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2

ᄐ씨,
라오스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어.

엽서

길 떠나기 전, 서점의 간이 판매대에서 사줬던 천 삼백 원 하는 미츠비시 펜으로 쓴 엽서를 받았다.  타클라마칸의 모래 먼지가 묻어 왔을까도 생각하지만, 엽서는 깨끗하고 우표는 가지런하다. O는 사진 속의 엽서를 보고 네가 쓴 거니? 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t의 글씨는 내 것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열대어의 번호

네 걸음을 걱정하다 내 다리가 붓고 네 추위를 걱정하다 감기에 든다. 네가 두 개의 나라를 건너야 내게 엽서가 올텐데 벌써 나는 매일 편지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며칠째 안내음만 들리는 네 빈 전화기에 전화를 넣는다. 낙엽을 한시간이나 으깨며 가까운 길도 돌아서 다녔던 오늘은 감기에 들었다. 어깨가 시리고 고독해서 종일 너만 생각했다. 히말라야를 자전거로 횡단하고 돌아온 신 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안부를 신문으로 확인한 날, 종일 내 일 같이 기뻤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꾹 다문 입매에서 눈부신 고독을 읽고는 너도 그렇겠구나 했다. 묵묵히 걸을 너. 네 입은 모국어를 혼잣말로 중얼거리겠지. 나는 네 고요한 인사가 참으로 그립다. 다섯이나 여섯 나라의 이국풍 엽서보다, 너를 가둔 현실. 어떤 벽, 네 절망, 막막함이나 도피 따위들을 나는 모른 척 하고 싶다. 지쳐 돌아오기를, 어느 정도는 그렇게 바라기도 해서 오늘도 열대어의 번호를 두 번 누른다. 북풍이 불어 옷깃을 여미면서.

어디쯤이냐

서른개의 잎

ㅌ의 여자

가을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가끔 겪는 한 낮의 무더위가 감각을 무디게 한 이유도 있었겠지요.
ᄐ의 여자가 앙코르와트에 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계절을 느낍니다.
정말 ᄐ에게 여자가 있구나 하고, 사랑을 하니 계절을 먼저 느꼈을 테고 팔월부터 이르게 보라색 긴 셔츠를 꺼내 입었겠구나, 중앙로에서 옷가게를 하는 미세스 임이 아침나절에 웃으며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올 가을 유행은 보라와 카키에요- 셔츠의 색을 상상하다 갑작스럽게 마음이 상해서 내게도 가을이 확 와 버렸습니다.
아침에는 햇살 가장자리에 발자국을 찍으며 가을이군, 했고, 앙코르와트라니! 화양연화가 먼저 떠올라 노래를 귀에 꽂고 걷던 산길에 노랗게 핀 산국을 보니 또 저리고 크게 잘 익은 호박밭과 아침나절만 잎을 여는 나팔꽃 무덤을 지나다가도 그랬습니다.

키가 아주 큰 헬스클럽의 남자가 장난스럽게 입맞춤 할래요? 했을 땐 정말 어느 구석에 끌고 가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차고, 나뭇잎도 몇 개 구르는 정오의 가을이 뭐든 해보라고 충동 질 하는 것 같았습니다.
ᄐ의 여자는 앙코르와트의 돌 사원 오래 된 구멍에 입을 대고 뭘 속삭일까요.
ᄐ과 손을 잡고 잠을 자고 웃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는 ᄐ의 여자가 걷는 앙코르와트의 사원은 가을이 없겠지요.
하도 행복해서 혼자 중얼거리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미 ᄐ의 전화번호도 잊었고, 손의 감촉,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 내게 빈자리가 생겼다고 전화 할 수도 없고, 어떤 고백 같은 걸 하기엔 부끄럽게도 나이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화양연화를 들어서 좋습니다. 찬 공기 때문에 살갗에 돋는 소름도 좋고,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ᄐ의 여자까지도 좋습니다.
차게 언 날카로운 침에 찔린 것처럼 정신이 놀라 깨었습니다.
오래 쉬어서 녹이 슨 심장이 모처럼 피를 돌게 하고 눈가가 촉촉해 져서 종일 웃고만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