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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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너무나 완벽해서 별 다섯 개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인종, 여성에 대한 멸칭, 편견은 오늘날 PC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 논란 거리가 될 지점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된 20세기 초 시대상을 감안하고 본다면,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을 도리가 없는 책임은 분명하다. 어떤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노출하는 한계,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무 크고 심오해서 읽는 행위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생명력을 지닌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 여전히 읽는 일에 대한 환희를 느낀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잠식한다는 기사로 사방이 도배되는 와중에도 한 인간이 직접 몸으로 부딪혀 살아내고 만들어 낸 이야기에 감동 받을 수 있다는 건 여전히 경이롭다.



<야생 종려나무>는 윌리엄 포크너가 처음 내세운 제목이 아니다. 부제인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이 그가 붙인 원제목이다. 성경 구약 시편 137편에서 따온 유대인들의 망향가의 일부다. 물론 이 대목 또한 현대 중동 상황을 감안한다고 보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실험적 구조다. 1930년대 사랑 이야기인 <야생 종려나무>와 1927년 미시시피주 대홍수를 배경으로 한 죄수 이야기 <노인>이 교차하며 십 장으로 구성된다. 결국 그 이야기 속 인물들이 서로 시간의 흐름 속에 만나는 걸로 쉬운 접점을 가질 거라 생각했던 내 기대는 보기좋게 깨졌다. 주인공 둘이 마지막으로 각자 다른 이유로 같은 교화 시설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된 이야기로 이렇다할 접점은 없다. 이 두 이야기는 설정이나 인물이 아닌, 주제에서 만난다. 사회의 통상적인 기대나 가치관을 배반한 두 인물의 실패담으로, 승리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결국 무참히 패배하고 마는 이야기다. 윌리엄 포크너는 바로 이 실패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시간과 육체 앞에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래적 한계를 직시한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극한까지 밀고 갔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의 읽기다.


<야생 종려나무>

이야기의 시점은 언뜻 치밀한 위장으로 보인다. 사십대 의사가 한밤, 정식 부부로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부부 세입자 중 남자의 구조 요청을 받는 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지식한 '순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의사는 그 베일을 타의에 의해 찢을 수밖에 없는 불편한 순간이 온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 의사의 것이 아닌, 그에게 찾아온 청년 헨리와 죽어가는 샬럿의 것이다. 샬럿은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여자다. 의대생 인턴이었던 헨리는 우연히 파티에서 그녀와 만나 위험한 사랑의 도피 행각에 빠지게 된다. 사회적 관습, 시선, 평판에서 벗어나 오직 둘만의 사랑의 세계로 만들었던 그들의 일상은 그러나 지난한 먹고사는 문제들과 충돌한다. 여기에 더해 샬럿은 임신까지 하게 되며 그 낙태 과정에 헨리를 끌어들임으로 둘의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원한 사랑은 결국 지고야 말 싸움이다. 한낱 가벼운 불륜 스토리로 치달을 수 있었던 통속적 이야기는 포크너의 펜끝에서 인간이 시간과 사회, 관습 바깥으로 탈출을 감행할 때 감수해야 할 것이 결국 삶 그 자체라는 통렬한 진실로 파고든다. 



<노인>

기차 강도 미수 혐의로 십오 년의 형량을 선고받고 열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자마자 감옥에 갇힌 죄수는 대홍수 수재민 구조 작업에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실종돼 졸지에 사망자로 둔갑한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삭의 임산부를 구해 함께 이 재난을 통과하고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후일 엄청난 서사를 갖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오직 이 생면부지 여자의 안전한 출산과 이후는 아기와의 생존을 위해 온갖 굴욕과 고난을 감내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진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끼워 넣어 이야기의 균형을 잡는다. 어떻게든 교도소의 배를 안전하게 반환하기 위해 그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는 장면과, 자수해서 그곳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대목들은, 장기수가 탈출하여 해방되고 싶을 거라 생각하게 되는 게으른 선입견을 일거에 박살낸다. 그 과정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혼혈인과 함께 한 기묘한 협업과 동거 속에서 악어 사냥을 나서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다. 

결국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 십 년 추가 형량까지 받고도 크게 분노하지 않고는 동료 죄수들 앞에서 만담을 떠들듯 자신의 여정을 간략하게 압축해서 들려주는 상황은 또 어떠한가. 윌리엄 포크너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농담 같은 결론이다. 즉 그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모범수로 형량이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난 상태로 다시 갇히지만, 어쩐지 그 상황이 크게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럼으로써 한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의 아이라는 생을 구원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영웅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두 남자의 처절한 이야기가 있다. 손쉬운 허무주의로 침몰하지 않고 결국 삶의 부표에 올라서는 그 둘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여전히 빛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결국 그러해야 하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웅이 아닌 일상으로서 영위하는 삶, 끊임없이 패배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 연약한 육신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으로 시간을 횡단할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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