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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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라떼를 텀블러에 담아 사 마셨던 집 앞의 자그마한 커피숍 여주인은 이사 나가던 날 진심으로 서운해 했다. 아직 아기 티가 나는 둘째 아이를 이제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빌어. 많은 얘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느 날 울고 나와 늦게 커피 주문을 받는 그녀에게 하지 않은 질문은 우리 사이를 조금 좁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아지트처럼 가곤 했던 도서관의 따뜻한 사서 선생님은 갑작스런 퇴직 앞에서 손수 믹스 커피를 나에게 타주며 섣불리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일상이었던 나날들과 작별하며 그렇게 나이가 든다. 정말 대단치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간들이 뒤돌아 보면 거기 그렇게 다른 평행 우주의 차원에서 과거의 나를 품고 무한 반복될 것만 같다.



아까 상점 앞에서 내가 울었던 것 말이오. 나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게 한 그 일 말이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 앞쪽 카운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오간 사소한 거래 말이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요.

-켄트 하루프 <축복> 중에서



이야기는 작가 켄트 하루프가 설정한 가상의 아름다운 마을 홀트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한 노인을 중심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늙은 아내와 나이 든 딸, 이웃 조손 가정, 마을에서 입지를 잃어가며 가족에게도 소외되는 목사의 나날들이 교차하고 만나며 풀려 나간다. 대드의 시선은 자신의 과거의 삶을 반추하는 것과 이웃들의 보여지는 현재를 끊임없이 오고가며 마을의 서서를 완성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들, 가족 간에 풀리지 못한 숱한 오해와 실망은 그 자체로 온전히 켜켜이 쌓여 각자의 삶의 한 장을 이룬다. 작가는 섣불리 끼어들지도 상황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대신 읽는 이들은 이 마을의 지극히 평범하게 넘어지고 절망하고 또 다시 묵묵히 나날의 숙제를 해 나가는 그들을 통해 우리를 보고 우리의 과거를 되짚고 미래를 상상하게 되며 켄트 하루프가 하고 싶어했던 얘기에 저도 모르게 젖어들게 된다. 산다는 일의 그 지리멸렬한 일상이 가지는 지엄한 무게가 이렇게 아름답게 형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뭉클했다.




8월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대드 루이스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고 이웃집 어린 소녀 앨리스는 저녁에 길을 잃었다가 어둠 속에서 마을의 가로등 불빛을 보고 집을 찾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날씨는 차가워지고 나뭇잎이 졌으며, 겨울이 되자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홀트 카운티의 고원지대에는 밤새 폭풍이 불고 사흘 내리 눈보라가 쳤다.

-켄트 하루프 <축복> 중에서




대드 루이스의 마지막은 <스토너>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슬픈 죽은 자의 시선과 그의 곁을 지키는 산 자들의 시점은 섬세하게 얽혀 장엄한 끝의 시간을 완성한다. 사는 일을 쓰는 것과 그것의 마침표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통과하는 일인데도 언제나 놀랍고 항상 슬프다. 이야기는 그것을 뛰어넘어 보려 하지만 그 주위를 맴돌며 한계를 인정할 때 가장 빛난다.


오늘도 사라지는 시간들. 여전히 주워담고 싶은 말들. 되돌리고 싶은 실수들. 그게 사실은 축복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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