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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있을 법한 것에는 끌리지 않는다.
오히려 믿기지 않는것, 불가능한 것에 그것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 페르난도 페소아
열 여섯 살에는 모든 불가능한 것들에, 불온한 것들에 끌렸다. 스무 살에는 껍질이 달보드레한 것들에 중독되었다. 서른 살에는 물질의 권능에 사로잡혔다. 서른 중반. 나의 과거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나의 사후에도 나를 여전히 미치도록 사로잡는 것은 책임을 수긍하게 되었다.
책에 대한 책은 용모가 매력적인 이성을 알아가는 과정의 포문을 연다. 인간성까지 그럴듯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책에 대하여 썼다는 것만으로 책중독자들의 기본적인 호의는 깔고 가는 셈이다. 이 책의 저자 김이경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이 첫 소설집임을 고백하는 실책을 범한다. 첫소설. 무엇이든 그 서투름과 설익음을 광고하는 접두어 밑에서 솟아오르기란 쉽지 않다. 그래, 그러니까 이게 겨우 처음이다, 이거지. 누구나 마음속의 이러한 속삭임을 저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이라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이니까 이러저러할 것이다,라는 구획 안에 재빨리 구겨넣고 적당히 무시해주는 타성을 먼저 학습한다.
그러나 이 책들에 관한 불온한 상상들을 선포한 저자의 이 첫소설집은 인간성까지 좋은 퀸카를 존재감없는 중매쟁이 덕택에 불시에 만난 듯한 환희를 선사한다. 시대와 지역을 종횡무진하며 책에 관한 역사와 숨은 얘기에 서사를 가미한 열 편의 얘기는 픽션의 형식을 띤 책에 관한 아담하고 내밀한 역사이다.
저승에서 저마다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한다는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 패설에 빠진 조선 사람들의 얘기인 상동야화, 분서의 역사, 인피(사람의 피부) 장정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일본 에도시대의 걸어다니는 책대여점 가시혼야를 두고 벌어지는 기담, 말하는 사람을 책으로 대여하는 얘기, 장서가들, 중세유럽의 도서문화, 책도둑, 표제작인 순례자의 책 등 애서광들을 달뜨게 할 매혹적인 책에 대한 얘기가 인문학적 해설과 함께 다채롭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애인의 어깨피부로 장정한 실제 사례를 통한 책의 몸에 관한 시선과 역으로 사람의 몸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 것에 대한 얘기는 문자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접촉 불가한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쉬고 호흡하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 확장되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전자책의 등장과 각종 영상매체들로 인한 문자텍스트에 대한 경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또한 살아나가는 일 그 자체가 삶으로 엮이고 그 삶이 하나의 텍스트로 치환되어 장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하나하나에 대한 존귀한 무게감을 실어주는 일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역사가 죽는 것이다. 누구나 등에 자신의 삶의 장서를 지고 다닌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나그네들에게 "말하소!"라고 외쳐대며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열망했던 것은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삶을 이야기화하려는 경향과 그것에 매혹당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보르헤스처럼 천국을 도서관으로 상상한다면 그리고 내가 과연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도서관의 사서를 꿈꿔본다.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힘이 오늘을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