느라 첫눈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아서 요. 오후엔 떨어진 커피 콩이나, 저녁으로 먹을 나물이나, 미역, 작은 케익 같은걸 사러 나갈 참인데, 아무래도 그때에는 몽땅 녹아 없어졌을 것 같아요. 눈을 밟아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기로 했는데말입 니다. 난 조금, 들떠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잘 계시리라 생각합 니다. 성탄 전, Rainier. 2001. 12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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