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반지갑을 쓰다가 처음 내 손으로 장만한 장지갑을 골똘히 들여다 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물건을 가지지만 그 물건만 내가 죽고도 완강하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비가 주는 환상은 어쩌면 불멸에 대한 기만적 위로가 아닐까, 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후대에 역사 속에서 추려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숱한 익명 속에 스러질 것이고 어쩌다 나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족적을 남기게 된다면 책을 좋아했던 할머니 정도로 추억되어 한 문장 정도로 남을까.

 

그러니 16세기의 프랑스 농부의 이야기는 태반이 문자를 쓸 수 없었다는 그 시대에 운명의 장난으로 기이한 송사에 휘말리고 그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21세기의 나에게 날아올 이유가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시사점을 남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가는 나날들이 몇백년이 지나고도 과연 유의미한 가치를 지닐까. 지금 우리는 언어를 써서 자신의 일상이나 읽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 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마저 소실된다면 아니 가까스로 그것들이 남는다고 해도 그 행간, 사이에서 비어져 나간 것들은 어떤 식으로 유추되고 정리될 것인가.

 

 

프랑스의 근대사 전문가인 저자가 살려 낸 16세기 가장의 가출로 벌어진 한 가정 내에서의 일련의 소동은 그것을 법정에서 지켜보고 내러티브의 주축이 되기로 한 판사 자신의 삶, 오늘날 여기에서 그것들을 복원해 내고 추정하고 추측하는 우리들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아버지의 곡식을 훔치고 난 후 벌어질 일련의 후속타가 두려워 어린 아내와 아들을 남기고 돌연 가출해 버려 피렌체 산맥을 넘어 심지어 적들을 위해 전쟁을 하고 다리까지 잃게 된 마르탱 게르가 마침내 귀향한 후에 맞닥뜨린 현실은 기함할 노릇이었다. 자신을 자처한 낯선(아마도) 사내가 아내와 동침하여 아이까지 낳고 버젓이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떡하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초엘리트 코스로 엄친아였던 판사 코라스는 이 기이한 사건의 사기극의 주인공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자신이 담당했던 소송에 관련된 모든 것들과 자신의 주석을 남기게 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사기꾼 가짜 마르탱에게 자신을 이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톨릭이 대세였던 당시에 가랑비에 젖듯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프로테스탄티즘에 물들며 그는 자신이 딛고 섰던 그 굳건한 지반이 와해되고 있음을 알았을까. 이 출세에 기민했던 인문주의자는 가짜 남편의 품 안에서 행복해했던 마르탱 게르의 아내의 그 납득하기 힘든 변절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 삶에 대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생각의 제단을 쌓아간다.

 

책임감 없이 집을 떠났다 나무 의족을 달고 돌아온 남편, 그 사이 남편을 자처하는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 남이 일구어 놓은 것들을 거짓 행세로 가로채고 버젓이 그 안의 따뜻한 사랑까지 소유하려 했던 아르노 뒤 틸이 남긴 흔적은 지금 여기에 숨겨 놓은 어떤 추악한 욕망, 진실에 대한 소망, 타인에 대한 미움, 질투가 한데 어우러진 삶의 축약본 같다. 지근거리에서 커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 어떤 조망 아래에서는 한없이 사소한 것들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 조망은 '읽는 일'에 기대는 바가 크다.

 

 

 

 

 

 

 

 

 

 

 

 

 

 

 

 

프루스트는 독서를 우정에 비유한다. 그 우정은 부담없고 진실한 것이다. 내가 하는 실수, 언변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든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그 친구가 나의 생 전체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젊은 날 존경해 마지 않았던 대문호 러스킨에 대한 무조건적 경배의 철회는 그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에 관한 소고에 잇대어 러스킨의 아미앵 기행에 대한 주석, 화가 샤르댕과 렘브란트, 모로, 로세티에 대한 글들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예술 작품에 할애한 섬세한 묘사와 감상, 화가 엘스티르가 화자에게 끼치는 지대한 영향 등이 가지는 깊이를 이해하게 해 준다. 프루스트가 지향했던 어떤 진실, 실재에 대한 천착의 결정체가 위대한 화가들이 도달한 지점에 있다고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번역의 체를 통과한 프루스트의 목소리는 그 어떤 모호함과 사변적인 분위기 안에서 명료해지지 않아 때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이 지루하면 지루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프루스트 자신이 이야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사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좀 부담스럽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 그런데도 그가 어쩌다 토로하는 자신의 깨달음들은 너무 귀중해서 도저히 그의 곁을 맴도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타인의 구미에 맞추어 일할 때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할 때 그 결과는 반드시 누군가의 공감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한 무엇이 아무에게도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법이다.-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중

 

암요,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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