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신경숙의 '외딴방'이 나에게 왔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녀의  '외딴방'이 궁금해졌다. 

사실 솔직히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3때 2권으로 분권되어 나온 이 책이 친구들의 책상 위에 줄줄이 누워 있는 모습에 괜한 반감부터 가졌고, 대학에 진학해서 교양국어 시간에 그녀의 단편 두어편과 '깊은 슬픔'을 대충 읽고 열심히 까 댄 주제넘은 글이 칭찬받자 기고만장했던 아찔한 기억이 한 켠에 있다. 나는 그녀의 지나치게 여성적이고 멋내는 듯한 문체가 싫었다. 그 때는 한창 담백하고 호흡이 빠른 남성적인 문체를 좋아했던 터라... 

그런 나에게 외딴 방은 속죄처럼 왔다. 이 소설을 읽으며 줄곧 소설은 작가의 인생이상의, 체험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작가들의 소설의 기본테마가 반복하는 일정한 틀밖으로 나가기 힘든 것과, 소설 속의 수많은 등장 인물이 작가 주변의 실제 인물들의 버무림이라는 것. 예컨대 박완서는 주로 나이든 노년, 전업주부들의 이야기, 전후상황의 유년들. 신경숙은 주로 가족들의 얘기, 어머니의 얘기, 등.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에 있어 자신의 직접 경험만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전적인 거짓말로 이루어진 소설은 싫다. 어느 지점은 반드시 무리가 있고 어느 지점은 반드시 뻥 뚫려 있는 허술함이 발견되어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소설 자체를 안 읽는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도 여럿 있다. 나도 한동안은 지나친 상상력과 픽션전개로 돌출되는 그 허술함의 조각들이 싫어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읽어도 반드시 대여했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는 얘기는 두번 다시 손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실제적 삶에 대한 고뇌가 결여되어 있다는 얘기와 다름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리얼리티의 정수. 작가도 종종 사실과 픽션의 중간쯤이 될 거라고는 했지만, 그 장막 속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솔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다 사실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것은 또 그 발설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작가를 질식시킬 수 있기에... 

필력은 공부로 연마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경숙 앞에서는 여지없이 이 편견이 부서진다. 그녀의 단련된 잘 연마된 문장들은 하나 하나 시구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나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펼쳐낼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시샘이 난다. 게다가 그 전개 구조의 탄탄함이라니...이를테면 이런 대목... 

   
 

이제야 문체가 정해진다. 단문. 단조롭게.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사진 찍듯. 선명하게. 외딴방이 다시 닫히지 않게. 그 때 땅바닥을 쳐다보며 훈련원 대문을 향해 걸어가던 큰오빠의 고독을 문체 속에 끌어올 것.

 
   

문체에 대하여 시제에 대하여 이런 고민이 뒷받침 되어 얼개가 체계화된 소설을 접한 것은 처음이다. 여기에는 치열한 공부가 뒷받침 되어 있는 듯 하다. 막 써대는 낙서 수준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이상화되어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역시 이런 설명에도 현재와 대과거와 과거가 사정없이 교차하는 그녀의 전개 방식은 독자에게 다소 불친절하다. 잠깐만 집중하지 않으면 헤매고 만다.   

소설의 줄거리는 주로 현재의 글 쓰는 '내'가 16살 시절로 회귀하여 3년여간 산업체특별학급에서 다니던 시절의 얘기이다. 특히 '나'중심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그녀를 둘러싼 공단의 수많은 '그녀'들의 처절하고 쓸쓸한 삶에 대한 확장이다. 여기에서 '나'는 서술의 주체이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녀들'을 서술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가족에게 끝간데 없이 헌신하는 큰오빠 얘기와, 아랫방 희재언니의 죽음에 관한 얘기가 가슴에 박힌다. 군복무를 하면서 밤에는 가발을 쓰고 학원강의를 나가는 오빠와 아기를 가지고 일터의 연한 남자에게 버림받는 희재언니의 얘기는 그시대의 서글픈 군상이다. 그리고 그 희재의 죽음에 저도 모르게 동참하게 되고 마는 '나'의 슬픈 사연도 더불어...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 결국 나는 하나의 점대신 겹겹의 의미망을 선택한다. 할 수 있는껏 두껍게 다가가자고.

 
   

이처럼 문학의 한계를 여실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정약용이 퇴계문집을 읽고 무릎을 치며 울던 정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바로 이거구나! 내가 하고 싶었지만 그 생각을 적절히 채집하여 표현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 책을 이제나마 만난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한다. 나의 어줍잖았던 치기를......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 와 '리진'정도로 그녀 전체를 판단하고 결론지으려 했던 나의 좁은 소견이 탁 트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한국문단의 축복 같은 소설이다. 외딴방을 들여다 보고 나오고 나는 날, 어금니의 치통과 글쓰기에 대한 탁 트인 시야가 같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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