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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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낳는다는 것보다 더 지축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화를 동반한다. 이제 '나'는 더이상 온전히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음을 뜻한다. 타인에게 폐가 되는 행동들이 정작 '내'가 아닌 '나의 아이'에게서 나올 때조차도 나의 배꼽은 아이의 배꼽과 탯줄로 이어져 찌릿한다. 아이는 나의 부속품이 아니지만 아이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나를 때로 조준한다. 모든 계획과 모든 변화에 아이는 우선순위로 감안되어야 하고 때로 제약이 된다.  

커가는 아이는 시간의 현현이다. 살면서 시간의 그 위업을 이다지도 절절하게 체감할 기회가 또 있을까? 배냇 웃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던 아기는 어느새 굽있는 구두를 사달라고 조르고 자신의 행동에 변명을 붙일 줄도 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는 나를 떠날 것임을 알고 때로 가슴이 저릿해진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더 좋은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기 보다 더 나약하고 더 나쁜 나를 때때로 발견하고 재조정하는 성장의 단계다. 미혼일 때는 애교로 봐 줄수도 있었을 온갖 약점들이 줄줄이 극대화되어 튀어 나오고 생활인으로서 무능력하거나 약한 그 작은 틈새가 밑창이 벌어진 신발처럼 흉하게 드러난다. 누군가가 아이를 키우는 나를 관찰한다면 '허걱'할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싱글파더처럼 되어 버린 작가가 아이를 키우는 스스로를 객관화화하는 그 지점에 살짝 발을 올려 놓고 시작했다. 페터 한트케의 아이는 내 아이와 많이 닮아 있었다. 예민하고 소심한 그 성정이 또래집단의 아이들에게서 상처받는 풍경들에 아프게 젖어 들어갔다. 고작 네 살인 아이들 집단에서 발현되는 그 이기심과 폭력성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성이 아니다. 천진난만함과 순진무구함은 때로 잔인한 이기심의 원형의 거친 칼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거칠게 싸우다 서로 따귀를 올려 붙이기도 하고 약해 보이는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기도 하는 모습들은 그 결고운 볼에 어린 홍조에는 예고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다. 가해자의 부모도 피해자의 부모도 견디기 힘든 풍경이 주변에서 펼쳐진다.  

그게 아니면 <아이들>이란 우선 또래들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옳고, 그래야만 고통과 부당함을 겪으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종족이었던가?
                                                                                                                                                 p.126

하루키식의 표현 때로라면 전력 투구하여 근육을 연마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소설 창작 과정의 그 온전한 시간과 에너지를 페터 한트케는 아이 때문에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이 이미 식어버린 사람과의 사이에서 부산물처럼 떨어져 나온 아이가 어느새 자신의 삶 속에 스며들어와 그를 제한하고 좌지우지하는 생활을 객관화여 그려내고 있다. 스스로를 '그'로 칭하고 객관화하는 모습은 어떤 안간힘을 연상해 내는 풍경이어서 편안하지 않았다. 주양육자로서의 역할을 '나'에게서 분리해 내어 내 눈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서 출발하여 불가능에서 끝나는 일임을 알기에 그 부자연스러움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새 '나'는 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를 떠올릴 수가 없다. 작가로서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조차 글들의 소재로 객관화시켜 버리려는 그의 노력은 때로 삶에 대한 냉소처럼 느껴져 자꾸 뒷걸음질을 치게 했다. 그래서 전반부에 실린 어머니의 자살을 다룬 '소망 없는 불행'에 대한 리뷰를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너무 슬픈데 아니 이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만큼 소진되어 버린 그 버석거림이 연기된 것인지 사실인 것인지를 나는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가장 객관적으로 반응하기 힘든 혈연의 관계망에서 그것을 시도하고 있고 그것은 어떤 낯선 이질감으로 독자를 매혹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는 것같다.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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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12-0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친 객관화도 도피나 회피의 심리를 무의식 중에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블랑카님, 커가는 아이는 시간의 현현이다,라는 리뷰문장에 공감되어요.
나의 부정적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섬뜩하지만 그걸 또 끌어 안아줘야겠어요.^^
어떨 땐 아이가 나의 분신이라기보다 내가 아이의 몸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은 때가 있어요.

blanca 2010-12-06 21:12   좋아요 0 | URL
맞아요...프레이야님 지적에 동감합니다...엄마는 아이를 떠나서 무언가를 그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놀랍고 신기해요...아이가 내 품을 떠나면 그 때는 어떻게 홀로 설까요...

2010-12-07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7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