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여 년이 흘러가버린 과거에 살던 집 근처에는 사면이 유리로 된 예쁜 도서관이 있었다. 주택가에 숨어 있는 그 도서관은 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서가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신간이 좌르륵 꽂혀 있었고 놀랍게도 그 신간들은 언제든 원하면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백수린, 김금희, 손보미 작가를 만났다.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한동안 멀리 했던 소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그때 한창 작품 활동을 했던 이 작가들 덕택이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 사는 일의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백수린 작가는 나에게 특별하다. 그녀는 나의 어떤 한 시절을 상징한다. 아직 젊었고 아직 셀카 찍기를 좋아했던 그때를 연상 시킨다. 그녀의 책들을 빌리러 가던, 어느 봄날 나는 사진 속에서 행복하다. 그 사진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곧 숲속 유리 도서관에서 빛나는 유니버스로 들어가는 기대로 충만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작가도 세월과 함께 나이 들어 간다. 생애의 주기마다 쓸 수 있는 글이 다르다. 삼십대였던 작가와 사십대 작가가 바라보고 만드는 이야기는 미세하게 결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 변화가 작가가 삶을 사는 태도, 자세, 이야기를 만드는 힘에 의해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수린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그 여전한 방식으로 이제는 상실을 품은 사람과 사람 간의 그 애틋한 스침에 대하여 이렇게 결이 고운, 그러나 과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전히 읽는 사람의 눈물을 핑 돌게 한다.
홀로 살던 할머니에게 어느 날 원하지 않던 '그것'이 오고 마침내 '그것'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건 무엇일까? 수필 쓰기 수업을 듣지만, 과제를 제출할 수 없었던 할머니가 마침내 자기만의 글을 쓰게 된 그 계기는 그 사랑스러운 작은 솜털 뭉치가 남기고 간 따뜻한 온기 덕택일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그 돌연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인 <아주 환한 날들>은 발표되었을 때 이미 읽어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마지막 문장에서 먹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주 환한 날들> 백수린
<봄밤의 우리>에는 주인공이 유학 시절 만난 무해한 남자 사람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인 유학생은 집안의 가업을 잇기를 포기한 채 뒤늦게 무작정 프랑스로 날아 와 팍팍한 유학 생활을 하며 주인공의 한 시절을 함께 한다. 이 기묘한 우정은 언제나 그렇듯 미묘하게 어긋나고 주인공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눴던 노견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그와 다시 연락이 닿는다. 마침 늙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던 그와 주인공은 이렇게 상실의 한 시절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섣부른 상실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사랑했던 그 무엇을 잃고 난 다음 내가 경험하게 되는 그 개별적 상실의 무게를 상대의 그것과 등가 교환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바로 그 차이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남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일지, 그 둘의 재회는 결국 또 어떻게 어긋나게 되는지.
<눈이 내리네>의 다혜가 대학 시절 잠깐 함께 살았던 이모 할머니와의 이야기는 내가 잊었던 그 이십 대의 불안하면서도 흔들리는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봤던 세상이 얼마나 몽환적이고 드라마틱하고 진실과 멀어져 있었는지는 세월과 함께 잊어버렸지만, 작가를 통과한 다혜의 그 시절은 그것들을 복원하고 복기하며 거기에서 얼마나 지금 우리가 멀어져 왔는지 그 거리가 가지는 것이 비단 상실만이 아니라 어떤 삶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때만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가 지금에 남긴 지금만의 의미가 있다. 빛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백수린 작가가 환기하는 여전한 것들이 일깨우는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황홀한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