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 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 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 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을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 곳으로 여행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자기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경남 통영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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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7-1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제목으로 멋진 시를 쓰다니 정말 훌륭하죠? 저도 이진명 시집은 사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황봉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소설의 저자를 봤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영국집사의 이야기인데 일본작가라니. 5살 때 이민가서 영국에서 자랐다는 약력을 읽고야 그렇구나, 했지만 그래도 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어려서 이민을 갔다 해도 영국에서 동양인으로 그 시절에 성장기를 보냈다면 영국집사의 이야기를 자기 소설의 소재로 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이 사람은 정말로 외양만 동양인인 영국인인가봐,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옛스럽고 고풍스런 영국 집사의 말투가 얼마나 웃긴지 (대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배꼽을 잡아야 했다. 카즈오 이시구로는 주제에 따라 다른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아주 잘 훈련된 작가였다.

독서 전, 이 소설에 관한 두 가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첫번째는 이 소설의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것. 이 책은 전적으로 노집사 스티븐스의 회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스티븐스의 회상은 나중에 부정확하며 편견에 치우친 것으로 밝혀진다. 두번째는 이 소설의 시각적 배경. 오래 전 명화극장에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미리 본 탓에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내 머리 속에서 주인공 미스터 스티븐스는 당연히 앤쏘니 홉킨스의 얼굴을, 또다른 주인공 미스 캔튼은 엠마 톰슨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 책은 유쾌하고 코믹했으며, 읽어가면 갈수록 "정말 이 책의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맞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전개가 유연했다. 그래서 마지막의 스리슬쩍 반전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막바지 부분에서는 그 때까지 스티븐스를 통해 서술되어온 달링턴 홀의 짦은 역사 뿐 아니라 이 소설 자체의 의미까지도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아마 이런 것이 책읽기의 즐거운 혼란일까?

감정표현에 매우 인색한 것은 영국인들의 한 특징이라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실로 영국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주제를 다룬 소설이 막바지 부분으로 치달으면서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으로 변한다. 절제의 미학과 극단적 감상주의가 이렇게 완벽하게 결합된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저자가 일본계인 것과 관계가 있을까?) 

해가 막 저무는 부두가 벤치에 앉아 주인공 스티븐스는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게 된 낯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내가 수십년간 집사로 봉사한 달링턴경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는 더이상 고용주에게 선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라고 흐느낀다. 그의 충성과 애정을 한 몸에 받은 그 달링턴경은 명예를 존중한 구식 영국신사였지만, 혼돈의 역사 속에서 길을 잃고 그만 잘못된 정치적 노선을 따르는 큰 우를 범한다. "달링턴경은 그래도 말년에 자신이 우를 범했음을 인정할 줄 알았다"고 스티븐스는 그의 고용주를 회상한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나는 나 자신이 범했다고조차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그가 한탄하는 바로 그 때, 부두에서는 해가 지고 가로등이 찬란하게 켜진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친다. 그 때까지 기계공의 정확성을 가지고 경영해온 자신의 삶이 실은 무의미하게 낭비되었을 뿐임을 깨닫고 그가 처음으로 오열할 때, 작가는 하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해가 지는 그 저녁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인생을 송두리째 낭비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스티븐스와 마찬가지로 미스 켄튼 역시 사랑 없이 결혼했으며 세 번이나 남편의 곁을 떠날 시도를 했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런 이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려놓고 카즈오 이시구로는 그래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the remains of the day)이 있고, 그 시간(evening)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황혼의 인생을 황혼의 아름다움에 비견하는 이 감상주의가 시어빠진 신파로 전락하는 대신 소설의 인상적인 반전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필시,  한 인간이 과연 얼마나 철저히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훼손할 수 있는지와 정직하게 대면한 작가의 용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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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6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7-1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아 있는 나날, 무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엠마 톰슨이 이 영화에서 참 좋았어요.
늙은 집사의 고집이 안타깝고도 슬펐고요.^^

검둥개 2005-07-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오타 고쳤습니다. 감사해요 ^^;;;

저도 엠마 톰슨이 너무 좋았어요. 근데 Love Actually에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고요. :)

비로그인 2005-08-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해요. 인생의 황혼기에.. 제가 저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잘 살았고, 충분히 노력했다. 이제는 죽어도 원이없다.
혹은 뭐하고 살았니? 어쩜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니. 되돌아가고 싶다.
전자와 후자중 어떤 생각을 할까? 그리고 꼭 전자를 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러기위해서는 하루하루 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
가장 행복한 인간은 인생의 마지막순간, 행복한 미소를 짓고 눈을 감는자겠죠?

검둥개 2005-08-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은 현자같은 말씀만 하세요. ^^ 누구든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죽어도 원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이만큼 했어야 했다, 보다는, 할만큼 했다, 정도로 매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기대치를 줄이면 행복도가 높아지거든요. ^^;;;
 
 전출처 : 플레져 >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詩  한 강





Miyo Nakoj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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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브레히트)


1.
정말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순진한 말은 부조리할 뿐이요, 주름 없는 이마는
냉정한 심성을 표시할 따름이니, 웃고 있는 자는
끔찍한 소식을
채 듣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부정의에 대한 침묵을 뜻하므로 곧 범죄와 같은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저기 조용히 길을 건너는 사람을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은 만나볼 수도 없단 말인가?

내가 아직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다만 우연일 뿐이라는 말을 믿어다오. 그 무슨 짓도
내가 배불리 먹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살아남은 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운이 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먹고 마시라고, 그럴 수 있음을 기뻐하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먹는 음식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한 잔의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 역시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 씌여진 현명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짧은 인생
마음 편히 지내고
힘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악을 선으로 갚고
욕망을 채우기보다 마음을 비우는 것
바로 이런 것이 현명함이라 했다.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으니
정말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2.
모두 다 굶주리던
혼란한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폭동이 일어나던 시대에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과 함께 나도 격분했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끼어 잠을 자고
아무렇게나 사랑을 하고
인내심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리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나 있었다.
내가 쓰는 말이 나를
도살자들에게 드러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존재할 때
지배자들은 덜 안전하기를, 그것이 나의 바램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없었고, 갈 길은
너무나 멀었다.
목표는 또렷이 보였지만,
가닿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
우릴 가라앉힌 
홍수 위로 떠오를 너희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말할 때면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부디 생각해다오.

불의가 판치는데도 분노가 없어 절망하면서
신발보다도 더 자주 망명지를 바꾸어가면서
우린 계급의 전쟁을 겪으며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우린 알게 되었다.
천박한 것을 증오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의를 보고 분노해도
목소리가 쉬게 된다는 사실을. 아,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희들, 인간이 인간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거든
부디 관대한 마음으로
우릴 생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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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후손들에게>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었는데, 그 때 가지고 있던 시집이 한마당의 것이었는지 청하의 것이었는지 기억이 아른아른합니다. 제목이 기억이 안 나서 인터넷에서 한참을 헤맸답니다. 결국 제가 오래 전에 읽은 번역과 가장 유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기억의 마술일까, 예전에는 전혀 안 보였던 부분들이 오역이라는 감이 팍팍 오는 것은 왜였을까요? 나이가 드니 역시 감수성이 떨어져서인가 봅니다. 숲은 못 보고 나무를 본달가요. 오역인 듯한 부분을 고친다고 조금 고치고, 말투가 어색한 부분도 조금 고친다고 고쳤는데, 아무래도 제 역량 밖인 일이었기는 합니다만, 덕분에 이제 짜잔, 제 기억 속의 브레히트 시에 가장 근접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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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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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브레히트입니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걸어야 할지라도,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둔 이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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