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폭우처럼 내립니다. 창에 노트를 기대어 놓고 척척한 눈이 쌓여 무거워진 소나무 가지나 희게 변한 자동차를 봅니다. 검은 우산을 쓴 남자가 큰 발자국을 찍으며 지나가고 나는 잘 나오지 않는 펜을 몇 번 흔들어 봅니다. 지난밤에 받아 놓은 해금-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올 때까지-을 듣습니다. 뒤 따라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가수가 부른 사랑의 슬픔을 듣고 보고싶다, 나 사랑합니다, 도 듣습니다. 얼마만의 눈인지. 은행잎이 노랗게 거릴 덮었던 11월의 토요일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영화를 보러 갔었습니다. 동시상영을 하는 영화관에서 레인맨을 봤어요. 그 날 첫눈이 내렸습니다. 영화관의 원형계단을 내려오다 자동차에 쌓인 싸락눈을 봤습니다. 포커패의 순서를 다 외우던 더스틴 호프만과 검은 안경을 쓴 잘 생긴 톰 크루즈가 아버지에게서 농담처럼 물려받은 스포츠카가 눈에 선합니다. 70밀리 영화가 나오면 소란스럽던 시기였어요. 벌써 십 몇 년 전의 얘기입니다. 그 날 대천에서 장항까지 한번에 가는 직행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우린 그때 문 앞에 겨우 서서 사람들이 신발에 적셔 나른 더러워진 눈 녹은 물과, 누군가의 구두에 달라붙어 내 발치의 계단에 달라붙어 있는 샛노란 은행잎을 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었어요. 아주 조용했습니다. 창은 금새 습기로 뿌옇게 변해버렸고 더운 입김들 사이 와이퍼 모양으로 작게 젖어서 짙어진 풍경들이 보였습니다. 아침에 시간이 돼서 영화를 보고 밖엘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고 3의 토요일이 떠올랐습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호박떡을 사다 먹었습니다. 문자를 열 몇 명에게 보냈는데 답을 보낸 사람은 둘 뿐이고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동네는 우리 집 근처뿐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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